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조정이 고구려 유민을 정착시킨 금마저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신도시를 개척하여 수도를 옮기려다가 중단한 곳으로, 백제인의 희망이 서린 땅이었다. 그런데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이주시켜 괴뢰국(傀儡國) 고구려를 세워 놓고 웅진도독부 백제군과 싸우도록 했다. 금마저 일원에는 백제 유민과 함께 각지에서 몰려든 고구려 유민이 뒤엉켜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비유하자면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모여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함으로 인해 예전부터 그곳에서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과 사이에 일어난 분쟁과 비슷한 상황이 금마저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11년(651)>에 “해동 세 나라는 나라가 세워진지 오래되었고 국토가 붙어있어서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근래에 사이가 벌어져 전쟁을 번갈아 일으켜 한 해도 편안한 해가 없다.”[1] 신라와 백제는 어느 한쪽이 뚜렷하게 강하거나 약하지 않고 비슷한 국력으로 수백 년을 다투어 왔기 때문에 서로 간에 맺혀 있는 원한이 매우 깊었다.
<신라본기 태종왕 7년(660) 7월 13일>에 “의자왕 아들 부여융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김법민(문무왕)이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2] 또 <8월 2일>에 “잔치를 크게 베풀어 장수와 병졸을 위로하였다. 임금과 소정방 및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은 마루 아래 앉도록 하고서는 가끔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 좌평 등 신하 중에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3] 전쟁에 이긴 신라로서는 지금까지 백제에 당한 원한을 푼 것이지만 당하는 백제로서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백제가 망한 후에도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책략으로 웅진도독부를 세워 신라와 맞서 싸우도록 화살받이로 내세웠다.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에 “듣건대 당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늙은이 젊은이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고 나서,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했다고 하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4]
신라에 원한이 맺혀 있는 백제 유민, 철천지원수 신라의 앞잡이가 되어 웅진도독부 독립군과 전쟁을 벌이고, 삶의 터전까지 빼앗아간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은 신라인보다 고구려 유민이 더 미운 상대일 수도 있었다. 원한 맺힌 두 나라 유민이 뒤엉켜서 살아가는 금마저는 통일신라 모든 영토 중에서 민심이 가장 험악하고 치안이 가장 불안한 지역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난민으로 혼란해진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본관제도(本貫制度)를 시행했는데, 신라에서 본관제도가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지역은 바로 금마저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최초 여부까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이른 시기에 금마저 일원에 본관제도가 시행되었을 수 있고, 그 중심에 당최(唐崔)가 있었으므로 당최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본관을 가졌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당최의 본관은 금마최씨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신문왕 5년(685) 봄>에는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았다.”[5] 진흥왕 16년(555) 경상도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가 폐지한 적이 있었다. 685년은 고구려 유민이 금마저에 정착한 670년에서 겨우 15년이 지난 시점이고, 대문(大文) 처형으로 인한 금마저 소요사태를 진압한 다음 해다. 신라가 본관제도를 실시한 것은 금마저 소요사태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금마최씨 본관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685년에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므로 당최의 처음 본관은 금마최씨가 아니라 완산최씨일 것이다.
* 각주 ------------------
[1] 海東三國開基日久並列疆界地實犬牙近代已來遂構嫌隙戰爭交起略無寧歲.
[2]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法敏跪隆於馬前唾面罵.
[3] 大置酒勞將士王與定方及諸將坐於堂上坐義慈及子隆於堂下或使義慈行酒百濟佐平等群臣莫不嗚咽流涕.
[4] 聞大唐與新羅約誓百濟無問老少一切殺之然後以國付新羅與其受死豈若戰亡.
[5] 復置完山州以龍元爲摠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