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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욱리하 동아리 5/26 활동결과
일시 : 2012년 5월26일(토) 오전 9시~12시
장소 : 잠실한강공원~낙천정~낙천정지~뚝섬한강공원~자벌레(문화전망컴플렉스)~장미광장~뚝섬나루~살곶이다리~전관원터~청계천`중량천 합수부
참가자 : 김대원, 김어령, 김어진, 김연준, 송희섭, 조성문, 장정후, 위영범, 윤희수
(활동 참고자료)
● 잠실철교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송파구 신천동을 잇는 도로 겸 철도다리입니다. 1977년 착공하여 1979년 완공하였으며, 서울에서 도로와 철도가 같이 통행할 수 있도록 놓인 최초의 다리입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과 성내역을 잇고 있으며, 철도 양 옆으로 도로가 놓여 있어 차량이 통행할 수 있었으나, 신천동 방향 도로는 자전거도로로 변경되어 차량이 통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출입로가 올림픽대로에만 설치되어 있어 통행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잠실대교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과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잠실동을 잇는 한강의 다리입니다. 길이 1, 280미터, 너비 25미터, 6차선입니다. 공사비 20억 1300만 원이 들어갔으며 1970년 10월에 착공하였고, 1972년 7월에 준공하였습니다. 한강에 건설한 서울의 6번째 다리로, 완공 당시에는 마포대교에 이어 한국에서 2번째로 긴 다리였습니다.
이 길로 곧장 가면 아차산역과 송파 나들목, 성남시가 나옵니다. 이 교량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은, 의정부 · 춘천 방면과 도봉구 태릉 · 망우동 · 면목동 · 워커힐 방면 등 서울 동부 변두리 도로들을 서울 도심을 거치지 않고 곧장 경부고속도로와 경수 · 경인 · 김포 등 강남 간선도로로 연결하여 서울의 교통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 낙천정(樂天亭)
낙천정(樂天亭)은 조선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정자로, 광진구 자양동 446번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습니다. 태종은 그 18년(1418)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후 그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과 그에 딸린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1년(1419) 2월 낙성하여, 그 정자가 있던 자리입니다. 정자가 세워진 곳은 주위보다 약간 높은 곳이어서 대산(臺山, 해발 42.8m)으로 불리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아서 시리미산(甑山), 또는 발산(鉢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한강이 발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속에 처져 섬을 이루고 있는 잠실동․신천동과 그 건너 남한산성이 병풍 같이 벌려 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승지(勝地)였습니다. 낙천정이라는 정자이름은 세종 때 좌의정 박은(朴訔)이《주역(周易)》 계사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을 따서 '낙천(樂天)'이라 이름하여 바쳤습니다. 또한 의정부 제조 변계량(卞季良)에게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게 하고 한성부윤 권홍(權弘)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9월 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상왕이 노상왕으로 더불어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매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상왕이 쫓아갔다. 그리하여 대산 새 정자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돌아왔다. 대산은 살곶이 동쪽에 있는데 한수에 임하여 형상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으므로 증산이라고도 한다. 상왕이 지난겨울부터 명하여 그 아래에 대산과 낙천정 터에 궁궐을 건축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게 하였는데 이 때 와서 낙성되었다. 박은에게 명하여 이름을 지으라 하자, 은이 낙천으로 이름 짓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종은 이 곳 뿐만 아니라 서울 동쪽에 풍양궁과 서쪽에 연희궁을 지어 놓고 거처를 옮겼으나 주로 낙천정에 거처하며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였습니다. 세종 원년 3월부터 9월까지 7개월 동안 태종이 20여회나 낙천정에 거둥한 것을 알 수 있고, 그때마다 주연이 베풀어졌다. 또한 이 해 8월에는 일본 원정에서 돌아온 이종무 등 장군들을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으며, 또 12월에는 왕과 상왕이 이곳에서 유정현, 박은, 이원 등 대신들과 함께 경쾌한 병선인 삼판선을 제조, 사용할 것을 의논한 기사가 보이기도 합니다. 태종이 세종 4년에 승하하자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 성종 3년(1472)에는 국립 양잠소격인 동잠실(東蠶室)로 사용하게 되고, 인조 원년(1623)에는 채소밭으로 사용되었으며, 관운장의 영정(影幀)을 모셔 놓고 어사각이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옛 낙천정은 없어졌으며, 지금의 낙천정은 1987년 실시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 후 1991년에 한국전력공사와 3개의 주택조합이 지어 서울특별시에 기증한 것이다. 새로 지은 낙천정은 넓이 123.77m²의 16층의 계단 위에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주심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측 기둥열에 장초석을 받치고, 후면에는 높은 대를 쌓은 후 일반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원기둥,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계단 위아래에 해태 모양의 사자조각상이 사뿐히 얹혀 있습니다.
● 대마도정벌과 낙천정
한강에는 한양 10경 중 하나로 꼽히던 제천정을 비롯하여 망원정, 천일정, 희우정, 효사정, 압구정 등 수많은 정자가 세워졌으나 낙천정은 그 격이 달랐습니다. 여타의 정자들이 먹고 마시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다면 낙천정은 국정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곳이었습니다.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구체화시켰던 곳이 낙천정이고 정벌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삼판선의 시험운행과 수군들의 진법 훈련을 진두지휘했던 곳이 낙천정(樂天亭)입니다.
삼각산을 뒤로 하고 태종이 좌정했습니다. 옆자리에 세종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태백준령 깊은 골에서 발원한 한강물이 넘실댑니다. 도도하지만 낙천정 아래입니다. 강 건너 송파진까지 넓은 강폭에 짙푸른 한강물이 바다와도 같았습니다. 남한산과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시야가 확 트이고 시원합니다. 끝이 아스라한 잠실벌에 천군만마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입니다.
대마도에 출정했던 야전군 총사령관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우박·박성양·서성재·상양·이징석이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에게 승전을 보고했습니다.
“제장들의 승전으로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나라의 근심을 씻어주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병선을 더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다. 함길도와 평안도에 명하여 각각 병선을 더 만들게 하였는데 강원도에는 소나무가 많을 것이니 강원도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경상도로 보내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수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종은 환관 최한으로 하여금 장수들에게 술을 치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태종을 배행했던 종친과 대신들도 참례한 연회는 날이 저물어서 파했습니다.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위로한 태종은 선양정으로 삼도도통사 유정현을 초치하여 별도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이종무·최윤덕·이지실·이순몽·우박·박성양·박초·이천 등 여러 장수들도 참례했습니다. 4품 이상의 종사관과 병마사가 모두 참석했습니다.
연회는 흥겹게 베풀어졌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차례로 잔을 올리고 번갈아 춤을 추었습니다. 우의정 이원과 최윤덕이 각기 적군을 방어하는 계책을 토론했습니다. 영의정 유정현이 태종에게 술을 올리며 말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창업의 어려움과 수성(守成)의 쉽지 않음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할 말을 영상이 하는구려.”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종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수성이란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상은 잘 들어 두어라.”
이러한 태종의 소신은 유시(諭示)가 되어 세종14년, 함길도 북변에 김종서를 보내어 4군과 육진을 설치함으로서 현실화 되었습니다.
② 순명비 유강원 석물(純明妃 裕康園 石物)
2001년 7월 16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된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능동) 어린이대공원 내의 조선 제 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의 황후 순명효 황후의 능이었던 옛 유강원 터에 남아 있는 왕릉 석조각들입니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97년에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책봉되었으나 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904년에 33세로 죽자 지금의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자리인 유강원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에 지금의 유릉(裕陵)에 옮겨와 함께 모셔졌습니다. 그 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 황후(純貞孝皇后)가 사망하자 이 또한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유릉은 고종(高宗:재위 1863∼1907)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과 함께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순명효 황후의 능을 마련하였던 유강원 터에는 능 주위에 세웠던 20여 기의 석조물이 남아 있습니다. 석등을 비롯하여 문인석과 말, 양, 호랑이 등 동물을 조각한 것 등 매우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 말 왕실의 석조각으로 중요합니다.
① 친환경 수변공원이 조성된 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
옛날부터 풍광이 아름답고 강물이 잔잔하여 뚝섬유원지로 잘 알려진 곳이 한강시민 공원 뚝섬지구입니다. 뚝섬지구는 광진교부터 중랑천까지 한강의 북쪽 약 12km를 말하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 각종 레저시설이 모여 있는 뚝섬유원지 부근입니다. 이곳에 가려면 역시 지하철이 가장 편리합니다.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은 강북과 강남을 이어주는 청담대교와 연결되어 있어 지하가 아닌 지상에 만들어진 역입니다. 2번 출구쪽으로 나오면 바로 뚝섬지구의 한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지만 동네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뚝섬나들목쪽으로 나있는 지하도를 이용해도 됩니다. 지하도 벽면에 그려있는 사냥하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며 걷다보면 뚝섬지구와 자연히 연결되니까요.
뚝섬은 한강의 중상류에 위치하여 있어 깨끗한 물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낭만과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윈드서핑, 수상스키, 모터보트 등 수상스포츠의 천국이 됩니다. 봄과 가을에는 아름다운 계절을 알리는 꽃전시회와 한겨울의 눈썰매장과 스케이트장으로 사계절 내내 우리들은 한강과 더불어 신나는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한강변을 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한강에 떠 있는 수많은 오리배를 보면서 한번쯤은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한 마리의 오리가 되어 한강 위를 두발로 힘껏 저으면서 온몸으로 한강을 느껴보는 것도 좋습니다.
● 자벌레(전망문화컴플렉스)
은빛 우주선 같기도 하고 롤러코스터처럼 가늘고 긴 원통형의 건축물이 ‘자벌레’ 형태의 길이 240m, 면적 1,931㎡ 규모의 전망문화공간인 뚝섬 전망문화콤플렉스입니다.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로 몸은 가늘고 긴 원통형이며 중간 부분에는 발이 없고 앞쪽에 세 쌍, 뒤쪽에 한 쌍의 발이 있습니다. 이동할 때는 꼬리를 머리 쪽으로 오그려 붙이고 몸을 앞으로 펴면서 기어 다닙니다. 거대하고 위압적이며 복잡한 교량구조물에 대응하고 순화시킬 수 있는 조형물로 제작 컨셉을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이곳은 한강변에서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이용해서 들어갈 수도 있고 지하철을 타고 온 친구들은 뚝섬유원지역에서 전망대2층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어 쉽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자벌레 통로에 마련된 전망대와 데크전시장에서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식당과 까페 등에서 관람과 휴식을 함께 취할 수가 있습니다. 투명한 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재미있는 시설이 많이 보입니다. 음악분수, 수변광장, 장미정원, 자연학습장, 놀이터에서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고 있는것 같습니다.
● 장미광장
새롭게 단장된 6,040㎡규모의 장미원에는 각양각색의 장미로 뚝섬한강공원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미의 계절 5월이면 꼭 들러봐야 할 곳입니다. 장미의 종류에 따라 모양과 색깔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을 겁니다. 40여 종의 다양한 장미로 만든 장미꽃 터널과 고풍스러운 유럽식 분수가 여러분들을 신비한 비밀의 정원으로 안내합니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꼭 예쁘게 사진을 찍고 가시기 바랍니다.
● 청담대교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과 강남구 청담동 사이를 연결하는 폭 27m, 길이 1, 211m의 다리입니다. 1993년 12월에 착공하여 본교는 1999년 12월 23일에, 접속교는 2001년 1월에 완전 개통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복층 교량으로 아래층은 서울 지하철 7호선의 뚝섬유원지역과 청담역 사이를 잇는 철도교이고, 위층은 자동차전용 도로교이며, 동부간선도로의 일부분입니다.
② 뚝섬나루
7호선 뚝섬유원지역 3번 출구에서 나온 뒤 영동대교 쪽으로 직진하면 영동대교 밑에 뚝섬나루터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 뚝섬나루는 강남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입니다. 뚝섬은 조선시대 왕들이 사냥을 하거나 군사들의 무예를 검열하던 곳으로, 왕들이 행차할 때면 소나 꿩의 털로 장식한 '독'이라는 큰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독도’라고 부르다가 뚝섬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독백(禿白)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경상도․강원도의 세곡 운송을 위해 이 나루터에 선착장을 두고 한강을 오가는 세곡선(稅穀船)을 관리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강원도에서 오는 목재가 하역되는 곳으로 변하여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한 적도 있습니다. 불교 33대 사찰 중 하나인 봉은사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해 도성의 부녀자들이 자주 이용하던 나루였습니다. 나라에서 제공하는 배는 없었고, 개인으로 운행되는 배가 있어서 통행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곳에는 영동대교가 설치되어 있어서 강남과 강북을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 나루터 부근에는 유원지가 있었고, 한강종합개발 이후에 뚝섬 나루터와 잠실 나루터 사이에 선착장을 마련해서 한강 유람선을 승선할 수 있습니다.
●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숲 서울숲
회색빛 빌딩숲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도시인들에게 녹지공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은 소중한 생명의 공간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하이드파크공원과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센트럴파크는 미국을 대표하는 공원입니다. 이제 서울에도 서울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서울숲이 있습니다. 지하철 2호선 뚝섬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 시민들의 자연 휴식처인 서울 숲에 갈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뚝섬 경마장으로 더 잘 알려진 서울숲은 35만평의 크기로 서울에서 월드컵공원, 올림픽공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공원입니다. 근처에 한강과 중랑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과 생명이 함께 어우러진 서울숲은 문화예술공원, 생태숲, 자연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한강수변공원 등 크게 다섯 개의 특성있는 구역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울숲에 들어서면 이곳이 경마장이었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스타트(Start)라고 이름 지어진 조형물이 제일 먼저 반겨줍니다. 출발신호를 듣고 기수와 한 몸이 되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말들의 모습으로 새로운 도약의 뜻을 담고 있지요. 2005년에 새롭게 문을 연 서울 숲은 이제 해를 거듭할수록 울창한 숲으로 변모되어 더욱 근사한 공원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 수도박물관
뚝도 정수사업소 (수도박물관 및 완속여과지)는 1903년 12월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토 위크가 당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상수도 시설에 대한 특허를 받아 1906년 8월에 기공하여 1908년 8월에 준공하였습니다. 수도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면 커다랗고 빨간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조형물이 제일 먼저 눈에 띕니다. 지금은 집에서 수돗물만 틀면 뜨거운 물, 찬 물이 마음대로 나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물을 구하기 위해 우물을 파거나 강물을 길어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곳 뚝섬정수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종 때 건설되어 서울시민들에게 안전하고 깨끗한 식수를 제공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준공당시의 1일 정수량은 12,500톤으로서 서울시민 약 165,000명에게 급수하여 당시 급수율이 32%나 되었다고 합니다. 송수실은 312.4㎡의 규모로 벽돌조 기와지붕 조적식 건물로서 입구에 화강석 아치문틀을 두고 좌, 우 창틀은 반원 아치의 창틀을 쌓았으나 내부 난간동자는 도제로 되어 있는 근대식 건물입니다. 당시 송수실(현재: 수도박물관으로 개칭) 및 완속여과지는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울에 상수도가 들어온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에 수도박물관으로 개관되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멋진 무지개문이 있는 붉은 벽돌건물이 박물관 본관입니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수돗물을 공급하던 제1정수장의 송수실이 있던 곳입니다. 그밖에도 1908년부터 쓰던 완속 여과지를 복원하여 만든 현장학습장과 상수도 역사와 발전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별관과 환경전시관도 있습니다. 이곳에 꼭 들러 서울시민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아리수의 생산과정도 살펴보고 여러 체험활동도 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 뚝섬나루에 투신한 한 여인
봉은사에 한 스님(영기율사)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스님은 추사 김정희의 도움을 받아 불사를 판각하는 일을 하게 됐었는데 불사가 거의 완성될 무렵 성 안에 있던 어느 대갓집의 청상과부가 영기율사를 너무 사랑해서 나중엔 영기율사에게 동침을 요구했습니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협박하자 스님은 불사의 부정함을 꺼려 불사가 완성되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사가 끝나자 영기율사는 금계를 어길 수 없다면서 절을 떠나버렸고 이에 상심한 여인은 뚝섬나루에 투신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 꿈에 나타난 자라(뚝섬의 비밀)
고려 말과 조선초의 이름난 문신인 재상 권홍(權弘)은 문학에 뛰어나고 전서, 예서에 능하였습니다. 한 때 고려 공양왕 대에 조선의 개국 공신인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하였다가 조선이 건국된 후 곤장과 유배에 처해지기도 하였으나 정종 때에 관직에 다시 나아갔습니다. 이후 그의 딸이 태종의 빈으로 간택되면서 왕실의 친족으로서 예조판서 및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나 곧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들어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벼슬이 최고에 다다르고 나이도 많게 되자 매일 구릉(丘陵)이나 명소를 찾아 노니는 것을 일로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자라에 관련되어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옛날 자라를 즐겨 먹던 한 고을의 원님이 자라를 붙들어 맸더니 눈물을 흘리기에 풀어 보내자 고마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산봉우리의 이름을 자라봉이라고 짓는 것이나 '자라에게 놀란 놈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이러한 자라의 생김새와 특성을 바탕으로 생겼던 것입니다.
「대동야승」이라는 책에는 권홍과 자라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여름날 밤에 잠을 자던 권홍은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즉, 얼굴이 붉고 머리카락이 없는 늙은 노인이 엎드려 울며 간곡히 호소하길, "홍재상이 우리 종족을 모두 죽이려하니 바라옵건데 상공이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권홍은 꿈에서 말하길,
"내가 어떻게 해야 구하겠는가?"
라고 다시 물어보자 늙은이가 말하길,
"홍재상이 반드시 상공과 같이 가자고 할 터이니 공이 꼭 사양하면 홍공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다시 살려주시는 은혜이옵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얼마 후, 갑작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놀라 잠에서 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시중드는 노복에게 물어보니
"홍공이 오늘 살곶이에서 자라를 잡아 구워 먹으려는데 공에게 같이 가자고 왔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권홍은 생각하길 얼마 전 꿈속에 나타나 울며 호소하던 늙은이는 반드시 자라(鼈 자라 별)가 화하여 나타난 것이라 하고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하였다. 이에
"몸이 노곤하고 기력이 없으니 오늘은 힘들어서 못 가겠다."
라고 이르면서 사양하였는데 나중에 아는 사람에게 홍공이 과연 자라를 잡으러 갔는지를 물어보니 홍공도 그만 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권홍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구나 하며 더욱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 영동대교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광진구 자양동과 강남구 청담동을 잇는 총연장 1, 065m의 한강 다리입니다. 동2로에 속해 있고, 동2로의 종점인 남단 교차로에서 영동대로와 연결됩니다.
마포대교, 잠실대교에 이어 한강에 건설된 7번째 다리로, 1973년 11월 8일 개통되었으며 준공 당시 한창 개발 중이던 강남 지역을 바로 연결함으로써 강남 개발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영동(永東)이라는 명칭은 영등포의 동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1970년대 강남 개발 당시에 강남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기 전 붙여진 이름입니다. 강원도 영동 지방이나 충청북도 영동군, 그리고 영동고속도로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영동이라는 이름은 현재 강남으로 대체되었고, 영동대로나 영동고등학교 등 지역 시설물 일부에 남아 있습니다.
③ 살곶이 다리(箭串橋)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 다리 가운데 가장 긴 다리인 '살곶이다리'는 이 일대가 '살곶이벌'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데서 유래하였는데「한경식략」권량조(橋粱條)에 보면 그 공식 명칭은 제반교(濟盤橋)라 하였습니다.
살곶이벌은 국왕의 군사대열장과 매 사냥터로 이름이 났던 곳으로서 이 다리를 통해 태종과 순조가 모셔져 있는 '헌`인릉'과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정릉'에 갈 수 있어 국왕이 수시로 행차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 흥선대원군이 이 다리의 반을 헐어 경복궁을 짓는 돌로 사용하여 거의 100년 동안 다리가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에 수리 및 복원이 된 살곶이다리는 교폭 20척(6m), 길이 258척(78m)으로서 조선 세종 2년(1420년)에 착공하여 성종 14년(148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교각을 횡렬로 4열, 종 열로 22열을 배치하고 3장의 장대로 건너지른 위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좌우로 교안을 장대석으로 쌓았습니다. 기둥돌 아래는 네모난 주초가 있고 그것은 물밑 받침돌에 의하여 지탱되도록 하였으며 기둥은 유수의 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마름모꼴로 다듬었습니다.
'살곶이'란 다리명칭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어떤 얘기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살곶이다리가 있던 뚝섬일대는 군사훈련의 일종인 활쏘기 장소로 사용되어 화살곶이들(전관평(箭串坪))이라 불리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얘기로는 '살곶이’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 이곳에서 매 사냥을 하는 중 새를 향해 활을 쏘자 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에 떨어졌는데,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리고 주변 벌판(뚝섬일대)을 ‘살곶이벌(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고, 다리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뚝섬일대는 옛부터 살곶이벌 이외에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습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얘기는 조선 태조7년(1398)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비의 두 아들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새 왕이 된 태종에 대해 노여워한 태조는 함경도에 있는 별궁에 칩거하다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전관평(箭串坪)에 나와 장막을 설치하고 환영 준비를 하였습니다. 태종이 태조를 뵈려할 때 태조는 노기 띤 얼굴로 태종에게 활을 쏘았는데 태종은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이 일어난 전관평(箭串坪)을 가리켜 '화살이 꽂힌 자리'라는「살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강물과 중랑천이 어우러지는 합수(合水)지점에 살곶이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의 이름은 '물살이 세다'하여 물살의 '살'과 합수되는 지점의 흙이 쌓인 턱이 뾰족이 나왔으므로, 그 흙의 턱을 '곶(串)'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곶이'는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전관평(箭串坪)이라 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인 한양(漢陽)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었으며, 또한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송파로 건너가 충주로 나가는 통로였습니다. 주변의 기름진 벌판인 뚝섬(纛島)은 조선 초기부터 나라의 말을 기르는 목장과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이 있어 임금이 때때로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합니다.
또한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獻陵), 인릉(仁陵)으로 가는 길이고,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宣陵), 정릉(靖陵)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參拜)하는 길이며,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있어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순종황제(純宗皇帝)의 국장(國葬) 행렬이 금곡 유릉(裕陵)으로 향할 때에 이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습니다.
1913년 일본인들은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로 보수 하였으며, 1926년 을축년 대홍수때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습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 성수대교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습니다. 성수대교는 길이 1,161m. 너비 35m의 8차선이며,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준공하였습니다. 최초로 120m 장 경간으로 건설 되었으며, 그 구조상 게르버 트러스교로서 교하공간이 넓어 광활한 한강수면에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교량 양단에 완전한 입체교차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조물의 외관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진 최초의 교량이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의 붕괴 사고를 겪은 후, 1997년 4월에 다시 완공하여 재개통했습니다. 강변북로에서 강남의 어느 쪽으로 가기 위해선 성수대교 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1979년에 길이 1160m의 캔틸레버식 다리로 완성된 성수대교는 붕괴와 재시공이라는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1979년 10월 준공됨으로써 당시 포화상태에 있던 주위의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왕십리 일대의 서울 동부와 영동지구를 연결해 강남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을 촉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④ 마조단터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2번 출구로 나와서 본관 쪽으로 직진하면 백남학술정보관이라는 건물이 나오는데 그 건물의 화단에 마조단터를 알리는 비석이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의 중요한 교통수단 중의 하나는 바로 말이었다. 그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말을 위해 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왕이 말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마조단’ 입니다. 마조단은 말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선목, 마사, 마보)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기록에 보면 "선목단(先牧壇)ㆍ마사단(馬社壇)ㆍ마보단(馬步壇)은 동대문 밖에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목은 ‘맨 처음에 말을 기른자’라 하고, 마사는 '맨 처음에 말을 탄 자'라 합니다. 마보는 '말을 해치는 귀신'을 말하며 이를 향사하였는데, 중하(仲夏 음력 5월)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강일(剛日)에 선목에 제사를 지내고, 중추(仲秋)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강일에 마사에 제사를 지내고, 중동(仲冬)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강일에 마보에 제사를 설행하였었다고 합니다.
마조단은 성동구 행당동 살곶이다리 서쪽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그의 기원이 어느 때인지를 나타내는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고려시대부터 말의 돌림병을 예방하기위한 제사가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 마조단의 규모는 너비가 9보, 높이가 3자이며 사방에 출입하는 층계가 있었고, 길일(吉日)에 임금이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이 풍습이 답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풍습을 타파하는 정책에 따라 마조단의 제사도 순종 2년(1908)에 폐지되었습니다.
⑤ 전관원터
살곶이다리 근처에 으레 나그네들이 묵어가던 여관인 원이 있었습니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권3에 "箭串院 箭串橋西北(전관원 전관교서북)전관원이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살곶이다리 서북쪽 즉 지금의 성동교 서북쪽에 전관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 전관원은 동대문 밖 보제원, 무악재 넘어 홍제원, 남산 남쪽 기슭의 이태원과 함께 도성 교외 사대원의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원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때에는 주로 승려들이 원을 맡아 보며 해가 저물면 길손들을 묵어가게 하고 또 병이 나면 약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원은 역로에 부수되는 역과 같은 것이었으나, 역이 나라의 공문서, 체전 등과 관용물의 운수 및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박 등의 편리를 도모하던 관영기관이었던데 비해서 원은 관영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이용하던 민영 숙박소였습니다. 나라에서 토지만 제공하였을 뿐 원관이나 물자는 일체 지방유지가 맡아서 공급하며 운영하였습니다.『세종실록』 7년 11월조에 그 이후로 승려이건 보통 사람이건 마음씨 착한 사람을 골라서 원주(元主)로 삼고 그들에게는 부역이나 길 안내 또는 밤중에 횃불을 들게 하는 등의 일을 일체 시키지 말게 하고 오로지 원관을 잘 챙기고 운영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하여 원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운영방침을 결정한 기록이 보입니다. 이때 서울 도성 밖 성저 십리 안에 있는 보제원, 홍제원, 이태원, 전관원을 한성부로 하여금 직접 보살피고 수리하게 하였습니다. 전관원은 대재 나루를 건넜으나 도성 문을 닫는 인정종이 울리기 전에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나그네나 파루종(罷漏鐘) 따라 도성문이 열리는 시각보다 더 이른 새벽에 곧장 나루를 건너서 먼 시골까지 가려는 나그네들이 묵어가던 여관이었습니다.
⑥ 화양정터
화양정(華陽亭)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입니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자 때로는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는데, 세종 14년(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습니다. 또한 한강이 굽어보이고 10리나 되는 벌판에 작은 산들과 시내, 연못이 펼쳐졌던 이곳에 화양정을 지으며, 세종은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정사는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 될 것이냐?” 하면서 그 풍취에 따라 화양정이라 이름 붙였던 것입니다. 화양정이란 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 즉 ‘화산 양지바른 곳에 말을 돌린다’ 라는 뜻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도봉산․수락산․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곶이벌(箭串坪)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합니다.
화양정은 4각 정자(四角亭)로서 기둥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는 100여간 이상이어서 규모가 웅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종 때 학자이자 문신인 양성지는 이 정자에서 내려다 본 경치를 노래한 시를 남겼습니다.
화양정은 1911년 7월 21일 큰 벼락을 맞아 무너졌습니다. 영상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에 팔작지붕으로 된 화양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화양정의 또 다른 이름으로 회행정(回行亭)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갈 때 세조는 내시를 보내서 화양정까지 전송하게 하였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송씨부인과 결별할 때에 단종이 ‘화양정, 화양정’ 하고 되 뇌이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회행(回行) 길이 되었으면 하면서 귀양길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단종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정작 돌아오지 못한 단종과는 달리 조선 말 고종 19년(1882) 6월의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합니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습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습니다.
● 화양동 느티나무(華陽洞 느티나무)
예전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기능을 했던 것이 느티나무였습니다.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 앞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습니다.
화양동의 느티나무는 7그루가 한 곳에 모여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높이는 약 28m이며, 7그루의 총 둘레는 7.5m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세종(재위 1418~1450) 때 세워진 화양정이란 정자가 있던 자리로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 중에 피난길을 가다 잠시 쉬어간 곳이라고 합니다.
화양동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지내온 나무이며, 특히 커다란 느티나무는 전국적으로 많이 있으나 이곳처럼 7그루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광경은 보기 드물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 도정궁경원당(都正宮 慶原堂)
조선 철종대 왕족인 이하전의 살림집이었던 건물로 도정궁으로 유명합니다. 원래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사직동에서 1979년 건국대학교로 옮긴 것입니다.
사랑채 건물이긴 하지만 기능과 합리를 고려하여 안채, 사랑채 구실을 연결시키고 있으며 공간을 적절히 나누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모든 방의 앞 툇마루를 통하게 하여 합리적인 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호 장식들은 다소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조선 후기 한옥 발전의 바람직한 측면이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 건국대학교 구 서북학회회관(建國大學校 舊 西北學會會館)
서북학회의 회관의 건립 연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07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민족애국단체인 “서북학회회관”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조 건축물로 일제강점기에 오성학교 등 민족계 학교교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977년 도시계획으로 철거·해체되어 1985년 건국대학교 교정 안으로 이전·복원되었습니다.
시계탑이 있는 중앙 포치부분과 코너스톤, 개구부 아치의 화강석 등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로 국난시기의 민족지도자와 후학양성의 산실 등 근대적 사실(史實)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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