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55)
제 6권 꿈이여 세월이여
제 7장 날개를 펴는 초장왕 (2)
BC 606이면 초장왕(楚莊王)이 군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는 해다.
진(晉)나라 조천이 진영공을 죽인 다음 해에 해당한다.
그해 초장왕(楚莊王)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낙수 동안(東岸)에 위치한 육혼의 융족을 정벌했다.
육혼(陸渾)은 지금의 하남성 숭현 서북쪽에 있는 땅이며, 낙수(雒水)는 섬서성에서 발원하여 낙양 근처를 통과하여 흐르는 황하의 지류 중 하나다.
초장왕(楚莊王)이 이 일대에 사는 융족을 쳐 없앴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초나라 세력이 주왕실의 직할지와 경계를 이룰 정도까지 북진했다는 뜻인 것이다.
- 이제 중원이 내 손 안에 들어왔구나.
낙수(雒水)를 건너면 주왕실 땅이었다.
그 땅을 밟고 싶었다.
초장왕(楚莊王)은 호기롭게 외쳤다.
"강을 건너라!“
무력 침공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초나라의 위세를 주왕(周王)에게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낙수를 건넌 초군은 그 강변에 넓게 도열한 후 북을 울리며 기치창검을 휘날렸다.
이때는 주나라 연호로 주정왕(周定王) 원년이었다.
주정왕은 그동안의 골칫거리였던 육혼(陸渾)의 융족이 멸망하여 앓던 이를 빼냈을 때만큼 통쾌해하던 중,
초장왕이 친히 낙수를 건너 주나라 영토까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는 기절초풍을 했다.
"형만(荊蠻)이 낙수를 건넌 까닭이 무엇인가?“
주나라 중신들은 허둥지둥했다.
모두들 대답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왕손 만(滿)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는 필시 육혼(陸渾)의 융족을 토벌한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분명합니다.
왕께서는 사자를 뽑아 초장왕에게 보내어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십시오."
왕손 만(滿)은 지난날 진군(秦軍)이 낙양성을 통과할 때의 모습을 보고 진나라 패배를 예언했던 바로 그 소년이다.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주정왕(周定王)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대가 가서 초장왕을 달래고 오라.“
왕손 만(滿)을 사자로 삼아 초장왕에게 급파했다.
이리하여 왕손 만(滿)은 낙수가로 나가 초장왕과 담판을 짓게 되었는데,
이때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은 매우 유명하여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전해오고 있다.
먼저 왕손 만(滿)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 까닭이 무엇이오?“
초장왕이 대답했다.
"나는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자 왔소."
구정이란 하(夏)나라 임금인 우(禹)가 9개 주(州)의 동(銅)을 모아 만들었다는 9개의 솥이다.
본래 구정은 제례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까지 내려오는 동안 어느덧 천자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초장왕(楚莊王)이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은 것은 곧 천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내어달라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소년시절부터 총명한 기질이 다분했던 왕손 만(滿)은 초장왕의 이런 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진땀이 흘렀다.
자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주왕실의 존망이 달려있는 것이다.
이때의 왕손 만(滿)의 대답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덕행에 있을 뿐, 구정(九鼎)에 있지 않습니다.
구정의 크기와 무게는 덕(德)을 얼마나 높고 깊게 쌓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일 뿐, 구정 그 자체의 크기와 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왕께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왕손 만(滿)은 필사적으로 응수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초장왕(楚莊王)은 비웃음을 띠며 다시 말했다.
그대는 구정(九鼎)을 믿지 말라.
초(楚)나라는 부러진 창칼로도 구정을 만들기에 족하다.
초장왕(楚莊王)의 이 대답은 분명 협박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그대는 구정(九鼎)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달아 보물처럼 여기고 있지만, 그런 것은 다 헛것이다.
솥은 솥일 뿐, 중요한 것은 힘이다. 구정 따위가 어찌 천자의 상징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이번에는 왕손 만(滿)이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 초왕께선 잊으셨는지?
천자가 덕이 있으면 구정은 작을지라도 무겁기가 태산같으며, 덕이 없으면 가볍기가 티끌 같아 옮기기 쉽습니다.
구정(九鼎)이 하나라에서 은나라로 옮겨지게 된 것은 바로 걸왕이 포악했기 때문이요.
6백 년을 움직이지 않다가 주나라로 옮겨지게 된 것도 주왕(紂王)이 무도했기 때문입니다."
"주무왕께서 새 왕조를 창업하셨지만, 이는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명(天命)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강경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천명(天命),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구정(九鼎)의 대소경중을 물을 때가 아닙니다.
왕손 만(滿)의 이러한 대답에 초장왕(楚莊王)은 할말을 잃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족(漢族) 중심의 해석이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초장왕이 그냥 돌아간 것은 왕손 만(滿)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이미 천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했으면서도 덕을 운운하는 것이 가소로워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장왕(楚莊王)의 눈에 비친 주왕실은 이미 허깨비에 불과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또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초장왕으로서는 주나라 영토에서 철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초나라 도성인 영성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반란의 주모자는 영윤 투월초(鬪越椒).
초장왕(楚莊王)이 귀국을 결심한 후에 반란 소식이 날아든 것인지,
아니면 투월초의 반란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초나라 권력 서열 제2인자인 투월초(鬪越椒)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초장왕(楚莊王)은 영성을 향해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