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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선 것들과 마주서다
하나.
날선 검처럼 서늘한 기운으로 낮선 것들과 마주서고 싶었다.
거친 황야로 거칠게 내던져지고 싶었다.
임재범처럼, 성난 야수같이 포효하고도 싶었다.
내 안의 열정들이 소진되기 전,
내 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기 전.
아들을 낳기 전부터 배낭여행을 꿈꿨다.
달랑 배낭하나 메고 끝간 데 없는 들판을 말없이 걷고 싶었다.
어느 둑방에서 내가 라면을 끊이면 아들은 돗자리를 펴고 나뭇가지를 잘라 젓가락을 만드는 모습을 그렸다.
거친 겨울바람에 손이 오그라지고 발에 동상이 걸려 절뚝거려도 믿음에 찬 눈길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 5년 만에 딸을 낳고,
그 뒤 3년이 지나서야 태어난 아들은 더디 자랐다.
보약을 먹여도, 뜀박질을 시켜도 체중이 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 해, 아들이 부쩍 자랐음을 느꼈다.
성기도 제법 거뭇해지고, 발 크기도, 체중도 제법이었다.
엄마 곁을 떠나 홀로서려는 모습에서 사춘기 초입의 남자가 느껴졌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올 때쯤 아들에게 둘만의 여행을 제의했다.
집과 엄마곁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불안해했던 아들은 나보다 더 좋아하며 선뜻 동의하였다.
아들과 약속을 하였지만 사상 유래 없는 폭우는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수해로, 산사태로 사람이 죽고, 가옥이 부서지는 난리 속에서 우리만 여행을 떠나기도 면구스러웠다.
머뭇거리는 나를 아들은 자꾸만 채근했다.
자신은 몸과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데 왜 떠나지 않느냐고 졸랐다.
그렇게 나흘을 버티고 나서 두 손을 들었다.
둘.
우리가족은 성향이 제각각이다.
나의 성향을 빼닮은 아들은 소심하고 치밀하면서도 허점이 많고, 역마살이 끼어 떠돌기를 좋아한다.
아내를 빼닮은 딸은 포용력이 있고 성품이 너그럽지만 움직이기 싫어하고 폭식을 즐기며, 거친 여행보다는 럭셔리한 관광을 즐긴다.
아내는 아들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몇 년 만에 창고에서 25kg짜리 등산용 배낭을 찾아냈다.
코펠과 버너도 찾아냈고, 몇 가지 준비물도 끄집어냈다.
등산용품들은 그런대로 쓸만했지만 오래 묵은 배낭은 곰팡이가 슬고 눅눅해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컴퓨터배낭에 코펠, 버너, 수건과 세안용품, 갈아입을 옷 등을 챙겼다.
사실 떠나기 전에는 이것저것 챙겨야할 것이 많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보면 갈아입을 옷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쓸모없는 것뿐이다.
오전 10시 20분쯤 집을 나섰다.
버스에 오르기 전 집 앞 은행에서 현금 12만원을 찾아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할 수 있다면 이 돈으로만 일주일쯤 살고 싶었다.
피서철 기차역은 혼잡했다.
기차역에서 아들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글쎄, 어디로 가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턱대고 전주로 가자고 말했다.
전주쯤 가면 김제와 담양이 보일 것이고, 순창이나 남원도 눈에 잡힐 것 같았다.
표를 구하느라 헤매다가 1시간 20분 뒤에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탑승하였다.
셋.
전주까지는 2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정처 없이 떠나는 길이어서 무엇을 볼지, 무엇을 먹을 것인지, 어디에서 잠을 잘 것인지 정해진 것이 없었다.
기차에서 내리면 오후 2시 50분 경, 아무래도 점심 먹을 식당을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지도를 보며 콩나물국밥과 비빔밥, 돌솥비빔밥 가운데 무엇을 먹고 싶냐고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콩나물 국밥을 먹자고 말했다.
집 가까운 산을 등산했을 때 몇 차례 먹었던 음식이어서 그래도 가장 친숙한 것 같았다.
기차 안에는 대학생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요즘 코레일에서는 방학을 맞아 매우 싼 값으로 1주일동안 전국 어디에나 갈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판매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자유이용권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전주역은 도시 외곽에 있다.
동승했던 대학생들 상당수가 우리와 함께 내렸다.
일단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한 전주한옥마을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들은 좌석에 앉았다가 할머니가 다가오자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에이, 선수를 뺏겼네.
약간 창피한 마음에 나도 얼른 할머니 한 분을 자리에 앉혔다.
전동성당 건너편 정류장에 하차하여 콩나물 국밥의 명가 ‘삼백집’을 물었다.
이왕 먹는 것 전통 있고, 맛있고, 유명한 집에서 먹자는 생각이었다.
길가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는 저기 지나서, 이렇게 돌아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10분이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식당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차, 여기가 전라도지!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걸어가며 기전여고의 정샘에게 전주에 왔노라며 맛있는 집 좀 추천해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좀처럼 답장이 없던 정샘은 삼백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쯤에야 바람처럼 달려올 테니 얼굴 좀 보여 달라며 답장을 하였다.
오후 4시 경 삼백집은 손님이 많지 않았다.
구석에 앉아 콩나물국밥 두 그릇과 모주 한잔을 주문했다.
콩나물 국밥은 조금 투박했지만 조미료를 적게 넣어 신선했다.
하지만 모주는 너무 달아서 흡사 진하게 우려낸 흑설탕물 같았다.
편식으로 유명한 아들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맛있다며,
원조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며 금세 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일찌감치 한 그릇을 비운 나도 마주보며 씩 웃었다.
넷.
식사를 마칠 무렵 정샘이 도착하였다.
정샘은 삼백집보다 요즘에는 현대옥이 뜨고 있다며 맛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우리는 택시타기를 거부하고 뜨거운 뙤약볕을 걸어 전주객사를 답사했다.
전주 객사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객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건축도 독특했다.
비록 바깥쪽 담장과 안쪽 담장,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사라져버렸지만 중대청과 좌우 익헌만으로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정면의 중대청은 똑같은 3칸으로 지어졌는데도 다른 건물에 비해 폭이 넓었고, 내부에 전돌을 깔은 다른 객사들과 달리 누마루와 방을 꾸며 독특함을 보였다.
정샘은 전주 구 시가지에서 객사는 사람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때론 앞마당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처럼 사진전시나 미술전시도 하고 있으며, 연인들의 약속장소로도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였다.
정샘은 ‘접빈객’의 의무에 충실했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귀찮을 법 한데도 싫은 내색 없이 충실히 안내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풍남문(전주성의 남문)과 전주 감영 터를 답사한 뒤 한옥마을 입구의 경기전으로 향했다.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는 전라도의 상징적 존재여서 이래저래 손을 많이 탔다.
가장 큰 사건은 정유왜란 때 일본군에게 함락되어 피해를 입었던 일과, 동학농민군이 정읍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에서 정부군에 승리한 뒤 여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했던 일이다.
정샘은 농민군들이 남문을 통해 입성했다고 말했다.
입성한 농민군들은 외세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하였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 12조를 실천하였다.
한옥마을 입구 전동성당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건축된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첨탑이 아름다워 한옥마을과 대조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동성당을 지나 경기전에 들었다.
저 지난겨울 가족여행을 할 때 아내의 성화로 찬찬히 살피지 못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세심하게 살펴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중궁궐을 넘듯 남에서 북으로 일직선으로 연결된 각각의 문들도 특별했지만 교과서에서만 보아왔던 태조 이성계의 진영(眞影)은 진짜에서 풍기는 특별함을 주었다.
문화유산은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그리고 계절과 날씨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다르다.
경기전 동편의 전주 사고는 몇 년 전 보았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여러 번 보아서인지 건축의 전체적인 구조도 새로워보였고 다른 건축과 비교하는 여유도 생겼다.
전주 사고는 정유왜란 때 전주성이 함락되면서 불탔다.
불에 탈 때 사고참봉 오희길과 유신, 수직유생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산 은봉암으로 실록을 옮겨 실록만은 병화를 면하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전주사고본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문화유산이 되었다.
조선왕조는 전주사고본과 태조의 어진을 전란 중에는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나중에는 강화도로 옮겼고, 전란 후에는 이것을 토대로 4질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여 전국 5대 사고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주사고만은 다시 복구되지 못하여 지금껏 빈 건물만 남게 되었다.
다섯.
한옥마을에는 볼거리 먹을거리 체험거리가 많다.
정샘과 경기전 동편 최명희 문학관 근처의 찻집에 앉았다.
작은 정원과 테라스가 아름다운 찻집에는 몇 몇 손님들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찻집에 갈 때마다 아쉬운 것은 프랑스처럼 토론문화가 없다는 점이다.
토론이 없는 찻집은 알맹이 없는 호두, 앙금 없는 찐빵과 같다.
토론이 없는 것은 여유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정신문화가 박약해서일 것이다.
아들은 카페에 들어서자 실내에서 키우고 있는 개에게 눈길을 준다.
카페주인이 키운다는 개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사자의 갈기를 하고 있는 ‘황제개’다.
황제개는 손님들이 관심을 주는 것에 아랑곳 않고 보무도 당당히 통로를 누볐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지만 점심을 늦게 먹은 탓에 뱃속이 더부룩하다.
어둑해지는 한옥마을을 뒤로 하고 오목정에 올랐다.
전주천이 휘돌아 흐르는 언덕배기에 건축한 오목정은 저녁 조명에 화려한 풍광을 자랑하였다.
누마루에 오르니 바람도 서늘하여 여름밤 휴식장소로는 더 할 나위 없다.
태조 이성계는 전주에 내려올 때마다 오목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연회에는 전주지역의 호족들이 대거 참석했을 것이다.
근본이 미약했던 태조는 이들과의 연회를 통하여 자신의 뿌리가 전주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목정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는 한옥마을이 한눈에 잡힌다.
어둠이 밀려오는 한옥마을을 지나 풍남문 인근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아직까지 더부룩하지만 제 때 점심을 먹었을 정샘은 시장할 것이다.
정샘이 안내한 곳은 가족회관이었지만 입구에는 음식재료가 바닥나서 문을 닫는다는 팻말이 걸려 있다.
무척 아쉬워하는 정샘과 함께 뒷골목에 있는 중앙회관에 들어갔다.
광주가 고향인 정샘은 전주사람들은 대단히 보수적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실상 전통 있는 도시가 진보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전주가 보수적인 것은 음식문화에도 나타났다.
퓨전요리가 난무하는 요즘세상에서 전주의 비빔밥, 콩나물해장국은 전통의 맛 그대로였다.
아들은 전통의 맛이 불편한 듯 몇 숟가락 맛만 보고는 다 먹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식사를 물리고 정샘은 지인들께 수소문하여 우리가 묵을 찜질방까지 안내한 뒤에야 작별을 고했다.
고마운 샘, 우정을 잊지 않으리.
여섯.
한 여름, 그것도 평일의 찜질방은 한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평택에서는 대부분의 찜질방이 8월 전후에 휴가기간을 정하거나 내부수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헌데 전주의 찜질방은 인산인해였다.
잠을 자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매트와 담요도 금방 동이 났다.
우리는 화장실 앞에 자리를 펴고 비스듬히 누워 만화책을 펴들었다.
아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만화책을 읽다가 잠시 양치질을 하고 왔더니 그새 매트 한 개가 실종되었다.
아무리 잠자리가 부족하기로서니 이럴 수 있냐며 씩씩거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찜질방은 장점은 몸을 씻고 피로를 풀기가 좋다는 점이다.
불편한 잠자리의 피로를 미지근한 욕탕과 스파로 풀고 짐을 꾸려 전주역으로 향하였다.
우리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다음 행선지를 상의하였다.
아들은 내가 정하면 따라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남원에서 지리산둘레길 트레킹을 할까, 아니면 곡성 기차마을을 갈까 저울질하다가 아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곡성행 표를 구입했다.
기차 출발시간은 30분쯤 남았다.
대충 정리를 하고 났더니 비로소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역 구내에는 자리가 없어 컵라면 두 개를 사들고 밖으로 나가 담벼락에 자리를 폈다.
이른 아침 기차역 담벼락에 기대앉아 컵라면을 먹는 것도 낭만이 있었다.
폭우가 쏟아진다는 경기, 강원도 소식과는 달리 전라도의 하늘은 햇볕이 쨍쨍하다.
뜨거운 뙤약볕을 받으며 곡성기차마을로 향했다.
기차마을은 곡성역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있었다.
아름답고 맑은 섬진강과 전라선 기차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곡성에서 ‘기차’를 콘텐츠화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눈이 보배’라고 하였던가?
기차마을은 널따란 꽃밭과 객차를 활용한 카페, 레일바이크, 증기기관찬, 바이킹 같은 아이들의 놀이기구 등으로 구성되었다.
아쉽다면 길가에 쉬어갈 수 있는 가로수와 벤취, 정자와 주막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정도 만으로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나는 레일바이크를 탄 뒤 증기기관차를 타고 가정역까지 다녀오기로 하였다.
레일바이크는 옛 철길을 달리는 4인용 자전거를 타고 1.6km를 돌아오는 놀이다.
비용은 7천원이지만 4인 가족이 탑승한다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대부분 4인이 타는 레일바이크는 우리는 앞자리, 뒷자리에 한 사람씩 앉아 힘차게 굴렀다.
증기기관차는 모양과 이름만 ‘증기’이지 실제로는 전기기관차였다.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으로는 섬진강 물줄기와 전라도의 한가한 농촌풍경이 펼쳐졌다.
주변 풍광이 수려한데도 아들은 기회만 있으면 닌텐도를 꺼내들었다.
내가 여행을 하며 게임기에 몰두하는 건 방안에 앉아 게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제지를 하자 이번에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좀처럼 느리고 심심한 것을 못 참는 아이들, 아들에게 시속 30km의 증기기관차는 어떤 의미일까.
가정역에 도착하여 30분을 휴식하였다.
최근 내린 폭우에 흙탕물이 되어버린 섬진강에 몸을 담그기도, 강변에 마련한 자전거도로를 달리기에도 날씨는 너무 더웠다.
아들과 강변에 내려가 돗자리를 깔았다.
강변은 시원했고, 울창한 나무들은 든든한 그늘막이 되어주었다.
돗자리에 누워 여흥을 즐기는데 아들이 없어졌다.
마침 뱃속도 거북하여 아들을 찾으며 화장실로 향하는 데 아들은 개집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진헌, 뭐하냐?’
내 물음에 그제서야 고개를 든 아들은 ‘개가 멋있는데’라며 히쭉 웃는다.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들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것이 소원이다.
아파트에서도 키울 수 있지만 아토피가 있는 딸 때문에 감히 저지르지 못하고 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화장실로 내달렸다.
기차시간이 임박하여 허겁지겁 탑승한 뒤 우리 좌석으로 향했다.
내려올 때에도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양보하여 서서왔던 터라 이번에는 반드시 앉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어, 그런데 이게 왠일!
할머니 한 분과 젊은 여성이 우리 좌석을 차지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머니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좌석이 몇 번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건너편 빈 좌석을 가리키며 자신은 이곳에 앉고 싶으니 저쪽에 앉으라고 가리켰다.
저마다 좌석번호가 있어 그럴 수 없다며 입석이면 그냥 앉으시고 좌석이 있으면 번호대로 앉으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옆에 앉은 젊은 부인에게 자리를 내달라고 말했다.
젊은 부인도 어린 아들만 끌어안은 채 들은 채를 하지 않았다.
뭐 이런 일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화를 누그리고 좁은 빈공간에 아들을 앉혔다.
비록 좌석을 강탈당하기는 했지만 서서가는 것도 장점이 많았다.
앉아서는 보이지 않던 풍광들도, 사람들의 모습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 세상 공평하다.
공평하신 하느님!
일곱.
아들은 낚시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구례구역에서 쌍계사 방면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지만 아들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어 여수행 기차표를 구입했다.
시원한 기차 안에서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났더니 여수에 도착했다.
여수는 신혼시절 아내와도 여행하였고, 이, 삼년 전 결혼식 참석 차 혼자 여행하기도 하였다.
여수는 철도역만 엑스포 행사장 부근으로 옮겼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서 여수시청 문화관광과에 문의를 하였다.
낚시와 피서를 겸하려면 아무래도 여객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가거나 돌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우선 진남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진남관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사령부였으며, 삼도수군통제영이 한산도로 옮겨가기 전 통제영이 주둔하였던 곳이다.
진남관 앞에서 버스에 내려 길가는 아주머니에게 주변에 싸고 괜찮은 숙소와 볼거리, 먹거리를 물었다.
아주머니는 진남관을 비롯해서 이순신광장, 해안산책로 등을 소개하였다.
진남관에 올랐다.
아들은 놀이공원에 갈 때와는 다르게 진남관 앞에서는 시무룩한 표정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라고 해도 읽는 둥 마는 둥 관심도 없다.
에구 속 터져!
진남관에 오르니 정면 12칸도 더 되는 엄청난 크기의 누마루가 눈앞에 다가왔다.
좌수영이 누마루 뿐은 아니었겠지만 이 건물만으로도 당시의 전체적인 규모가 짐작되었다.
누마루에서 내다본 여수항은 참 아름다웠다.
나중에 들었지만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를 하던 시절에는 진남관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니 당시의 풍경은 더욱 장관이었을 것이다.
항구 쪽에서는 비린내가 풍기고 멀리 내다보이는 돌산대교에는 차량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일 돌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늦게 먹은 점심 탓에 다른 볼거리를 찾고 싶었다.
진헌이는 어둡기 전에 낚시를 하자고 조른다.
최근에 조성했다는 이순신 광장으로 가로질러 전망대까지 가서 인증샷을 하고 내려와 근처 낚시가게로 들어갔다.
낚시가게 주인은 항구 주변에서도 낚시가 가능하다며 분위기를 돋운다.
낚싯대와 갯지렁이를 입밥으로 준비하여 해변가에 앉았다.
여수항은 여러 차례의 간척사업으로 수심이 제법 깊었다.
낚시바늘에 갯지렁이를 끼워 바다에 던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입질한 번 제대로 없다.
아들은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매우 컸다.
건너편에서 낚시를 하는 아저씨의 폼이 괜찮아 보여서 자리를 옮겼다.
아저씨는 여수 토박이라고 하였다.
항만간척이 이뤄지기 전 진남관 앞 갯벌에서 물놀이를 하였던 기억과 갯가에서 볼락낚시를 하였던 추억을 내어 놓을 때에는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아저씨 옆에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아저씨는 자신이 낚은 볼락 한 마리를 건네주었다.
따뜻한 마음에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여덞.
아저씨에게 근처에 싸고 맛있는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의 부탁에 난감해하던 아저씨는 턱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즈기로 가서 백반만 시켜 먹어도 반찬 좋아부러요’라고 수줍게 말한다.
아저씨가 가리킨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괜찮은 냉면집과 또 괜찮은 보리밥집이 마주보고 있다.
치킨과 삼계탕, 닭볶음탕 같은 닭요리와 설렁탕, 곰탕 등을 좋아하는 아들은 냉면 아래에 쓰인 설렁탕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에이 보리밥이나 먹어요’라고 말한다.
아들과 함께 들어간 보리밥집은 한가했다.
잠시 후 상 위에는 1인분에 칠천 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청국장, 갈치속젓, 청각무침, 보쌈, 장아찌 등 열 대 여섯 가지 반찬이 가득 채워졌다.
아버지를 한껏 생각해서 보리밥을 택했던 아들은 푸짐한 음식인심에 ‘와, 진짜 많이 나오네요’라며 탄성을 질렀다.
아들과 푸짐한 저녁상을 물리고 배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왔다.
저녁 9시, 우리는 여관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찜질방을 견디기에는 아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멀지 않은 거리의 봉산동으로 갔다.
5만원씩 하는 항구 근처에서는 도저히 잠을 잘 형편이 안 되었다.
봉산동 입구의 여관에서 또 다시 높은 가격에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안쪽에서 나오던 중년의 부부가 자기들은 3만 5천원에 방을 잡았다며 자랑하였다.
주인에게 왜 가격이 다르냐고 따지려는데 중년부부가 갑자기 ‘어, 우리 여관이 아니잖아요’라며 깜짝 놀란다.
어이없어하며 깔깔대는 중년부부를 따라 문제의 3만 5천 원짜리 여관에 들어가서 3만원에 방을 얻었다.
불과 이틀째인데도 아들은 침대와 목욕탕, 컴퓨터와 텔레비전까지 갖춰진 여관방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개운한 기분에 드라마 ‘무사 백동수’를 시청한 아들은 금세 골아 떨어졌다.
아홉.
사흘째, 우리는 거문도와 백도 유람선을 타기로 하였다.
전날 알아 본 가격은 어른 29,000원, 아이들은 15,000원이었다.
유람선은 아침 7시 40분에 출항한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최소한 6시 30분에는 일어나야하였다.
환한 햇볕에 눈을 번쩍 떴더니 아침 6시 20분, 적당한 시간이다.
10분쯤 지나자 유람선회사에서 갈 것인지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출발하기 전 다시 한 번 가격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저쪽의 대답은 29,000원은 거문도에서 백도를 돌아오는 가격이고, 전체 가격은 10만원도 넘는다고 말했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아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빠, 잠이나 더 자요’라며 돌아눕는다.
다시 잠에 골아떨어진 아들 옆에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아침 9시가 넘어도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래, 이른 아침부터 무얼 하겠냐. 잠이나 실컷 자라’
9시 30분쯤 되어 대충 샤워하고 컵라면을 끊여 아침을 먹은 뒤 여관을 나섰다.
아들은 여관을 나서면서부터 하루나 이틀만 더 놀다가자고 조른다.
아직 볼 것도, 놀 것도 많다는 것이다.
졸라대는 아들을 데리고 돌산대교 건너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
거문도는 다녀오지 못해도 여수일대 유람선이라도 타고 회포를 풀자는 생각이었다.
유람선은 1시간짜리, 두 시간짜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시간 상 두 시간짜리 표를 구입했다.
아들은 낚시에 환장을 했는지 출항시간까지 30분쯤 남았다며 그 동안 낚시질을 하자고 제안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배에 오르는 뜬다리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런데 이놈의 고기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입질조차 하지 않는다.
아들은 크게 실망했는지 배에 오르고도 흥이 나지 않는 표정이다.
가뜩이나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데 자꾸만 사진을 찍어댔더니 나중에는 크게 화를 내며 찍은 사진을 지워버리려고 하였다.
아들의 태도에 나도 화가 났다.
아들을 앉혀 놓고 태도를 탓하며 ‘그런 태도를 보이면 여행을 끝내겠다’고 협박하며 나무랐더니 이번에는 말도 하지 않고 눈길마저도 피한다.
어색하고 뻑뻑한 분위기는 유람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함께 사진도 못 찍고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유람을 끝냈다.
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려면 아무래도 아들의 화를 풀어줘야 할 것이었다.
배에서 내리면서 아들에게 다시 낚시를 하자고 제안했다.
‘낚시’라는 말에 아들의 얼굴에서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돌산대교 아래에 적당한 터를 잡고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이번에도 입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낚시의 대가라는 분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8월은 본래 낚시가 잘 안 되니 9월 중순쯤에 다시 오라고 권한다.
그래도 30분쯤 더 밍기적거리며 앉아있었지만 입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씁쓸한 마음으로 돌산대교를 넘었다.
여수에는 해수탕도 있고, 쓸만한 식당이 제법 많다.
항구도시답게 비교적 싸고 푸짐한 회정식으로도 유명하고, 갓김치가 곁들어 나오는 바카지(돌게) 게장백반도 훌륭하다.
우리는 바카지 게장백반으로 유명한 두꺼비식당을 찾았다.
시간이 오후 2시 30분이 넘었는데도 두꺼비식당과 건너편 황소식당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섰다.
배는 고파오고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아서 ‘도대체 얼마나 잘 나오길래 이러는가’ 싶어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헌데, 역시나 명불허전,
식탁에는 열 서너 가지 반찬과 바카지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나왔고, 밥은 큰 대접에 퍼담아 나왔으며, 식사를 할 때에는 조기매운탕이 곁들여 나왔다.
그러고도 가격이 1인분에 7천 원.
놀라운 가격이었지만 아들과 나는 배고프기도 하고 지루해서 더 이상 줄을 설 수가 없었다.
나오는 것은 다 비슷하겠지 싶어 분위기가 매우 한가한 호랑할머니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겉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한가했다.
너무도 한가한 모습에 아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할머니 이렇게 한가하면 어떡해요’라며 위로를 해주었다.
음식은 노부부가 준비하고 가끔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상차림을 도와주러 오는 것 같았다.
남도의 음식은 어디에서 먹어도 평균 이상이다.
호랑할머니 식당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음식을 먹는 동안 아까 눈으로만 보았던 두꺼비식당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났더니 오후 3시 30분이 넘었다.
날씨마저 꾸물대고 을씨년스러워 해수욕장에 가기도, 마땅히 돌아다닐 곳도, 그렇다고 잡히지 않는 낚시를 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에이, 집에나 가자!
아들의 손을 잡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차표를 구입하려는 데 판매원은 5시 출발 기차는 논산까지밖에 표가 없는데다 자리도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아직 어린 아들과 떨어져서 갈 수도 없는 터라 다음 열차인 6시 40분 차표를 구입하였다.
차표를 구입하고 났더니 정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아들놈이 그냥 시원한 여객실 안에서 개기자고 말한다.
의외의 대답에 눈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봤더니 아들놈은 씩 웃을 뿐이었다.
무려 3시간을 기다렸지만 3일 동안 느리게 살아온 우리의 몸은 적응을 잘 해주었다.
기차에 오르자 아들은 금세 잠이 들었다.
배낭에서 큰 수건과 윈드자켓을 꺼내 아들과 내 몸을 감쌌다. (2011.8.9)
첫댓글 아빠와 아들이 함께한 배낭여행을 눈으로 본 듯합니다. 지금 군대가 있는 아들이 초등학교때 남편은 주말마다 산에 데려가려고 아들을 꼬드겼었죠. 차는 집에 두고 버스,기차를 타고 이 산 저 산 꽤 다녔는데.., 다녀오면 남편은 속 터져 하는 날도 있었고, 기특해 하는 날도 있었지요. 아빠들은 아들과의 여행을 꿈꾸고 어린 아들은 인심쓰듯 동참해 주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는 했었습니다. 그 후 둘만의 여행은 좀 뜸~하다, 작년에 아들이 군에 입대 하기 전에 둘이서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왔습니다. 아빠는 아들이 다 자라도 함께 여행하고 싶어하고 아들은 또 선심쓰며 함께 다녀오더군요. 저는 그냥 웃지요.
아마 아들이 나이 먹으면 아빠하고 똑같이 하려고 안달할 겁니다.
가슴에 많은 그리움을 품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