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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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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권문화 스크랩 몽화각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51 12.03.12 1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몽화각(夢花閣)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363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건 축 주 :  무안박씨 후손
중건시기 :  1991년
소 유 자 :  박정환(朴正煥)(관리자 : 화천리 이장)
문 화 재 :  봉화군 문화재자료 제155호, 1985-08-05 지정, 1동

건축 배경
몽화각은 무안박씨 영해파에 속하는 16대 박전의 배위인 신안주씨가 ‘맹모삼천지교’와 같은 자제 교육에 대한 열성을 가지고 결국 가문을 번성시켰음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건축 구성
건물은 2층 누대 위에 올라서 있고, 올라가는 통로는 오직 동남쪽 끝에서 오뚝하게 마련된 돌계단뿐이다. 이 돌계단은 넓은 자연석을 시멘트에 비벼 덧붙여 놓은 것으로, 남향의 앞면은 3단의 계단 모양이지만, 뒷면은 오뚝하게 직선 형태를 취하고 있어 섬돌로 이해될 수 있다.

몽화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다. 기둥은 마루 쪽이나 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다 원형이다. 대개 벽 속에 묻히는 것은 각형을 쓰곤 하는데, 여기에서는 다 같이 원형기둥을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형기둥은 상당히 크고 우람하다. 그러나 배흘림은 아니다. 기둥의 표면에는 나뭇결 문양이 잘 발달되어 있다. 건물은 기둥 밖으로 폭 좁은 쪽마루를 두르고 그 가장자리로 난간을 올려 세웠다. 계단을 통해 마루로 오르는 동남쪽 부분 조금만 난간 없이 트여 있을 뿐이다.

건물의 공간은 방 2, 마루 1로 나뉘어져 있다. 서쪽 영역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방이 있다. 동북쪽 영역에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방이 마련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마루이다. 마루는 ㄴ자 형상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마루 부분은 아래쪽이 비어 누각처럼 기둥에 의해 떠받혀져 있다. 방 부분은 아래쪽까지 벽면이 내려와 있다.

서쪽 큰방의 아궁이는 남쪽 부분에, 동쪽 작은 방의 아궁이는 동쪽에 마련되어 있다. 둘 다 굴뚝은 북쪽 방향으로 나 있다. 아궁이 부분과 굴뚝 부분은 회로 만들어져서 두툼하고 길쭉하게 건물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마치 무슨 도자기를 짓는 작은 가마와도 같은 모습이다. 방의 벽면은 다 미사 처리가 되어 있고, 기둥의 색감은 아주 연한 갈색이다. 건조되고 퇴색한 나무의 색감 같다. 기둥의 색감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이므로, 미사 처리된 흙벽과 거의 같은 느낌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색감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쪽 방의 앞쪽 벽은 2분으로 횡단되어 아래쪽에 2쪽의 방문을 달았다. 벽면을 위 아래로 횡단하는 것은 모든 벽면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모습이다. 서쪽 벽의 앞쪽 벽면에서 횡단면은 다른 벽면보다 20cm 쯤은 더 올라붙어 있고, 다른 벽면들에서 보이는 방문보다 조금은 더 큰 방문이 달려 있다. 그래도 이 방문은 통상의 경우보다 조금 작다. 마루 쪽을 제외한 다른 벽면들에는 1쪽 방문이 달려 있는데, 이것들은 통상의 경우에 비해서 아주 작다.

북쪽 양쪽 끝 칸 벽면은 방문 없이 통으로 흙벽이다. 이것들은 횡으로 2단 나눔을 하고, 또 각각의 벽면을 종으로 3단 나눔을 하였다. 다른 벽면들의 윗면도 다 종으로 3단 나뉨이 되어 있다. 지붕 아래쪽의 목구조는 상당히 두텁게 가설되어 있다. 지붕 아래에 원형 횡목을 두고, 그 가래 쪽에 두터운 각목을 덧대었다. 그 아래쪽은 약간의 틈을 두고 각 칸마다 주먹만한 틈목을 사이를 두고 두어 개씩 박아 넣었으며 그 아래로는 또 원형의 목재를 위 아래 쪽을 다듬어 덧대었다. 이러한 구조는 4방 모든 칸들이 다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방의 벽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틈목 사이를 흙으로 메우고 있다는 점뿐이다.

현판
몽화각(夢花閣 )
‘몽화각’은 정면 가운데 칸 처마 밑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몽화각시(夢花閣詩 )
‘몽화각시’는 정언을 지낸 김공이 쓴 시이다. 7언으로 되어 있고, 마루 영역에 걸려 있다.
몽화각기(夢花閣記)
‘몽화각기’는 진성 이세택(李世澤)이 지은 것이다. 마루 영역에 걸려 있다.
경재잠(敬齋箴)

송대 유학자 주희(朱熹)의 ‘경재잠’을 현판으로 만들어 마루에 걸어두었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박선장(朴善長),박경(朴璥)
- 제사 인물

박전(朴全),배위 신안주씨(配位 新安朱氏)
- 신안주씨 할머니의 후손


몽화각의 주인인 신안주씨 할머니는 무안박씨 영해파의 16대 박전(朴全, 1514~1558)의 배위이다. 박전은 자가 면부(勉夫), 호가 송파(松坡)이다. 1546년(명종 1) 문과 급제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호조 정랑에까지 이르렀다. 서울에서 타계하여 영해에 묻혔다.
?몽화각기?에는 송파 박전 가문이 영해 단구(丹丘)에 세거했다고 적혀 있다. 주씨 부인은 남편을 여의고 나서 아이를 데리고 화천리로 입향하였다. 아들 박선장(朴善長, 1555~1616)은 당시 나이 8세였다. 박선장은 자가 여인(汝仁), 호가 수서(水西)이다.
1605년(선조 38)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증직으로 도승지에 제수되었고, 고종 시대에는 이조 참판이 또 증직으로 내려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응소(鄭應素)가 “조선이 적을 끌어들여 반역하고자 한다.”고 명나라에 무고를 하자 박선장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서신을 보내 그 그릇됨을 밝힌 공을 세웠는데, 그 사실이 고종시대에 조정에 제출되어서 참판의 증직을 받은 것이다. 구만서원에 배향되었으며, 2권의 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영양남씨이다. 박선장은 영양남씨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박경(朴璥), 2남은 회이당(悔易堂), 3남은 과천(過川)이다.
장자인 박경은 자가 율보(栗甫), 호는 동천(東川)이다. 광해군 때 북인정권을 경계하는 일에 관여하였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강화한 소식을 듣고는 서향하여 통곡하고는 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았다. ?숭정의사록(崇禎義士錄)?과 ?존주록속편(尊周錄續編)?에 이름을 올렸다. 배위는 야성송씨와 여흥민씨이다.
박경은 무안박씨 세계상 18대이다. 현 종손은 32대인 박정환(朴正煥)이다. 31대인 박병직(朴秉稷)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32대인 박일환(朴日煥)·박동환(朴東煥)·박경환(朴京煥)이 있지만, 그들 3형제 역시 일본에 거주한다. 그러므로 화천리의 무안박씨 일문은 박정환을 양자로 들여서 후사를 잇게 하였다. 32대 박정환은 그렇게 식민지시대 우리 역사의 불행한 그림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31대 박병직의 세 아들 이름을 한자씩 따서 모으면 ‘일동경’이 된다. 일본 동경에서 낳았다는 의미일 것이고, 일본 동경에 산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 낙화암천 따라 펼쳐진 화천리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는 도촌마을 북쪽, 수식마을 남쪽, 해저마을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낙화암천은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와 북지리 등,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여러 골짜기에서 물을 모아 남쪽으로 실어 나른다. 이 물길은 영주시 감곡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몸을 틀어 봉화의 화천마을 영역으로 흘러든다.
화천리에서 낙화암천은 행계천과 만난다. 행계천은 봉화의 물야면 압동리와 수식리를 거쳐 흘러 내려와 화천리의 북쪽에서 낙화암천에 흡수된다. 화천리에서 행계천은 이름을 잃고, 낙화암천은 보다 덩치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 더 살이 붙은 낙화암천은 화천리를 종으로 가르며 흘러내려 도촌마을에 이르고, 도촌마을에서 내성천과 합류하는 것이다.
화천리는 낙화암천의 좌·우로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화천리의 중심은 꽃내이다. 골내·화천리·본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조선 중종시대에 무안박씨 박전의 부인 신안주씨가 현몽을 받고 찾아들어 자리를 잡았다. 몽화각은 신안주씨 할머니의 후손들이 신안주씨 할머니를 기려서 지은 집이다. 신안주씨 할머니는 이 마을에 찾아들어 꿈에서 들은 대로 붉은 꽃이 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마을 뒷산은 봄이 되면 붉은 꽃으로 뒤덮이고, 그 꽃잎이 떨어지면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온통 꽃잎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꽃내라는 마을 이름은 거기서 연유한 것이다.
꽃내의 서북쪽으로 나아가면 평탄한 산기슭이 펼쳐진다. 고갯마루 위에 넓은 들이 있다고 해서 이곳의 이름은 너은티·광현이라고 한다. 이 고갯마루는 영주·봉화·부석 등으로 나가는 3갈래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꽃내의 북쪽 사면으로는 뒷구렁마을이 있다. 후포라고도 한다. 꽃내의 남쪽에는 노인봉이 막아서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이 산의 북쪽 사면에는 구만서원이 북향하고 서 있다. 구만서원과 몽화각은 남북으로 서로 같은 높이로 좀 높은 지점에 서 있고, 그 사이에는 우묵한 분지 안에 꽃내마을이 펼쳐져 있다.
구만서원의 아래쪽으로는 역시 북향하고 산기슭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남산마을이다. 노인봉을 넘어서 남쪽으로는 망년고을이 도촌마을과 가까운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1560년경에 안동권씨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한다. 개척 당시 90세 넘어 장수한 노인이 15명이나 되었다고 해서 망년이라는 마을 이름을 얻었다. 이상의 마을들은 낙화암천의 서쪽 편에 위 아래로 벌려 서 있다. 꽃내에서 낙화암천을 넘어 동쪽으로 나가면 물건너마가 있다. 월천이라고도 한다. 주로 무안박씨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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