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병자년 이제 지지 관성으로 조직의 힘이 인생의 발전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봐지는 세월들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은 그러한 특징이 나타났고 나라가 없는 조선은 동아일보 등이 앞장서 일장기말살사건을 일으키니 언론사 전체의 힘이었다. 아래 음악가도 뛰어난 음악가인 것은 사실이나 명문대출신인 것이 주요했다.
1.
최희준은 트로트가 주류이던 1960년대에 미국 팝에 영향을 받은 이른바 스탠더드 팝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가수였다. 미8군 쇼 단에서 노래하던 그는 1960년 국내 일반무대에 진출해 가요계의 새로운 흐름을 대변했다.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노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가 그의 데뷔곡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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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재즈음악 요소가 강했던 세련된 그의 스탠더드 팝은 가요 팬들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뉴 뮤직’이었고 새 음악을 갈망하던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로부터 가요는 이전의 음악 대세였던 트로트와 새로이 떠오른 미8군 출신의 재즈계열 가수들이 경쟁과 호혜의 평행선을 그으며 두 축을 이뤘다. 후자인 스탠더드 팝 쪽에서 여자가수 최고는 패티 김이었고, 남자가수의 톱이 바로 최희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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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 가요계의 외형적 품격을 올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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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의 전성기는 데뷔한 1960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더욱이 그의 시대는 민간 방송국의 출현과 시점이 정확히 맞물렸다. 1961년 12월 MBC가 개국해 라디오방송을 시작했고 1963년 4월 DBS, 1964년 5월 RSB 라디오서울도 방송을 개시했다(후에 TBS로 통합). 관영 KBS가 TV방송을 한 것은 1961년 말이었고 TBC는 64년 말, MBC는 1969년 8월 영상시대를 열었다. 최희준의 히트곡 ‘내 고향 팔도강산’(신봉승 작사, 이봉조 작곡)이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로 각광받았고 역시 MBC 라디오의 역사드라마 ‘광복20년’(나중 광복30년)의 테마송을 그가 부른 것이 말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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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TBC는 가요 발전의 자극제가 된 방송가요대상 제도를 만들었고, 첫해 가수부문에서 최희준이 수상하면서 그는 방송과 극장 모두를 석권하는 한국 최고가수로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손석우 작곡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사랑의 목장’, 김호길이 쓴 ‘진고개 신사’ ‘하숙생’, 색소폰을 들고 지방에서 혈혈단신 상경한 이봉조가 작곡한 ‘맨발의 청춘’ ‘나는 곰이다’ ‘종점’ ‘팔도강산’ 등으로 일세를 풍미하면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15년 가까이 슈퍼스타로 군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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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또한 1962년 이후 가요계의 특징으로 꼽히는 학사가수의 출현을 대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와 동갑내기들로 미8군 무대에서만 활약했고 나중 ‘포 클로버’가 된 유주용, 박형준, 위키리 그리고 나중에 등장한 조영남은 모두 대학출신 엘리트들이었다. 여가수들 중에서는 고대 법대 출신의 김상희와 1961년 한명숙과 함께 듀엣으로 ‘딸이 좋아요’를 부른 강수향이 학사가수였다. 최희준을 필두로 이들은 가요계의 외형적 품격을 올리면서 고학력 팬들을 가요시장으로 끌어들이는데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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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 무대에서 다진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분위기 있게 부르다가도 클라이맥스에서 폭발하는 창법이 그의 주특기였다. ‘맨발의 청춘’, ‘길 잃은 철새’, ‘종점’ 등 기성세대들 기억에 선연한 곡들이 그러했다. 처절한 맛의 스탠더드 발라드 외에도 최희준은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와 같은 스윙 리듬의 곡도 포괄하는 발군의 소화력을 과시했다. 남진은 최희준의 노래로부터 가요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다고 밝혔으며 조용필은 1981년 ‘길 잃은 철새’를 리메이크했고 까마득한 후배 가수 이승환도 1991년 최희준 오리지널 ‘하숙생’을 불러 화제를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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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 가곡과 대중가요의 벽을 좁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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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은 1970년대에 가곡인 ‘가고파’(김동진 곡)를 불러 ‘선구자’(조두남 곡)를 부른 조영남과 함께 가곡과 대중가요의 벽을 좁히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1974년 ‘길’ 이후 노래 활동 외에 사업가로도 성공했고 1995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으로 가수 지위향상에 힘썼다. 최희준은 이미자, 윤복희, 2012년 은퇴를 선언한 패티 김과 더불어 가수활동 50년을 넘긴 원로가수 중 한명이다. |
2. 황병기는 1936년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가야금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1년 부산 피난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경기고등학교 시절에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명인인 김영윤,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하였다. 당시 서울대 법대 학생이며 남학생으로는 특별하게 대학 2학년 때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9년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1963년까지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에서 가야금을 가르쳤다. 2000년 2월에는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부터 200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배출한 제자로 동국대학교 교수 윤소희, 단국대학교 교수 서원숙, 숙명여대 교수 김일륜, 이화여대 교수 곽은아, 서울대학교 교수 이지영, 서울대학교 강사 지애리,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이정자, 이화여대 강사 조윤정, 정순희, 대구예술대학 강사 이미경, 숙명여대 강사 이영신, 수원여대 강사 박지영 등이 있다. 이화여대 재직시 개인적으로 지도한 제자로는 준인간문화재 양승희, 이화여대 교수 문재숙, 서원대학교 교수 박현숙, 추계예술대학 교수 이효분, 전남대학교 교수 성애순 등이 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객원교수로 지냈다.
1986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2001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로 활동하였으며, 2002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특별초빙교수로서 "한국 전통음악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한 바 있다.
현재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음악활동
1974년부터 《침향무(沈香舞)》외에 5개의 앨범을 작곡하였다. 현대음악 기법으로 쓰여진 《미궁》(1975)은 2000년대 초반에 ‘세 번 들으면 죽는다’는 루머와 함께 퍼져서 ‘무서운 곡’으로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2007년 5번째 앨범인 《달하 노피곰》을 발매한 후 현재까지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가야금 독주곡인 《침향무》, 《비단길》, 《미궁》에 대하여 에세이집 《깊은밤, 그 가야금 소리》 에서 황병기는 “각기 다른 곡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음악이 끝나기 직전에 많은 음들이 한데 휘몰아치면서 음향적인 혼돈상태를 이룬 다음, 다시 음악적인 정상 상태를 회복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혼돈 다음에 《침향무》에서는 천사의 옷깃이 나부끼는 듯한 투명한 글리산도의 분산화음으로, 《비단길》에서는 최초의 조용한 주제 선율을 재현하면서, 《미궁》에서는 반야심경의 주문에 의한 명상적인 성가로 끝난다.... 《침향무》와 《비단길》에서의 혼돈의 음향을 바람소리에 비유할 수 있다면, 《미궁》에서의 혼돈은 바다소리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1963년에는 Alan Hovhaness 작곡 「가야금과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16번」을 남산 KBS홀에서 호바네스의 지휘 아래 KBS교향악단과 함께 초연을 했다.
1964년 국립국악원 최초의 해외공연이었던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 초청 일본 순회공연에 가야금 독주자로 참가하고 공연 후 NHK에 단독 출연하기도 했다.
1965년 4월 22일-5월 2일에 미국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금세기 음악 예술제(Festival of Music and Art of This Century)에 초청되어 작곡 발표 및 가야금 연주. 최초의 독집 음반(LP) Music From Korea: The Kayagum』(East-West Center Press) 취입. 6월-8월 워싱턴 대학교에서 하계 학기 lecturer로 한국음악 강의. 샌프랜시스코, 로스앤젤리스, 시애틀에서 가야금 독주회. 샌프랜시스코 하계음악제에서 Lou Harrison 작곡 「Pacific Rondo」연주. '미국의 소리' 방송 출연.
1965년 공보부 제정 '국악상'과 '문화표창장'을 받았다.
1968년 뉴욕에서 백남준(白南準)과 처음으로 만나 Town Hall에서 열린 그의 작곡발표회에 출연한 이래 친분을 맺었다. 백남준의 소개로 존 케이지와 만나고 조각가 John Pai와 교류를 하면서 전위예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의 또다른 일면 저서중 논어 백가락이 있어 일부를소개한다.
부유한 것이 만약 추구할 만한 일이라면, 비록 채찍을 드는 천한 일이라도 나는 그것을 하겠다. 만약 추구할 게 못 되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길을 따르겠다.
- <술이> 편 11장
채찍을 드는 일이란 마부의 일을 뜻한다. 마부는 당시 천대받던 직업이었다. 그런데 공자는 부가 추구할 만한 것이면 그것이 아무리 천대받는 것이라도 부 그 자체를 이룩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길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돈을 버는 일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공자에게는 부를 취하는 것보다 도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가 무엇에 더 가치를 두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다.
- <자한> 편 17장
아주 재미있고 고급스러운 농담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얼마나 놀라고도 웃음이 터졌을까. 이 말씀에서는 아무리 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덕보다는 여색을 더 좋아한다고 했을 뿐, 그래서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가치판단을 일체 하지 않은 점이 절묘하다. 공자 자신조차 덕보다 여색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앞서 살폈듯이 공자는 먹는 것을 중요시한 대단한 미식가이고 고기도 좋아하고 주량도 꽤 되었으며, 뒤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누구보다도 시와 음악을 좋아하고 뜨거운 연심(戀心)도 이해하는 어른이었기 때문에 끼가 넘치는 군자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위대함은 바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