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의제문>과 <원생몽유록>
중국 호남성의 수도 장사(長沙)에 있는 상수(湘水)라는 이름의 강(江)을 배경으로 항적(項籍)이 초나라(楚) 회왕(懐王) 미심(芈心)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거짓으로 의제(義帝)라고 높였다가 죽인 것을 빗대어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상왕으로 올렸다가 훗날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을 비난한 저술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祭文)>이다.
<원생몽유록>은 소설이기 때문에 문장이 매우 직설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조의제문>은 제문(祭文) 형식이어서 은유적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원생몽유록>은 사림들의 문집 속에 숨어 밖으로 들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지만 <조의제문>은 <성종실록>에 올라갈 사초(史草)에 수록됨으로 인하여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몰고 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원생몽유록>은 내용의 과격성으로 미루어 볼 때 만약 집권자에게 발각되었다면 엄청난 살육(殺戮)이 벌어졌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소장자들이 두려워하여 조심하고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거나 김종직은 참고문헌을 <자양(성리학)하는 늙은이가 지은 글>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자양하는 늙은이의 글>이 바로 <일편야사>인 것이다.
지금부터 그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세조가 쿠데타로 집권한 다음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또 훈구대신들이 권력과 재산을 모으자 성종 때에 이르러 고려 말(末) 정몽주(鄭夢周)의 학맥을 이어 온 성리학자들이 김종직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士林)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사림파는 삼사(三司)의 언론직과 사관직을 독차지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훈구대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며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였는데,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朋黨)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다.
또 김종직과 유자광(柳子光)은 일찍이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유자광이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자광이 죄(罪) 없는 남이(南怡)를 모함하여 죽이는 것을 보고 김종직은 유자광을 경멸하고 멀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유자광이 경상도 함양에 놀러 갔다가 흥(興)에 겨워서 시(詩)를 한 수(首) 지어서 현판을 만들어 걸어 두었는데,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여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저딴 것이 글이냐.”면서 당장 떼어 불태워 버리라했다고도 한다.
또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성종 때 춘추관 사관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1)에 기록한 일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겼고 이러한 여러 가지 배경으로 인하여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을 하게 되었다.
1498년(연산 4)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넣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난한 것이라고 문제 삼아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서 시신의 목을 베었으며, 많은 사림파 인물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고 또 파면하였다.
이상을 살펴보면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오사화의 원인이 <조의제문> 내용보다는 저자 김종직과 제자들로 구성된 사림파를 미워한 훈구파 사이의 정쟁에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즉 <조의제문>이 초나라(楚) 의제 미심(芈心)을 제사 지내는 글이 아니고, 당나라(唐)나 송나라(宋)의 누군가를 제사 지내는 글이었다고 하더라도 무오사화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의제문>은 <원생몽유록>처럼 노골적으로 세조를 비판하지 않고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절대왕정, 그것도 신하의 권한을 억압하고 임금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세조를 비판하는 글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부관참시로 검증된바 있지만 <조의제문>은 당시 상황에서는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매우 위험한 저술이 확실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임금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글이라면 당연히 정당해야할 것이고 또 전후좌우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서 논리적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글을 가지고 살아있는 권력을 비난한다면 반대 세력으로부터 “황당한 억지 주장으로 임금을 능멸하고 혹세무민했다.”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고, 정치적으로 역이용 당할 수 있고, 또 독자로부터도 “황당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조문 운운한다.”는 비웃음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의제문>은 다음 세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전제하여 저술되었다.
김종직은 역사책에는 없는 항적이 미심(芈心)을 죽여 강물에 버렸다는 가정을 전제로 <조의제문>을 저술하였다.
김종직 스스로 <조의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책을 상고해 보건대 강물에 던졌다는 기록은 없는데, 혹시 항적이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회왕을 때려 죽여 시체를 강물에다 던져버렸던 것은 아닐까?
김종직은 스스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이 아닌 사건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했을 때, 권력을 쥔 상대편에게 오히려 반격의 빌미가 되지 않겠는가?
역사책과는 다른 생소한 내용에 공감할 독자가 있겠는가?
억울하게 죽지도 않은 의제를 조문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고 비웃음을 사지는 않겠는가?
둘째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독자 중에는 김종직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훗날 김일손이 사초에 올리면서 “충분을 부쳤다(忠憤之語)”라고 주석을 달아 설명했기 때문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이 세조를 비난한 글인 줄을 알게 된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니 그 의미가 깊고 깊어서 김일손의 ‘충분을 부쳤다’라는 말이 없었다면 진실로 해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 찬집 간행하였다면 그 죄가 크오니 청컨대 국문하소서.”하고(弼商等啓臣等觀宗直弔義帝文其義深僻非馹孫以寓忠憤之語誠難曉然苟知其義而纂集刊行則其罪大矣請鞫之)
강구손은 아뢰기를 “처음 찬집자 국문을 청하자고 발의할 때에 신은 말하기를 ‘그 글 뜻이 진실로 해독하기 어려우니 편집자가 만약 그 뜻을 알았다면 진실로 죄가 있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하랴.’하였는데 유자광의 말이 ‘어찌 우물쭈물하느냐?’, ‘어찌 머뭇머뭇 하느냐?’하니 신이 실로 미안하옵니다. 김종직의 문집은 신의 집에도 역시 있사온데 신은 일찍이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듣자오니 조위가 편집하고 정석견이 간행했다 하옵는데 이 두 사람은 다 신과 서로 교분이 있는 처지라서 지금 신의 말은 이러하고 유자광의 말은 저러하니 유자광은 반드시 신이 조위 등을 비호하고자 하여 그런다고 의심할 것 이온즉 국문에 참예하기가 미안합니다. 피혐하게 하여 주소서.”(龜孫啓初議請鞫纂集者臣曰其文義誠難曉編集者若知其義則固有罪矣無奈不知乎子光云豈可依違豈可囁嚅臣實未安宗直文集臣家亦有之臣嘗觀覽而未解其意臣聞曺偉編集鄭錫堅刊行此二人皆臣相交者今臣言如此而子光之言如彼子光必疑臣欲庇偉等而然也參鞫未安請避)
<조의제문>은 그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는 참고문헌 <자양하는 늙은이의 글> 즉 <일편야사>를 미리 읽어서 배경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이야기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것인 줄을 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미심(芈心)의 정통성은 단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1448년(세종 30) 이미 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450년(문종 1) 문종이 등극하자마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세종과 문종이 신하들을 불러서 특별히 잘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남겼을 정도로 강력한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단종의 왕위를 위협하는 것은 문종의 어명을 거역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세종의 어명까지 거역하는 일인데, 조정에 서있는 신하들은 물론, 물러나 초야에 묻혀 있는 신하에 이르기까지 세종의 신하가 아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단종만큼 강력한 정통성을 갖추고 왕위에 오른 임금은 없었다.
미심(芈心)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시골뜨기인데 항량(項梁)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회왕(懐王)의 핏줄이라면서 데려다 왕으로 옹립한 허수아비 왕으로, 대개 권력자에 의해 옹립된 왕은 이용만 당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진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보편적인 일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 항량이 데려다가 왕으로 옹립하지 않았다면 미심은 영원히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양(羊)이나 키우고 살다가 이름도 없는 필부(匹夫)로서 죽었을 것이다.
세종의 고명까지 어겨가며 조카를 몰아 낸 수양대군은 삼촌이 옹립한 허수아비 왕을 몰아 낸 항적과 비교하기에는 결코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 김종직도 이와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임금을 찾아내어 다시 세워 백성의 소망을 이루었으니(求得王以從民望兮)
라고 적어, 그래도 미심이 정통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충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이야기로 완충(buffering) 해주는 매개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매개체가 없다면 <조의제문>은 자칫 처음부터 끝까지 김종직이 꾸며낸 황당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므로 자신이 창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 줄 물증이 있어야만 했고, 김종직은 그 물증으로서 <조의제문> 말미에 늙은 성리학자가 지은 글, 이른바 <자양의 노필>을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자양하는 늙은이의 글을 따라감이여
즉, 늙은 성리학자는 바로 최덕지고 <자양의 노필>은 바로 <일편야사>인 것이다.
원호가 지은 <원생몽유록>과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서로 간에 연결고리가 없고, <원생몽유록>이 없다 해서 <조의제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조의제문>이 없다 해서 <원생몽유록>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원생몽유록>은 반드시 <일편야사>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조의제문> 또한 반드시 <자양의 노필>, 즉 <일편야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서로 간에 연결이 필요 없는 두 문헌 <원생몽유록>과 <조의제문>이 항적의 쿠데타와 의제 추대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항적이 미심(芈心)을 죽여 강물에 던져버렸다는 허구가 추가된 <일편야사>를 동일한 배경을 가질 수 있고, 문헌을 읽는 사람들은 <일편야사>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여 그것이 수양대군이 단종을 상왕으로 올린 다음 영월로 유배하여 죽인 것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 각주 ----------------------
(1) 사초(史草) : 역사 편찬의 자료로서 사관(史官)이 매일 기록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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