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 시가 있는 시론 30. 문재인 대통령 시대 고려 시대 호국 승군 김윤후에 대한 조명을
문재인 대통령 시대 고려 시대 호국 승군 김윤후 승군에 대하여 국가가 바르게 조명해야 한다. 김윤후 승군은 고려 고종 때 스님인데 실로 조계종 승려라고 말할 수 있다.
김윤후(金允侯)는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살았는데, 몽고군이 오자 김윤후는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난하였다가 몽고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와서 성을 공격하니 김윤후가 그를 사살하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였으나 김윤후는 다른 사람에게 공을 양보하면서 말하기를, “전시(戰時)를 맞았지만 나에게는 궁전(弓箭)이 없었으니 어찌 헛되이 무거운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고사하여 받지 않자 이에 섭랑장(攝郞將)으로 고쳤다. 후에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군이 쳐들어 와 충주성을 포위하기를 70여 일간 하니 군량을 저축한 것이 거의 바닥났다. 김윤후가 괴로워하는 군사들을 북돋으며 말하기를, “만약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려 하니 너희는 불신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고는 드디어 관노(官奴) 문서를 취해 불사르고 또 노획한 우마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 다가가니 몽고군은 조금씩 기세가 꺾였고 결국 남쪽을 도모할 수 없었다. 이 공으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 되었고, 그 나머지 군공이 있는 자들은 관노와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외관으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지만 당시 동북면은 이미 몽고에 함락되었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관직이 수사공 우복야(守司空 右僕射)에 이르러, 치사하였다
몽고군의 최고의 장수인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한 고종 19(1232) 9월에 김윤후 승장이 전투에 참여하여 그를 화살로서 절명시켰습니다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였다. 한 승려가 전쟁을 피하여 성 안에 있었는데, 살례탑을 쏘아 죽였다. 국가에서 그 전공(戰功)을 칭찬하여 상장군(上將軍)을 주었다. 승려가 전공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전투할 때에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공 없이 무거운 상을 받겠습니까.”라고 하고,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이에 섭랑장(攝郞將)을 제수하였다. 승려는 바로 김윤후(金允侯)이다.
고종 4년 1253 12월 에 충주가 몽고군에 포위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을 보면서 고려 승군의 역할이 대단했음을 말하고 있음이다.
충주(忠州)에서 몽고병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포위를 당한 것이 무릇 70여 일이 되었으며, 병량은 거의 바닥났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낭장(郞將) 김윤후(金允侯)가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말하기를, “만약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官爵)을 제수하겠다.”라고 하였다. 관노의 부적(簿籍)을 불태워 믿음을 보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눠주었다. 백성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니, 몽고군의 기세가 차츰 꺾여 마침내 다시 남쪽으로 가지 못하였다.
고려 고종 41(1254) 2월에 군공이 있는 이들에게 간직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역사성을 바르게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정준(鄭準)·최평(崔坪)·임경필(林景弼)을 아울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고, 충주산성별감 낭장(忠州山城別監 郞將) 김윤후(金允侯)를 감문위섭상장군(監門衛攝上將軍)으로 삼고, 그 나머지 군공이 있는 자 및 관노·백정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다.
김윤후 승군이여
김윤후 승군이여
일어나 하늘을 바로 보고
고려불교를 대신하여
역사를 노래하게 하네
내일에 오는 이들에게도
김윤후 승군을 잊지 말게 하려고
오늘 이같은 노래를 부른다
노래여 울려라
그날에 김윤후 승군의
위대한 호국정신을
우리불교의 역사를
회복하게 하려하네.
2019년 6월 25일
진관 시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