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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내적치유
사회가 복잡해져가면서 사람들이 당하는 문제도 복잡하고 다양해져갑니다.
이런 문제들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그 해답을 전통이나 세상풍조나 자기의 이성적 판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항상 그래왔는데", "남들이 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런 말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사는 많은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는 열쇠드립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런 열쇠들을 빌려쓴다는 사실입니다.
성경말씀에 거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요한복음 8장 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해답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이 되는 성경을 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해답들이 금방 눈에 띄지 않으므로 다시 과거에 쓰던 전통의 등이나 세상풍조의 빛, 이성의 열쇠를 찾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두꺼운 책이나 커다란 건물 안에 갇혀버리고 말게 됩니다.
이 상황을 안따깝게 생각하며 이 글을 써보았습니다.
이 글은 우리들이 당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 글의 자체가 열쇠가 되거나 등과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찾는데 좋은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복잡한 사회에서 성경말씀의 등과 빛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1. 말씀묵상은 내적치유의 지름길
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녀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그녀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오랫동안 알콜과 마약에 빠져 있었으므로 머리까지 이상해진 갓이다.
그러니 대학은 고사하고 오히려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르렀.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으면 나으려니 하고 기대했으나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리하여 전기치료 등 모든 치료법을 다 써본 담당의사마저 그녀를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그 병원에 장기입원하는 환자가 된 것이다.
성경만 읽어주어도 치유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교회에서 성경을 옆에 낀 아주머니 한 분이 병원을 찾아왔다.
아주머니가 원장선생님께 환자들에게 전도할 것을 요청하자 원장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도 그 아주머니는 아무 환자라도 좋으니 성경을 읽기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아주머니의 간청에 난처해 하던 원장은 갑자기 장기입원하게된 소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아주머니와 그 소녀와의 만남은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그 아주머니는 매일같이 정신이상인 소녀를 방문하여 한 시간 동안 성경을 읽어주고 조용히 기도해주었다.
그러나 상태는 악화되었고 밥도 먹지 않은 채, 그 소녀는 짐승처럼 하루종일 앉아 있기만 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성경 읽어주는 일을 계속했다.
특히 "시편 139편 14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와 같은 시편 말씀들을 읽어주고는 잠깐 쉬었다가 또 읽어주곤 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달째가 되었을 때, 이 소녀의 표정에 변화가 왔다.
그리고 조금씩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또 한달이 지나자 말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여섯달째가 되어서는 드디어 정상적인 정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의사도 포기한 환자의 병이 성경말씀과 기도로 치유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소녀는 퇴원할 수 있었고 결국은 대학교까지 졸업했으며, 지금은 속사람이 강건한 생명력 있는 여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녀는 확실히 안다.
가족 중의 누구도 믿는 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접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 아주머니를 통하여 묵상함으로써 자신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말씀묵상은 단지 경건의 시간 또는 큐티를 정기적으로 갖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며 근본적인 자세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머리와 마음, 나의 의지를 주님게 열어드리는 것이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셔서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도록 맡기는 자세이다.
말씀묵상은 말씀 한 마디, 한 문장, 한 구절 앞에 앉아서 주님이 옛날에 소경 거지였던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주셨던 것처럼 (마가복음 10장 46-52절 46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절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절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오늘도 나의 눈을 열어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묵상하기를 시작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시편 119편 18절 내 눈을 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우리가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열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주신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배를 드리게 된다.
모든 묵상의 목표는 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묵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6-17절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가 묵상할 때에 말씀은 먼저 우리의 머리에 들어온다.
지적으로 이해한다.
그 다음에는 마음과 심령에 들어와 의지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생활화되어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씨앗처럼 우리 속사람 깊은 곳에 심어주신다.
(야고보서 1장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말씀의 싹이 터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에 거처를 두고 또한 말씀이 우리 속사람 안에 거처를 두도록 하면 예수님을 만난다.
긍휼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적용시키는 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 사귐을 갖는 것이다.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할 때 우리는 머리로써만이 아니라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주시며, 기쁨이 충만하고 영혼과 마음의 안식이 있는 생수의 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편 16편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편 16편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우리가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깊이 회개하며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온 마음을 덮어주신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편단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시키고 바라보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하나님이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실 것 이라고 한다.
(이사야 26장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상한 마음과 상처 입은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온전함을 입을 것이다.
현대인의 정신병을 예방한다
하버드 메디칼 스쿨의 교수이며 유명한 심장전문의 허버트 벤센 박사는 "묵상은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해소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라고 했다.
허버트 벤센 박사는 하버드에 있는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 더불어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환자들 중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한 문장이나 한 구절을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정서적, 육신적으로 분명한 치료효과를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허버트 벤센 박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에 이렇게 하루에 두번 묵상하라고 환자들에게 권한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수천 년 전에 다윗 왕이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한 성경말씀의 현대적 적용이 아니겠는가.
많은 의사들은 장시간 동안 정신병이나 정서적으로 아팠던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말씀묵상을 권한다.
어떤 분들은 악한 영들로 인한 억눌림으로부터 해방되어 온전히 회복되기 위한 목적으로도 말씀묵상을 권한다.
미시건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스티브 캡란 박사는 현대인들에게 정신병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을 지적, 정신적 피곤함 이라고 밝히면서 이로 인해 그들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묵상이야말로 이러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정신병의 뿌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예방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집중하여 모든 정신을 일치시키며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무엇을 묵상하며 사나요
어느 누구든지 항상 무엇인가를 묵상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나 느낌 또는 사람들에 대한 상상 등이 오간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묵상들이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이라는데 있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기는 커녕 오히려 병과 아픔과 상처를 가져오는 묵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헤비메탈 음악을 묵상하고, 어른들은 돈을 부정적한 수단으로라도 손에 넣을 수 없을까 묵상하고 또한 젊은이들은 이성과의 잘못된 육체적 쾌락을 묵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정욕대로 묵상하라고 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묵상의 대상을 바꾸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시편 19장 4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여호수아 1장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채우고 하나님의 진리를 보화처럼 마음속에 보듬을 때 내적인 치유는 일어난다.
그 치유는 사람을 통해서 오더라도 그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그 말씀의 능력을 알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치유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다.
열방 민족을 치유하는 자로 서라
날마다 두 가지의 할 일이 있다.
먼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른 것을 묵상하기 전에, 남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창조주 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때로 혼자 있다보면 우리는 여러가지 갈등을 느낀다.
우리 속에 병을 일으키는 정욕이나 분노, 상처들도 느끼게 되는데 이런 것 하나하나를 내버려야 한다.
말씀을 묵상할수록 우리에게 날마다 찾아오시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온전케 하시려는 분이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침묵이란 말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속사람을 치유하시고 강건케하시는 어떤 보배보다도 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적극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어 열방의 모든 민족들을 치유하는 자로 준비되어 갈 것이다.
2. 내적치유, 그 위치와 문제점
내적 치유란 말이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말은 아니며 외국에서는 무척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말이다.
아마 오순절 계통의 성령 운동에서 신유가 강조되어오면서 치유가 외적 신체질환만이 아니라 내면의 모든 문제도 치유할 수 있다는데서 시작된 것 같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깊이 체험하면 마음의 아픔과 상처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다.
분위기와 감정적 도취 속에 그 표면적 감정변화를 치유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크리스챤들과 내적치유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변화가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그성격이 더 굳어져버리는 부작용을 보게 되면서 은사 중심의 내적 치유는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했다.
내적 세계를 외적 신체와 동일한 치유의 대상으로 접근함으로 치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내면의 문제는 일회적인 신유나 성령의 강림으로 치유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령이나 신앙적인 치유를 도입하더라도 좀 더 내면 세계를 연구하는 전문성의 바탕 위에 시작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심리학과 성경의 차이
전통적으로 목회상담이란 분야가 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삶과 내면적인 문제에 대한 성경 및 신앙적 권고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는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고 신앙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 라는 내용을 개인적인 상담을 통해 나누는 그러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상담도 한계가 있었다.
인간의 심성과 삶을 성경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하고 찢긴 마음이 진정으로 위로 받고 치유 받는 데는 많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세속 학문으로 보아왔으며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고 그러한 문제를 인정하는 것을 거룩한 세계에 세속적인 것이 오염되는 차원으로 생각해왔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죄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내면의 문제 역시 치유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구원을 받으면 해결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죄의 문제를 구원 아닌 또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연구하는 것을 인정하기가 아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성경 안에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기도와 믿음으로 이를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죄와 구원, 성령의 은사, 성경공부와 기도 등의 신앙적 여러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많은 크리스챤들의 내면적 문제와 특히 가정 내의 갈등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전문적인 상담을 찾는 크리스챤들의 욕구가 아주 거세어졌으며 교회도 이러한 내면과 가정의 문제를 더 이상 과거의 신앙적 방법으로 수용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챤들이 내면의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보다 정신과 의사나 임상 심리학자를 더 많이 찾는다.
내면의 문제로 전문가를 찾는 것이 수치스럽기 보다는 보편적으로 인정되어온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스챤들은 내면의 문제에 신앙이라는 독특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담가를 만나서는 그들의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을 느끼고 크리스챤 전문 상담가를 많이 찾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정신 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상담에 종교성이 배제되어야하고 중용적인 입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설사 상담가가 개인의 신앙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상담에 이를 도입하는 것은 쉽게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가의 입장에서도 비록 종교로 인해 내면의 문제가 더 복잡해져 있다 할지라도 신앙인을 상담할 때 신앙을 배제하고 깊은 상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또 많은 크리스챤들이 기독교 전문 상담가를 찾고 있는 이 추세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기독교적 전문상담과 치유가 적극적으로 논의되기 사작하였다.
그래서 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러 미국에서는 기독교적 치유와 상담에 관한 책과 연구 결과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 심리와 신앙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였으나 상호 협력의 관계로 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성경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과 치유에 대한 많은 내용이 있으며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원리와 일치되는 내용도 많이 발견되고 연구되어 상담시 이러한 성경적인 원리를 잘 도입함으로 내면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문제와 한계가 있었다.
심리학과 성서의 근본적인 배경에서 오는 한계이다.
심리학은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이며, 성경은 신본주의이다.
서로 일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점도 많지만 만날수록 더 부딪히고 갈등하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분야에서 이러한 드러난 문제에 대한 비판하는 글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면에서는 신앙을 치료에 도입함으로 역시 신앙에 의한 방어를 인정하는 셈이 되고, 더 깊은 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면적인 문제를 모두 신앙적인 것으로 도피하고 숨기고 방어하는 경향이 있으며 일단 신앙적으로 방어할 때, 이는 다른 방법보다 더 완고하여 허물 방법이 없어 역시 신앙을 치료에서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인식인 것이다.
신앙적인 입장 역시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성경의 진리를 인본주의적인 해석으로 깍아내리는 위험에 대한 지적이다.
적극적 사고, 부활 신앙,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나를 먼저 사랑하라, 무거운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함 등은 우선 율법과 종교로부터 압박받는 신앙인에게 위로와 평안함을 주지만 과연 이러한 상담이 신앙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
사람의 평안과 치료를 위해 하나님을 편리한 대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인본주의에 대한 위험이 있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다 결코 지나치지 않는 진지한 질문과 경고들이다.
겉과 속이 다른 치유 현장
또 다른 기독교적 치유 형태가 있다.
인간의 행복과 치유를 강조하다보니, 복음의 진리와 내용보다 인간의 평안과 위로를 더 우선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기독교적 형태와 언어만 있다면 무엇을 통해서든 내 마음에 평안만 얻으면 되는가?
인간의 고통과 그 의미를 진정 복음 안에서 새기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포장은 기독교적으로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세속적이고 비복음적인 많은 치유의 형태가 범람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인드콘트롤(mild cont-rol), 요가, 단전호흡, 단,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 최면술, 이완요법(relaxation), 명상, 뉴에이지(new age), 인공지능(AI) 등의 치유 원리가 포장을 기독교로 바꾸어서 교묘한 방법으로 치유를 무조건 사모하는 기독교인들을 교묘하게 유혹하고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독교란 이름으로 성령이나 성경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치유로 무조건 수용하는 풍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를 내적 치유로 부를 수도 있다.
내적 치유는 어떠한 특별한 치료방법을 일컫는 용어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신앙 안에서 내면의 문제를 치유하는 경우를 대개 내적치유라고 하며,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내면을 기독교적으로 치유하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장점, 단점과 한계에 대해서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적 치유의 한 부류나 단면만을 보고 전체적인 내적 치유에 대해 너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되며 어떠한 배경에서 출발된 내적 치유인지를 잘 파악한 다음 이에 대해 접근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정신과 의사로 신앙과 치유를 분리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섣불리 결합할 수도 없는 이러한 모든 갈등을 많이 겪어왔었다.
그러던 중 성경 안에는 이러한 모든 갈등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내적치유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도 성경과 신앙 안에서 인간의 심리와 상처를 치료하려는 상담적 치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 머물렀고 심리학적인 면에서는 전문성을 충분히 갖지 못했었다.
그리고 인간을 신앙적인 차원에서만 보는 일방적인 접근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관심을 갖고 연구함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이론을 도입하지 않고도 충분히 인간의 심성에 대한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하였다.
성서는 심리학적 전문서적은 아니다.
마음이라는 말은 무수하게 나오지만 전문적인 용어로서보다는 보편적인 언어일 뿐이다.
지금까지 인성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가 있었지만 2분법, 3분법 등의 논란과 함께 더 깊은 전문적인 발전은 없었다.
성경 속에 숨겨진 내면세계의 원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인 그 영을 인간의 마음 가운데 주셨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그 영이 죽게 되고 이로써 그 마음이 병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다시 살리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영이 들어 있는 마음을 어찌 깊이 다루지 않으시겠는가?
마음이 닫히면 그 영을 구원할 수 없기에 마음을 열고 마음을 치유하시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사역에 아주 필수적이고 중요한 부분인데 성경에 어떻게 마음에 대한 깊은 얘기가 없겠는가?
성경전체가 구원을 위한 책이고 구원은 마음을 제외하고는 가능하지 않다면, 성경전체가 이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텐데, 우리가 눈이 가리워져 못 보고 있을 뿐이지 성경은 마음에 대해 너무도 자세히 무수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