살전4:1-5,
아주 흉포한 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 아이들이 무서워서 맘대로 밖에 나가서 활동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뱀이 너무 무서워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알았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물지 말라, 그랬더니 이제는 아이들이 뱀을 막대기로 때리며 괴롭혔습니다. 이제는 뱀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괴롭혀서 죽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언제 아무일도 하지 말라 했느냐? 물지만 말라고 했지, 쉿쉿 소리도 하지 말라 했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데살로니가 전서는 1-3장과 4-5장으로 전반부는 교회에 대한 칭찬과 감사의 부분이고 후반부는 종결과 교회 문제에 대한 교훈과 권면의 말씀입니다. 4-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실제적인 신앙과 권면과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특히 1세기의 남성들은 성의 대한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쾌락을 위해 정부를 두고 살았고 또 종교적인 제의식에서 여 사제를 두어 풍요의 제사를 빌미로 또한 남성들에게 쾌락을 제공하였는데 바울은 부부외에 성금지령은 그 당시에 문화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낯선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은 거룩함이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방인들처럼 색욕을 쫓는 삶은 안 되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의 삶을 살라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또한 깨달아서 그렇게 사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도는? 1절입니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건가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운대로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힘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만큼 하면 되지, 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제한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운동선수가 연습을 하는데 본인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시합날짜는 아직 남아 있는데 이만하면 충분해 최고의 성적을 거둘 수 있어, 하고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시합에 나갔을 때 결과가 어떨까요?
바울은 신앙이란 경주를 하는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는 보지 않고 앞에 있는 표대를 향해 달린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만큼 했으면 되었다고 하고 끝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린 아이가 자라듯이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함에 이르기까지입니다(엡4:13), 자라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이며, 무기력한 신앙이고, 좋고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현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일지라도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현재보다 더욱 분발하여야 합니다. 아멘.
엡4:14,15,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입니다.
3-4절“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면 삶의 목표가 거룩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뜻’이란 단어는 ‘델레마’로서 ‘소원, 목적, 욕망, 기쁨, 의지’ 등을 의미합니다. 다시 원어로 보면 ‘델레마 투 데우’ 하나님의 소원, 혹은 하나님이 열렬히 바라시는 뜻은, 혹은 목적은 ‘거룩’이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얼른 단어로만 보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절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은 뭘까요?
‘거룩’‘하기아스모스’는 ‘성화’로 많이 번역이 되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의 성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속하여진 자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 때문에 삶속에서 성화, 성결을 이루어가야 하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고 거룩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음란을 버리고, 직역하면 ‘너희를 음란으로부터 스스로 삼가고’입니다. 여기서 ‘버리고’‘아페케스다이’는 어떤 좋지 않은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자제하고 삼갈 때 쓰는 단어로 신약 성경에서 간음, 혹은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육체의 정욕,등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 ‘음란’‘포르네이아스’의 원형 ‘포르네이아’는 모든 형태의 성적인 방종을 가르키는 단어로 ‘음행’으로 번역되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음란은 생각과 행위, 성적인 모든 범죄를 말하고 있고 이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삼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있어 첫 번째로 음란을 다루었을까요? 당시에 문화 배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모리스라는 사람에 의하면 당시 헬라인들은 성욕을 절제한다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혼 후에 또 다른 여성들, 그리고 미소년들과 성생활을 하고 살았습니다.
또 신전에서는 신전 창기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죄의식이 전혀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시대를 따라가면 안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면서 성결한 삶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고 있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8-20)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함을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5:48절“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 바울도 말씀했습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히12장에도 말씀합니다. 14절“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5절 하나님을 모르는 것, 믿지 않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따르지 말고의 금지 명령어 ‘메’가 맨 앞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강력한 금지 명령어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처럼 성적인 욕망에 사로 잡혀서 살지 말라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비 유대인을 말한다기 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믿지 않는 것, 이들이 이방인인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라는 ‘야다’는 지적으로 아는 것, 외에 경험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이는 지식으로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알고 또 교제를 통하여 체험적으로도 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는 필수적인 항목이라 하겠습니다. 사도요한이 전하여준 말씀을 보면 요일4: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알고 믿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 됩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 없어서 불신앙에 자리로 떨어지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성직의 길을 가겠다고 신학교를 들어간 학생이 동성애자이고 그를 또 총학생회장으로 뽑고 거리로 나가 동성애를 외치는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소원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끝 날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4: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또 행전28:26절에도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엡4:18절에도 바울이 전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인격적인 교제, 체험이 없이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믿고 따라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시 119편18절에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를 뚫고 들어오시어 주를 알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시고 주를 따라 가는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삶이 성결하라고 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방탕하고 무분별한 삶은 예수를 믿기 전에 일들로 족하게 여기고 이제는 하늘의 시민답게 거룩한 제사장답게 살라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좀더 주님과 친밀해지고 주를 바라봄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래서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리고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