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는 나의 선영을 모시는 선산이 있다. 따라서 음력 시월이면 조상님들의 묘소에 찾아가 자손들이 시제를 올리는 것은 우리 고유의 풍습이다.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 나는 떡 한 조각을 얻어먹기 위해 시제에 따라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와 객지에서 생활을 하며 직장에 다니느라 한동안 갈 수 없었던 고향 시제에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해마다 가게 된다. 나이 많으신 어른들께서는 해마다 그 수가 줄어가고, 새로운 후세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모습이 세대교체를 절감하게 한다.
올해도 시제를 모시기 위해 고향에 간 것은 엊그제, 십일월과 십이월의 며칠 동안이었다. 무궁화호 열차가 쉬는 그곳 정거장에 내려 산골 버스를 타고 반시간여 들어가면 선산밑에는 다랑이 논의 들판이 있고, 아늑한 골짜기를 따라 옛 모습의 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시월상달 쓸쓸해만 가는 전통 시제 풍습_1
전에는 농사를 끝내고 각처에서 후손들이 찾아와 전날 밤부터 유숙하며 제물을 준비하느라 법석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 하나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묘를 관리하고 제각을 돌보며 종답의 농사를 짓던 관리인도 지금은 들어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신히 제각 옆 살림집에는 농사를 지으며 산소의 벌초만 해주기로 하고, 관리인이 들어와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겨울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그날 저녁 무렵에야 당도할 수 있었던 나는 제각의 방에 불이 환히 켜진 것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서울에서 형님 한분이 먼저 와 있었고, 나를 보자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인근에 사는 아주머니들께서 몇 분이 오셔서 제수 준비를 해놓고 다들 마을로 내려갔노라고 했다. 아주머니라고 해야 모두가 칠십이 훨씬 넘은 나이의 노인들이었지만, 아궁이에는 불도 지펴놓아 방은 따끈따끈 엉덩이를 붙일 수가 없도록 들끓고 있었다.
형님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설비회사 사장이던 그는 종중 일에 희사도 많이 하였다. 지금은 팔십 노인이 되어 병원과 약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듯 조상님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할 수가 있을까싶었다.
그 형수님은 어려서 전쟁 때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월남했다고 했다. 그러나 여자 동생 하나가 이북에 남았는데 형님과 함께 일하던 중국 사람의 도움으로 몇 번이나 중국에 가게 되었고, 북한에 살고 있는 그 처제를 불러내어 남한의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고, 앞서 간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영아래 산속의 밤은 먼 귀향처럼만 전해왔다.
아침에 날이 밝으니 비는 눈으로 바뀌었고, 영하의 날씨 속에 찾아오는 자손들의 발길도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러나 예년 같았으면 더 많이 모였겠지만 날씨 탓인지 이날 모인 사람은 겨우 삼십 여명뿐, 젊은이래야 오십 중반을 넘은 나이의 몇 명과 모두가 정년퇴직 이후의 사람들이었다.
시월상달 쓸쓸해만 가는 전통 시제 풍습_2
이날은 나의 14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 아들 내외의 묘사를 지낸다. 그러나 날씨가 궂은 관계로 산소에는 가지 않고 제실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의 십사대조라면 400여 년 전의 시대가 된다.
경남 산청이 고향이던 이 아무개 선비는 과거를 보기 위해 이곳 전라도 관기 골을 지나 서울로 갔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동네 방이라고 하는 사랑방이 있어 나그네들이 쉬어 갈 수가 있었고, 그때 하룻밤을 묵게 된 이 아무개 선비는 자고 나니 함께 묵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더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 종 하나가 와서 이르기를 "우리 샌님이 오시라는데요!" 하여 따라가 보니 아침 밤을 걸게 차려 내오며 대접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배불리 먹고 나니 또 종을 불러 서울까지 잘 모시라 하였고, 말까지 태워 보내며 만약 과거에 낙방을 하더라도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에 꼭 들르라며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선비는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여 과거를 보았고, 말번에 급제를 하였지만 나이 많은 낙방생에게 사연이 있어 임금이 알게 되어 양보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니 낙방생이 된 가운데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게 되었고, 장인에게 낙점을 받아 혼례를 치렀다고 하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경상도 선비는 전라도에 눌러앉아 아들이 없는 처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고, 죽고 난 뒤 애석하게 여긴 임금께서는 서울 우윤공이라는 지금의 부시장 벼슬을 아들에게 대신 내려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관기리에는 지방문화재인 관곡서원이 있다. 어찌 보면 경상도 청년이 전라도에 와서 살았던 것이며, 아들이 없는 딸만 있는 집안에 장가들어 많은 자손들을 번성케 한 것은 오늘을 내다본 것이 아니었을까. 조상의 그런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오늘날 후손들도 전국 한시백일장대회를 여는 것을 비롯하여 각종 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시월상달 쓸쓸해만 가는 전통 시제 풍습_3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가운데 그래도 조촐한 인원이지만 우리의 전통과 명맥을 이어 시제를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문명사회로 갈수록 자꾸만 우리의 옛 풍습이 퇴색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아쉽다. 옛날처럼 많은 일가들이 모여 왁자한 가운데 시제를 지내고, 또 서로가 화목을 나누며 조상숭모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