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제목 : 희망을 품고 다시 살다.
“정신분열병 진단받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이유 모를 따돌림으로 인해 학교생활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나쁜 소문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자 따돌림을 넘어서 구타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남녀공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여학생들 앞에서 구타당해 남자로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이런 날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학교생활은 제게 지옥과 같은 나 날 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교실에 있었는데 창밖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이때 교정에서 농구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바로 앞에서 나는 것처럼 크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정신이 몽롱했고 “멀리서 이야기 하는게 어떻게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크게 들릴까?”,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하교 후에 집에서 샤워를 해야 하는데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방에서 왔다 갔다가 하는 등 해야 할 일의 순서가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제가 이상한 행동을 계속 하자보다 못한 고모가 저를 데리고 정신과 병원에 갔습니다. 정신과에서는 제가 정신분열병 초기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정신분열이야?” 의사가 오진을 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입원 치료를 권유하여 입원하여 약물 치료를 시작하였는데 약을 먹기 시작하자 몸이 뻣뻣이 굳는 부작용이 나타나 춘천에 있는 병원으로이동하여 입원하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치료를 위해 6개월 입원 치료를 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석을 계속하게 되면 출석 일수가 부족하여 유급을 당할 수 있다고 하여 보름만 입원 치료하고 퇴원했습니다. 퇴원 후 일주일 정도 집에서 안정을 취한 뒤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약물의 중요성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정신병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별세 그리고 재발”
고3 수능이 끝나고 결과를 기다릴 무렵이었습니다. 11월의 안개 자욱한 초겨울 환경미화원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께서 업무 중 교통사고로 별세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슬픔으로 병이 다시 재발하게 되었습니다. 귓가에서 계속 자동차 엔진 소리가 “윙윙”하고 들렸습니다. 저는 슬픔과 환청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서만 있게 되었습니다. 병이 심해지자, 집에 자주 찾아오시는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됐고, 어렵게 입원하였습니다. 이번 입원에서는 마취하고 전기치료를 12번 받았습니다. 치료가 진행되자 점점 증세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 정도 지나자, 퇴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정신분열병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았고 편견이 심해 약을 꾸준히 먹지 않았습니다.
“첫 취업 내 인생의 방향”
어머니께서 철원에서 춘천으로 이사하시면서 저도 춘천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추천으로 염색공장에 취업하게 됐습니다. 비장애인처럼 2교대로 근무했고, 한주는 낮에 한주는 밤에 일을 하며 일에 적응했습니다.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정도 되었을 때 차장님이 업무지시를 하러 오셨는데 차장님 목소리로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는 환청이 들렸고 저는 회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약물 관리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약을 끊고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약을 잘 먹지 않았고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만 증상이 나빠졌다고 생각하여 약을 먹었습니다.
“정신분열병에 대해 알다.”
첫 취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몇 년간 집에서만 생활했습니다. 25살쯤 갑자기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업하기 위해 교차로를 봤을 때 저와 같이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문구를 보고 ‘사회복귀시설’ 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사회복귀시설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와 약물에 대한 교육을 해줬고, 보호 작업과 취업 훈련을 통해 직업재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꾸준히 교육을 들으며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제 병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회복귀시설 팀장님의 권유로 장애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호 작업을 하던 사업체에 정식으로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취업해도 정신질환이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숨기고 취업했었는데 병에 대해 받아들이고 제 증상에 대해 알리고 취업하니 이전에 다니던 곳들보다는 마음 편히 업무 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복귀시설에서 교육받은 데로 약물복용을 잘하고 있었는데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을 잘 먹는다고 하여 모든 증상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불안, 초조한 증상이 계속되고 너무 추웠는데 옷을 따듯하게 입어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고 저는 너무 추워서 공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고향 선배의 은혜”
저는 취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춘천에서 신선식품 배송을 하는 고향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지금 백수인데 선배가 하는 일을 배울 겸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고 선배는 수락해 주셨습니다. 사업체는 춘천에 있었지만, 거래처는 가평, 인제, 춘천, 홍천 등 다양한 지역이 있었습니다. 선배의 트럭을 타고, 다니며 물건 정리, 거래처의 위치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도움으로 운전 면허도 취득하게 되었고 선배가 바쁜 날은 혼자 운전하고 배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선배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셨고, 제게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며 사회 적응에 힘써주셨습니다. 이 시기에 자신감을 많이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선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제 증상 때문에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제가 좀 이상해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증상이 나빠지면 일을 못 하겠다고 일을 나가지 않기 일쑤였고, 증상이 좋아지면 다시 나가 일하며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품고 다시 살다.”
취업에 대한 준비를 위해 신선식품 배달 일을 정리하고 우리내꿈터(전 사회복귀시설)에 다시 등록했습니다. 조현병과 약물 관리 교육, 그리고 취업 훈련을 통해 취업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애인 일자리 사업에 면접을 보고 합격하여 장애인 행정 도우미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 그리고 일 년 동안 근무를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퇴직금도 처음 받았습니다. 행정 도우미로 근무하며 내가 일한 가치에 준하는 월급을 받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이후에는 자활 사업에 참여하여 저소득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춘천시에서 중증장애인 취업에 대한 지원으로 사회적 기업이나 장애인 단체 등에서 일을 할 기회가 있어 환경에 대한 캠페인을 하기도 하고, 사물놀이도 배워 문화 예술 활동, 장애인식 개선 행사 등을 참여했습니다.
2024년에는 장애인일자리사업에 다시 도전하였고 현재 우리내꿈터에서 행정 도우미를 하고 있습니다. 계약직이라 오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이렇게 남아 일을 할 기회가 참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해로 41살입니다. 아직도 꿈꾸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 꾸준히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히 나아가면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저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장애가 있거나 지금 불행이 닥친 분들이 있다면 제 글을 보고 조금이라도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