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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 서기 69년 12월21일 ~ 79년 6월 24일)
<로마로 가는 길>
- 서기 69년 7월에 동방 군단이 황제로 추대했을 때 부터 1년 2개월을 이집트에서 대기.
- 서기 70년 1월 1일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제일인자"로 승인된 지 열 달 후.
- 서기 70년 10월 베스파시아누스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에 상륙.
<제국의 재건>
-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집트에 있는 동안 무키아누스가 시행한 정책.
(1) 게르만계 갈리아인의 반란 진압.
반란을 일으킨 갈리아인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방침을 적용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로마 군단병 및 비텔리우스파 사람들에게도 같이 적용.
단 근위대는 15대대에서 9대대로 축소하면서 비텔리우스파를 물갈이 함.
내전의 피해 보상에서도 승자와 패자의 구별을 하지 않았다.
(2) 서기 70년 유피테르 신전 복구에 착수.
-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둘도 없는 협력자였다.
- 서기 71년 티투스 유대 전쟁을 끝내고 개선, 근위대장에 취임.
<인간 베스파시아누스>
-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펑화 포룸" 건설에 착수.
포룸의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음.
- 서민적인 풍모로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았다.
화려한 궁전을 짓지도 않았고 도무스 아우레아에는 발검음도 하지 않았다.
- 부인은 유대 전쟁 때 죽었으나 황후를 맞이하려하지 않음.
- 행동거지는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고 달변가도 아니었다.
단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유머 감각은 있었다.
<황제법>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를 자칭할 때부터 이미 두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생각과 황제권을 법제화하겠다는 생각을 명확히 밝혔다.
- 서기 69년 12월 말에 수도에 들어온 무키아누스가 당장 원로원을 소집하게 해 두 가지 사항 의결.
(1) 정국 안정을 위해 제위 세습을 인정.
(2) 황제권을 명문화.
권력: "로마군 최고 지휘권", "호민관 특권", "최고 재판권"
권위: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 "제일인자"
상티오(Sanctio): 면책 특권이 추가됨.
<후계자 문제>
- 제위계승자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내분의 싹을 잘라버리려 함.
-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었다.
<원로원 대책>
-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 회의에는 중요한 의제가 없어도 반드시 참석함.
- 원로원 의원을 국가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
- 티베리우스가 고안하여 활용한 위원회 방식을 되살림.
<인재 등용>
- 원로원 의원에 12명의 속주 출신을 등용.
- 원로원
파트레스: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등.
베스파시아누스는 속주 출신 가운데 다섯명을 "파트레스와 거의 대등한 지위로 끌어올림.
에스파냐 출신 M. 울피우스 크라야누스(트라야누스 황제의 아버지),
갈리아 출신 C.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브리타니아 재패),
갈리아 출신 L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수도청장관) 등
콘스크립티(신참자)
- 카이사르가 120년 전에 뿌린 씨를 베스파시아누스가 수확.
<"기사계급"과 평민에 대한 대책>
- 민주정을 고수한 그리스 도시 국가 아테네가 다른 폴리스 출신이나 노예에 대해서 폐쇄적.
- 공화정(과두정)과 제정(군주정)을 거쳤던 로마가 훨씬 개방적.
베스파시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개척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지반을 굳히고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손질을 해 견고해진 길을 그대로 걸어감.
- "빵과 서커스"
가난한 사람에게 굶어 주지 않을 정도의 빵을 보장한 제도와 마찬가지로 "서커스"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락 이상의 의미를갖고 있었다.
<유대의 공주>
- 티투스 유대 왕위에 복귀한 아그리파 1세의 딸 "베레니케 공주를 사랑하게 됨.
- 아내와 이혼을 한 티투스는 베레니케와 사라에 빠져 황궁에서 같이 지내게 됨.
- 그러나 경기장 귀빈석에 베레니케와 같이 나간 티투스에게 서민들이 반대 항의에 사랑을 포기함.
<콜로세움>
- 서기 71년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가 인공 호수를 만들려고 한 장소에 콜로세움 건설에 착수.
- 정식 명칭: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플라비우스의 원형극장)
- 네로의 거대한 입상(콜로수스) 바로 옆에 있다고 해서 콜로세움이라는 통칭으로 불리워짐.
- 오락장만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에 대한 찬성이나 비판을 받는 장소이기도 했다.
<재정 재건>
로마 제국의 세제
- 세입
(1) 세금 징수에 의한 수입
(a) 직접세...속주세, 상속세, 노예 해방세
(b) 간접세...관세, 매상세
(2) 국가 소유의 금,은,동 및 기타 광산에서 들어오는 수입
(3) 국유지를 임대하여 얻는 수입
(4) 기타 임시 세입
(a) 전쟁에서 얻는 전리품을 매각하여 얻는 수입.
(b) 국가 반역죄를 받은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얻는 수입.
- 세출
(1) 군사비
(2) 공공사업비
(3) 인건비
(4) 축제비
(5) 사회복지비...배급권과 축제 행사장 입장권
<빵과 서커스>
- 황제의 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보장과 식량보장이었다.
<교육과 의료>
- 고대 로마인들은 의료와 교육을 국가의 책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기원전 4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부터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시민권 부여.
- 대규모 국립벼원이나 공립 학교는 없지만 수규모 진료소나 사설 학당은 난립.
- 도서관이나 목욕탕이 발달.
<재원을 찾아서>
- 서기 73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재무관에 취임하여 국세조사 실시.
로마의 국세조사(켄서스)...제정이 시작되고 한 세기동안 세 번 실시.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재무관(켄소르)에 취임.
서기 47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재무관에 취임.
서기 73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가 함께 재무관에 취임.
- 세수입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길을 열다.
국유지 중 짜투리 농지(50헥타르 미만의 땅)에도 임차료 부과.
오줌세(Vectigal Urinai): 양털의 기름기 제거에 공중화장실 오줌 이용하는 섬유업자에게 부과.
"베스파시아노"라고 말하면 공중변소를 가리키는 게 보통.
<죽음>
- 서기 79년 6월 24일 베스파니아누스 향년 70세로 사망.
- 난생 처음 걸린 병으로 쓰러짐. 황제니까 일어서서 죽으려고 애쓰다 숨을 거둠.
제6부 티투스 황제
(재위: 서기 79년 6월 24일 `81년 9월 13일)
- 서기 79년 6월 24일 티투스 제위에 오르다.
- 두달 뒤인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
- 서기 80년 봄 로마 도심의 대화재
- 서기 81년 여름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염병 발생.
같은해 9월 13일 향년 40세에 숨을 거둠. 겨우 2년 남짓한 그의 치세는 대재난의 사후 처리로 밤낮으로 몰두하다가 끝나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폼페이>
- 서기 79년 10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 폼페이 등이 매몰되어 많은 인명 피해 발생.
900년 동안 한번도 분화하지 않은 사화산이었슴.
17년 전인 서기 62년 네로 황제 시절에 일어난 지진의 피해가 거의 복구된 상태.
8월 24일 오후 한 시에 분화가 시작 25일 아침에 끝남.
폼페이 시의 인구는 1뱢 5천명에서 2만명 사이
사망자 수는 2천명에서 5천명 사이에 달했다고 함.
<현장 편지>
- "박물지"의 저자 대 플리니우스 사망.
소 플리니우스(폴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투스)의 외삼촌인 플리니우스 세쿤투스 임.
-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대 플리니우스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기록을 하려 함.
친구였던 소 플리니우스에게 부탁을 하여 두 통의 답장을 받음.
- 이 편지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지 20년 뒤에 이루어진 "증언"이 됨.
<첫번째 편지>
미세노 해군기지에서 함대 지휘를 맡고 있던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 산 기슭 별장에 갇혀 있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구출에 나섰다가 같이 별장에 같히게 되어 유독 가스에 질식 사망에 이른 내용을 소 플리니우스가 듣고 본 대로 타키투스에게 알려준 편지.
<두번째 편지>
소 플리니우스가 미세노에서 어머님과 함께 대 플리니우스의 귀환을 기다리며 겪었던 일들을 타키투스에게 적어 보낸 편지.
<진두 지휘>
- 티투스가 화산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대책본부에서 진두 지휘.
서기 80년으로 해가 바뀌어도 티투스는 재해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 80년 4월 수도 로마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옴.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 회복 불가능 할 정도로 손상됨.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은 아우구스투스의 "옥타비아 회랑과 카이사르가 건설한 "사이프타 율리아"였다. 이들의 복구를 위해 티투스는 사재를 내 놓았고 로마의 부유층들도 많은 기부금을 냄.
- 서기 80년 콜로세움 와성됨
"도무스 아우레아 자리에 티투스 목욕탕(테르마이 티티)을 세움.
<죽음>
- 서기 81년에 전염병이 발생 가을로 접어 들어서야 모습을 감춤.
- 티투스는 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병으로 쓰러짐.
- 동생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고향 온천을 찾앆다가 거기에서 숨을 거둠.
- 치적
시민들의 반대로 유대 공주와의 사랑 포기, 재해 복구를위한 사재 출연, 공중목욕탕에 자주 나타남 등으로 서민들에게 이상적인 황제로 구현하고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들이 가장 두려워한 고발자의 탄핵에 귀를 기우리려고도 하지 않은 티투스에게 깊은 애정을 느낌.
에스파냐 등 제국 전역의 도로망을 정비.
이탈리아 내에서는 마르키아 수도를 수리하고 아우렐리아 가도 및 플라미니아 가도를 정비.
플라비아 가도(비아 플라비아)를 신규 건설.
유대인들과도 공생의 관계를 잘 유지함. 요세푸스와의 돈독한 우정 유지.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 서기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 서기 81년 9월 13일 티투스가 사망하자 9월 14일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름.
- 그후 15년 동안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을 비롯 많은 공공시설을 건설하고 사회 간접 자본을 정비.
<기록말살형>
- 로마 제국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기록 말살형)라는 황제 탄핵 제도가 있었다.
- 이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된 황제 중에는 네로가 있었다.
- 칼리굴라도 사실상 이 조치를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단죄 되지는 않았다.
-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사후에 이 형벌로 단죄받게 됨.
<인간 도미티아누스>
형 티투스는 언젠가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은 18세 때부터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언젠가는 황제가 된다는 확신과 함께 성장했다.
<로마 황제란>
- 로마 황제는 절대 복종 대상인 "임페라토르"인 동시에 절대 복종 대상이 아닌 "프린켑스"임.
"미묘한 허구"인 제정으로 바꾸기 위해 황제는 모순을 내포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 역사가 기본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가 왜 멸망했느냐고 묻기보다 로마는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맨 먼저 아내 도미티아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아우구스타 존칭을 받은 여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이자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그리고 도미티아 세 사람이었다.
리비아가 유뷰녀이면서 아우구스투스와 결혼 했던 것 처럼 도미티아도 도미타아누스가 젊었을 때 유부녀인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끈질기게 설득을 해 결혼에 이르게 된 것도 흡사했다.
<공공사업(1)>
(1) 도미티아누스 경기장(나보나 광장) 건설
(2) 콜로세움 완성시킴
(3) "네르바 포룸"
(4)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시작
해결해야 할 문제: 병사들에 대한 처우 문제와 게르만 족 문제.
<봉급 인상>
-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무려 110년 만에 병사 급료를 인상했다.
봉급은 인상하고 병사의 총수를 줄이는 요컨대 군대의 정예화를 염두에 둠.
- 인상분은 군단 소속 회계 감사관에게 맡겨 적립 한 뒤 만기제대시 퇴직금과 함께 지급.
만기가 되기 전에 병사하거나 전사할 경우 그 병사의 근친자에게 지급.
<"게르마니아 방벽">
- 서기 83년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에 착수.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선을 연결하여 두 강의 상류와 "슈바르츠발트"를 포함한 일대를 제국 영토 안에 넣어버라려고 함.
-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려면 라인 강 건너 게르만족 거주지까지 진격해야 함.
게르만족을 평화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전투에 호소해서 굴복시키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그래서 원로원은 필요도 없는데 쓸데없는 전쟁을 했다고 도미티아누스를 바난하게 됨.
<카티족>
- 카티족은 눈앞에서 시작된 "리메스" 건설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도미티아누스였지만 그래도 로마군은 카티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고 "게르마니쿠스"를 자칭하자 원로원 의원들은 냉소를 보냈ㄱ 일반 시민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임.
- 제1단계 네카이 강과 평행으로 "리메스"를 건설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되었음.
네카어 강을 품안에 끌어안는 제2단계 "리메스" 건설 공사도 완성된 모양이 눈에 보일 정도로 진척되어 있었다. 이것이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것은 오현제 시대에 접어든 뒤였다.
- 최 전방의 형편을 알지 못하는 원로원 의원들은 카티족에 대한 도미티아누스의 관용을 비난.
<내각>
- "제일인자 보좌위원회"(Concilium Princepium)를 개혁
구성원: 제일인자(황제), 집정관 2명, 법무관, 회계 감사관, 재무관, 안찰관 그리고 원로원 20명.
원로원 몫 20명을 줄이고 그 대신 기사계급 출신을 등용.
원로원의원에게는 황제의 권력 남용으로 보임.
- "관저"를 조직화
팔라티노 언덕의 절반을 차지하는 웅장한 궁전을 건설.
비서관 체제를 정비: 클라우디우스는 해방노예들을, 도미티아누스는 기사계급을 등용함.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선출한 위원들로 구성되는 5인 위원회를 적극 활용.
<사법>
- 엄정한 법 집행
남자 관계가 드러난 여 제사장을 법에 따라 생매장을 하고 상대 남자를 태형에 처함.
미성년자(17세 이하)의 매춘을 엄금하는 법률을 제정.
- 속주 통치 담당자들의 부정행위를 아주 싫어함.
"세계의 수도"(카푸트 문디) 로마에는 대규모 학교나 병원이 전혀 없기도 했지만 관청가가 없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이는 중앙집권과 병립된 지방 분권을 이유로 들 수 있다.
- 도미니아투스가 이 지방자치 문제에 열성적으로 대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무엇을 재원으로 삼았는지가 분명해짐.
소유하고 있는 토지나 건물의 임대료가 대부분을 차지.
공중 목욕탕과 상수도 수입.
- 현재는 지방자치단체의 임무로 여겨지고 있는 일의 대부분을 개인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었슴.
<공공사업(2)>
티볼리, 오스티아, 리미니, 마르살라 등의 수도 공사.
이집트 나일 강 유역의 관개 공사, 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복구
라티나 가도의 전면 보수공사
도미티아나 가도 건설
사르데냐 섬의 도로망 정비, 에스파냐 베티카 속주의 아우구스타 가도 전면 보수
아프리카 속주의 가도 보수, 소아시아 북부지방의 도로망 정비
모에시아 속주(오늘날의 세르비아)에 있는 두 개의 군단기지를 연결하는 가도 건설.
<"야간경기" 개최>
국가에 중요한 축제일에는 "야간 경기"를 개최하고 황제가 도시락을 제공.
<브리타니아>
- 브리타니아의 제패는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대인 서기 43년 부터 시작됨.
- 제11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 시대.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방은 완전히 점령되고 스코틀랜드제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속주의 수도도 콜체스터에서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으로 옮겨와 있었음.
- 84년 겨울 7년 동안 브리타니아 재패를 추진한 아그리콜라가 귀국 명령을 받음.
스코틀란드 재페가 잠시 중단됨.
이로 인해 도나우 강 방위선 확립에 부담이 한층 경감됨.
<다키아 전쟁>
- 85년 늦가을 다키아 족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영토에 침입.
- 반격에 나선 로마군이 참패하고 지휘관인 모에시아 총독 사비누스 전사.
- 86년 도미티아누스가 근위대장 푸스쿠스를 데리고 도나우 전선으로 출발
로마군은 첫 전투에서 승리하여 다키아족을 다시 강 북쪽으로 밀어냄.
도미티아누스 로마로 귀환.
- 로마군은 다키아로 진격하다 벌어진 두번째 전투에서 참패하고 푸스쿠스는 전사.
- 도미티아누스는 실전 경험이 있는 율리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임명 1년간 전투 준비를 함.
- 88년 로마군을 지휘한 율리아누스 도나우 강 북쪽에서 다키아족과 싸워 대승을 거둠.
<반란>
- 서기 87년 아시아 속주 총독 겔리아리스가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역모 혐의로 처형됨.
- 서기 89년 1월 12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킴.
도미티아누스는 에스파냐의 제7군단장 트라야누스에게 마인츠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근위병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막시무스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사투르니누스 군을 무찌름. 사투르니누스 자결.
-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임명.
<행운의 여신>
- 에스파냐 출신인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어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됨
- 반란으로 인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 지낸 9년간 쌓은 업적이 속주 출신인 약점을 보완.
<평화 협정>
- 시기 90년 무렵 도너우 강 중류의 게르만 세 부족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킴.
-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족과 평화협정을 체결.
포로 1인당 1년에2아시스를 지불하고 로마의 병사들을 돌려 받음.
돈을 주고 얻은 평화를 로마인들은 납득하기 어려워 함.
- 로마군 세 부족에 압승을 거둠.
<하나의 "계측기">
- 황제가 행한 일이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판정할 때
그 황제의 후임자들이 그의 정책이나 사업을 계승했느냐 아니냐가 판단의 계측기가 됨.
-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등 도미티아누스의 업적은 후임 황제들에 의해 계승됨.
그러나 다키아족과의 평화 협정은 그기 죽은지 5년도 지나기 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림.
<교육 개혁>
- 서기 95년 도미티아누스가 교육자 퀸탈리아누스에게 의뢰 "인스타투티오 오라토리아" 저술.
후세에 교육학 개론이 됨.
<공포 정치>
- 도미티아누스 치세 15년 동안 사형 8~9명, 추방 5~6명, 은둔 3~4명선이었슴.
주로 점쟁이와 그리스 철학자 집단이었음.
- 희생된 사람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도미티아누스가 고발자(델라토르)들을 허용하여 비난을 받음.
<"델라토르">
- 로마 법정
재판장: 원로원에서 선출된 법무관
검사(원고): 오라토르(Orator 변호사) 또는 델라토르(Delator 고발자)
변호사(피고): 오라토르
배심원: "켄툼비리"(Centumviri 백명의 남자들)
티투스는 "델라토르"의 고발에 귀를 귀울이는 것조차 거부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두번의 반란 사건 이후론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였다.
<종신 재무관>
- 재무관
국세조사가 주임무
국가 시책에 따른 공공사업을 발주하는 일.
국가의 풍기를 바로 잡는 권한.
사회 지도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된 원로원 의원의 의석을 박탈할 권한.
- 도미티아누스는
서기 83년 가을 재무관에 취임.
서기 85년 봄 종신 재무관에 취임.
- 팔라티노 언덕에 웅장한 궁전 신축
- 알바 산장과 치르체오 별장 신축
<암살>
- 황후 도미티아와 비극 배우 파리스 간에 염문이 남.
파리스는 살해되고 도미티아는 이혼을 당함.
- 티투스의 딸 율리아 플라비아가 남편을 여의고 궁전에서 살고 있었슴.
율리아가 사망...율리아가 임신을 하자 도미티아누스가 낙태를 요구. 율리아가 죽었다고 소문남.
- 도미티아누스는 조카 플라비아(소)와 클레멘스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황제 계승자로 지목함.
플라비아(소)는 도미티아누스의 누이 플라비아(대)의 딸로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의 아들인 클레멘스와 결혼.
- 클레멘스와 플라비아(소)가 기독교에 귀의함.
기독교도의 자식들을 로마의 황제로 옹립하기가 명분이 없어져 버림.
도미티아누스는 델라토르들을 동원 클레멘스를 사형에 처하고 플라비아(소)를 유배.
집안이 원한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임.
-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 향년 44세에 암살됨.
도미티아 황후의 시종인 해방 노예 스테파누스 일당에 의해 암살된 후 호위병들이 이들을 살해.
네르바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즉시 원로원 회의가 소집됨.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하고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함.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이은 두 번째 세습 앙조인 플리비우스 왕조는 27년만에 무너짐.
제8부 네르바 황제
(재위: 서기 96년 9월 19일 ~ 98년 1월 27일 )
- 네르바 이후 다섯 명의 황제를 후세는 "오현제"라고 부르게 됨(서시 96년부터 서기 180년)
<"구원 투수">
- 첫 원로원 회의에서 원로원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성립시킴.
- "델라토르"의 힘을 줄이는 법률도 성립
-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 짐.
추방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이들의 구기국은 허용되고 몰수 재산은 반환되었다.
- 서기 97년 10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발표 함.
<트라야누스의 등장>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이베리아 반도 남부 출신
베스파시아누스의 천거로 아버지가 원로원에 들어감.
- 서기 97년 당시 트라야누스의 지위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포함한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군 사령관.
- 98년도 집정관에 네르바 황제와 함께 출마하기로 함.
- 98년 1월 27일 네르바 향년 71세로 사망. 1년 4개월의 치세를 끝냄.
- 원로원이 바로 드라야누스를 황제로 승인하였으나 트라야누스는 99년 여름에야 로마로 들어옴.
<로마의 인사>
- 성자필쇠
- 로마의 지도자들은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하는데 성공.
<8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