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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 1-14
요셉이
모세는 요셉의 주도하에 야곱의 장례가 치루어진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절은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입니다.
본 장에는 야곱의 임종 그 이후 사건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은 자연적이요 의식적인 두 가지 면에서 애도(哀悼) 되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부친 얼굴에 대고 눈물을 흘린 것은 순수하고 진실된 애정의 표시요, 애굽인들이 그를 위해 70일 동안 애도한 것은 영예를 위한 것이요, 관례적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진정한 슬픔보다는 장식과 의식적인 색채가 더 짙습니다.
죽은 자들을 이렇게 애도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최후 빚을 갚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여기서 상속자의 애도는 가면을 쓴 웃음이라는 격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때때로 진정한 슬픔이 엄습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애도를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 덜 울 사람들이 남들이 앞에 있기 때문에 더 눈물을 흘리며 효성이 지극한 괴로움을 일부러 발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위로한답시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더 많은 울음을 나게 하는 엉뚱한 결과가 나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의식은 살아있는 자들이 죄 때문에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하는 좋은 원칙에 입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많은 잘못이 덧붙은 나머지 희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 참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고 올바른 온건에 의해서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연스럽게 자극되지 않고 우리 마음 속에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순수한 슬픔은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지킬 경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요셉은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나타냈다해서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효성이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절제한 슬픔 때문에 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 결과를 낳지 않으려면 스스로 고삐를 쥐고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격한 슬픔은 항상 우리를 반역으로 끌어 들이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르치고 있듯이 우리가 슬픔을 완화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장래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절은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장례식에 더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것도 미신취급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굽 사회 장례는 유대인들에 비해 더 비용이 많이 들고 허례적이었습니다.
고대 역사가들도 이 점을 이 민족의 가장 두드러진 관습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성한 장례 의식이 장차 부활에 대한 거울 노릇을 하도록 하는 뜻에서 거룩한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져 오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이란 언제나 사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이런 저런 의식을 보여주는데 열심인 만큼 참 신앙에서 벗어난 자들이 신실한 자들에 비해서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이 상징의 실체와 올바른 용법은 신실한 자들에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우리와 비교할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셨던 그림자 같은 의식들이 지금에 와서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민족들과 비교할 경우에 유대인들이 취한 의식은 보다 더 온건하고 견딜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 의식이 왜 그처럼 많은 비용과 수고를 낳게 하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적 상징의 참 기원과 올바른 용법을 보여주는 순수한 가르침이 앞서지 않는 때에 외적인 상징에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우며 쓸데없는 일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을 묻는 것은 신앙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시신(屍身)에 향료를 바르는 것은 그것이 장차 불멸에 대한 공적인 상징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과거에는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마치 어차피 죽어가기 마련인 우리와 금수(禽獸)모두에게 공통되는 종국이라는 듯이 슬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이러한 유혹을 막아주는 충분한 버팀대입니다.
대낮 같은 광채를 아직 본 일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상징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행한 짓은 이 거룩한 조상들을 어리석게 흉내내며 그것을 우습게 여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향내를 맡은 가운데 죽음 뒤에도 무엇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경우 향유를 바르는 모든 의식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 자체가 신체의 영원한 파멸을 의미하는 자들이 이미 썩어버린 것을 그처럼 값비싸게 보관하려 하는 것은 성스럽고 유익한 의식에 대한 불신앙적인 모독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요셉이 엉터리없는 애굽인들을 모방한 것은 그들의 방법에 대한 판단이나 인준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혹 요셉이 애굽인들을 모방하는 실수를 범한 것은 자기 부친의 시신 상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흉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동일한 습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뒤엎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검소한 면을 개발해야 합니다.
3. 본문 3절은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대로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애도(哀悼)의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거나 우리가 따라야 마땅한 귀감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애도하는 날을 일정하게 법으로 정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제어하는 시간을 허용하려는 뜻에서지만 야심에 대한 면이 감안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주신 다른 규칙은 슬픔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셉은 필요 이상으로 애굽인들의 사악한 양식에 따라 애곡했는데 이것은 세상이란 관습적인 것은 전부 합법적인 것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우세한 것이 마치 거센 홍수 마냥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엄숙한 애도의 날로 정한 70일을 헤로도투스(Herodotus) 는 그의 두 번째 책에서 기름 바르는 날에 해당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오도루스(Diodorus) 는 몸을 단장하는 일이 30일에 끝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 두 저자는 기름 바르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이 기술이 더 발달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절차는 조상들에 의해서 전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4. 본문 4-5절은
"④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입니다.
여기에 요셉이 왕이 베푼 호의와 재가를 받아서 '2중의 굴'로 된 무덤으로 자기 부친 유해를 옮기는 문제가 간략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자신도 왕의 귀한 애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요셉은 조신(朝臣)들을 시켜서 중재자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애굽 민족이 이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인들은 그들이 특별히 자랑하는 조국이 신성하다는 사실이 무시되는 것을 무엇보다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 일에서 생기는 불쾌감을 남에게 전가하는 뜻에서 자신이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부친 장사 문제는 자기 선택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야곱이 맹세를 통해서 그것을 시행할 방법을 자기에게 부과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비겁한 공포에 억눌린 나머지 자기 신앙을 감히 담대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절차에서 나올 수 있는 불쾌감을 모두 사자(死者) 인 야곱에게 돌리는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다 더 단순하고 정직한 신앙고백이 요구되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그런 핑계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여호와께 우리로 하여금 참 신앙을 증거 하도록 지도하는 확고부동한 지조(志操)의 정신을 요청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의 거침없는 고백을 허용할 때는 우리 모두 거기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요셉은 바로 왕이 내리는 재가가 아니고서는 한 발자욱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마치 황금 족쇠와 같은 자신의 휘황찬란한 행운에 속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궁정에서 존경과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이런 식입니다. 따라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모두 자기 개인의 지휘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 나은 상책은 없습니다.
요셉은 또한 자기가 풍기는 것으로 염려한 불쾌감을 다른 상황을 들어 완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묻히고자 하는 소원은 최근에 자기 부친 마음에 떠올랐던 것이 아니라 그의 부친 야곱이 이미 오래 전에 자기 무덤을 파놓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결코 애굽 땅에 대한 혐오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5. 본문 6절은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입니다.
우리가 본대로 한편 요셉은 적절하게 중간 노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자기 부친 명령에 근거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는 행동은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이러한 온건한 행동 때문에 청탁을 더 쉽게 들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겁함이 여기서 인준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요합니다.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부르는 곳으로 즉각 따라 갈 경우에, 여호와께서는 원하는 문제를 상상외로 잘 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요셉의 자발적인 순종이 번창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바로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향력을 받아서 이처럼 요셉의 소원을 유쾌하게 들어주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맹목적인 불신자들 사회에서마저 맹세가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는 자기 입으로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맹세한 것을 자기 권위로 피괴하는 것을 불법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도 사라진 가운데 인간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이는 것을 다반사(茶般事)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같은 사람마저도 저주하는 따위의 방자한 행동은 결코 벌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6. 본문 7절-13은
"⑦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⑧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⑨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때가 심히 컸더라
⑩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일동안 애곡하였더니
⑪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 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⑫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발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입니다.
모세는 이 장례사건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애굽인들이 또 다시 애곡하는 문제를 결코 오늘날 우리들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다들 아는 대로 우리 육신은 결코 자기 제어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슬퍼하는 일과 기뻐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한계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 주민들이 경탄해마지 않은 난장판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7일을 계속해서 애도하는 날로 정하는데 있어서 당장 무슨 올바른 의도가 있었겠지만 이것도 역시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 장례가 이처럼 성대하게 치러지도록 하신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에 대한 기억을 후손에게 물려줄 웅대한 기념비를 이런 식으로 세워 올려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야곱이 만약에 일반적인 가족장에 따라서 매장되었더라면 야곱의 명성은 쉽게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인간들이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의 눈앞에는 항상 약속된 기업에 대한 소망을 고이 간직하는 이 귀한 본보기가 놓여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일어날 구출사건에 대한 깃발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보는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영광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애굽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의의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일종의 횃불을 들고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신령한 부르심의 길을 갈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민족들 역시 이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가운데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지식이 새롭게 성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7. 본문 14절은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입니다.
물론 요셉과 나머지 사람들은 애굽에 너무도 많은 담보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 곳으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들이 자기들 뜻대로 거처를 선택하도록 허용하신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여정을 인도하셨듯이 그들의 자손들 역시 마치 울타리로 두르듯 고센 땅 안에 감금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거룩한 조상들이 우리가 제15장 13절에서 보는 말씀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남겨두어서 그것을 마치 귀금속과 마찬가지로 신실하게 보관하도록 하셨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온 것은 당장 필요에 의해서만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목에 매어놓은 멍에를 자신들 손으로 벗어버리는 것이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고삐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잡아 당기시고 계십니다.
그 결과 그들이 자신의 지배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지를 받은 나머지 그들에 대한 포학한 압제를 받으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피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의 성격은 별로 무겁지 않은 짐일망정 그것에 대해서 반기를 들지 않을 정도로 온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그들이 침착하고 말없이 행동을 가다듬는 가운데 최악의 노예살이를 견디게 된 것은 특별한 신앙심이 먼저 그들을 사로잡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주도한 야곱의 장례에서도 실천적으로 얻는 교훈이 많습니다.
창 50: 15-17
요셉의 형제들이
본문은 모세가 요셉의 형들이 부친 별세로 인하여 요셉을 두려워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과 하나님의 뜻 전체를 모르게 되어 방황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내셔서 친히 만들어 가시고 다듬어 가시면서 쓰시는 사람도 모르게 되어 혼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1. 본문 15절은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이 부친 사망 후에 요셉이 자신들이 그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보복을 취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 성격에 따라서 요셉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들을 대하게 된 것을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심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자기 부친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지금까지 간신히 자기 앙갚음을 보류하면서 자제해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사악한 판단을 통해서 자기마음에 추호도 그런 증오심이나 악의가 없다는 점을 관대한 처우를 통해서 입증해 보여준 사람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이러한 억측은 요셉이 중심에 품은 중용을 통해서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셨던 하나님에게도 큰 명예 훼손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죄책을 안고 있는 자기 양심이란, 항상 맹목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이나 그분의 뜻에까지 올려다 보지 못할 경우에 자기 양심의 수준이란 항상 비합리적인 두려움 때문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낮에도 그저 넘어지기만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범한 죄악을 벌써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 양심 속에서 돋아난 가책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는 나머지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자신들을 향한 고문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사죄를 받게 된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기뻐할 자격이 없었던 것은 요셉의 마음은 이미 그들의 불신으로 큰 상처를 받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그처럼 수차에 걸쳐서 불쌍히 여겨준 사람을 아직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옳지 못한 짓입니다.
그들이 오래 전에 자신들이 품었다가 의논한 결과로 드러냈던 사악(邪惡)한 일에 대해서 뉘우쳤다는 점을 우리는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들이 아직 충분히 정결함을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이 그러한 고문과 불안으로 괴롭힘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것은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먼저 악한 양심은 그 자체가 고문자라는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을 다시 그들 자신들의 죄책으로 겸손하게 만들려는 뜻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아우의 판단에 혐오스런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그들이 무감각한 금수(禽獸)가 아닌 이상 하나님께서 개정하시는 천상(天上) 법정을 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잠28:1) 는 솔로몬 왕이 했던 말은 오늘날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죄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자백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벌 떠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발버둥치며 뻔뻔스럽게 오만한 짓을 일삼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들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도 도망가게 되는 것은(레26:36) 그들이 육신상으로 안전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안정된 마음보다 더 바람직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 귀한 복을 악인들에게서는 여지없이 박탈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정직성을 연마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자신들의 사악에 대해서 이미 회개한 족장들이 오랜 후에야 이처럼 심하게 깨우침을 받는 것을 보는 우리로서는 아무도 자기 기만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위선(僞善)이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하는 은밀한 채찍을 은밀하게 받지 않으려면 자신을 항상 하나님 면전에 세워두고 하나님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중적인 마음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행복한 평화가 우리
의 철두철미하고 정결하게 된 가슴 속에서 그 빛을 발하게 하려면 우리 각자는 꾸준히 자신을 반성해야겠습니다.
이러한 일을 소홀히 하는데 대한 정당한 보상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다가서지 않는 자들이 받는 것과 동일하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유한한 인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오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한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대책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인간 뿐 아니라 그림자를 보거나 바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게 되고 말 것입니다.
2. 본문 16절은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스스로 수치를 느낀 나머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더 믿을만한 평화의 사자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양심에서 스스로 비난을 받고있는 자들에게는 분별력과 이성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야곱이 이 점을 염려했더라면 야곱께서는 왜 자기 말을 그렇게 잘 듣는 자식과 그의 형제들을 화해시키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왜 그들 스스로 잘해 낼 수 있는 일에 중개자를 끌어들이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어린애처럼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우리들이 그들의 본을 귀감삼아 쓸데없는 고안을 이용해봤자 아무 유익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의 고약한 죄를 남에게 알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야곱의 자식들은 어디서 자신들의 그런 내용을 털어놓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러한 수치를 애굽인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껏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종들 가운데서 몇 명의 증인이 선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모세가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 올 때 자기 종들에 대한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몇 명의 종들이 그와 함께 왔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몇 가지 점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린 경우 진퇴양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본 신앙과 또 하나님이 자기 동료 중에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내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에 직접 나아가도 돌출적일 수밖에 없고 중재자를 내어서 대신 보내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3. 본문 17절 전반은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독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자신들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과가 가벼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사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극악성을 먼저 자기들 부친의 권위와 다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아우를 달래는데 있어서 꼬불꼬불한 길을 택하지 않고 직접 나왔더라면 오히려 그들이 했던 고백은 칭찬을 받을만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옳다는 가르침을 신앙의 원천에서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는 만큼 오늘날에도 교회 회원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경우에 우리가 그 죄를 용서하는데 있어서 너무 빳빳하거나 무디어서는 안되겠다는 일반적인 권고를 우리는 여기서 받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인정을 만인에게 베풀라는 일반적인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개재되는 면에 있어서 우리가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석보다 더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 한가지 명심할 점은 그 형제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이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이 특이한 신앙과 예배를 통해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고 있는 만큼 이것을 통해서 당연히 서로 밀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그들은 이 가족을 입양하신 하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 서 계셔서 화해를 낳는 역할을 다 하신 것으로 믿은 셈이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어느 정도의 깨달음이었을까 하는 것은 성령께서 조명하시고 역사 해 주신 만큼이었을 것인데 아무튼 그들이 전한 말의 형식과 내용에는 대단한 건실함이 엿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든 그들이 그 당시에 구했던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있느니 만큼 오늘날 우리도 이런 내용을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본문 17절 끝 부분은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입니다.
1) 모세의 말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이 그가 울 때 같이 있으면서 말을 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운 것은 그가 사자들을 통해서 형제들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들이 쓸데없는 고민과 수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서 그들에게 동정심을 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불러 놓고 요셉은 그 형제들의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면제시켜 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화를 멈춰달라는 그들의 애원을 들을 때 요셉은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들의 슬픔과 불안을 두고 이처럼 한 마음으로 우는 요셉의 모습에서 우리는 훌륭한 동정의 귀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성급한 분노자의 고집이나 증오심을 끝까지 품는 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도 우리는 주님께 온유한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온유한 마음의 능력은 과거 요셉시대 못지 않게 오늘날 그리스도의 지체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가지신 선하신 뜻과 그 분의 선하신 뜻대로 역사 하신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시고 부르시며, 교회의 초석을 놓으시듯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택하여 부르시고 12족장들로서 옛 교회의 초석을 다지시는가? 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한없으신 의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넓으신 은혜와 오래 참으심으로 자기 택하여 부르신 백성들을 자기 교회로 관리하시는 의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어떻게 훈련시키시고 연단하셔서 쓰시는가도 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하염없는 연약성과 부실한 내부 구조도 보입니다.
안될 것 같으면서도 되는 교회의 모습, 되는 것 같으나 역시 그 연약성을 안고 있는 교회의 모습,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의지로만 되어져 가는 지상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감사하게 하십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창조주시요, 구속주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로써 품어주시는 은혜를 감지한다면 본문 말씀이 여러분에게 잘 보여진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창 50: 18-21
그 형들이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적절하게 위로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8-19절은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입니다.
1) 이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친히 엎드리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말은 지극히 자신들을 낮춘 태도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같은 인간적인 기회를 역이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찾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2) 혹자는 요셉이 이 말로써 자기에게 표한 경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마땅한 경의를 자기에게 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 개연성이 없는 것은 요셉은 가끔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형제들 역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유한한 인간에게 양도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부터 꺼려하고 있다는 점을 요셉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셉이 처벌을 부과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식의 해설 역시 반대합니다.
요셉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복자가 되어 주실 것을 바라는 뜻에서 자기가 받은 상처에 보복을 가하는 것을 삼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여기에 대해서 제 삼의 의미, 곧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의미를 덧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과 가까운 것으로 보는 만큼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해설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5) 우리는 오히려 네 번째 의미를 좋아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탁하트) 라는 단어에는 '....... 대신에' (in stead of) 의 의미도 있지만, '종속'(subjection)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문사만 아니라면 이 문장은 얼마든지 우리는 하나님 '아래' 있는 만큼이라는 식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 의미는 '두려워들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 밑에 있는 몸입니다' 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인 만큼 길을 인도하는 것이 자기 임무가 아니라 따라가는 것이 자기 임무라는 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의문사 ' ' 가 이 단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유한한 인간인 그가 감히 하나님의 경륜을 뒤바꾸는 일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라는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에 있어서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은 신령한 섭리의 의도를 곰곰이 살피는 가운데 그들이 자기를 너무 추켜 세우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자기 감정에 스스로 재갈을 물리고 있습니다.
요셉은 사실 온유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달래는데 있어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배 밑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훌륭한 방법이 따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복수심이 발동할 경우 우리는 우리 모든 감정을 동일한 권위에 굴복시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뜻에서 자기 형제들이 평안하게 지낼 것을 바라고 있는 만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지도자로 모신 가운데 그분의 뜻에 복종할 뿐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그분에게 순종하는 온건한 사람을 우리 지도자들로 삼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무력하게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다닐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분노를 꺾어 주시지 않는 한 그에게로부터 수천 번 죽음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처지가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권리를 쥐고 계시는가 하는 점을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 분노를 달래는 유일한 처방이듯이 우리 마음이 이러한 생각으로 가득 찰 때 제 아무리 불같은 격정이라도 충분히 누그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본문 20절 첫부분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입니다.
본 절에서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섭리를 십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요셉으로서는 용서를 베푸는 일과 그들에게 혜택을 끼치는 것을 일종의 강제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의 언어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요셉은 형제들의 슬픔을 달래고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온갖 수단을 다 기울여 그들의 죄악을 덮어 주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좀 더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그들의 잘못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요셉이 그 형제들의 표리부동을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앞에서와 동일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경륜에 의해서 애굽에 이끌려 오게 된 것은 자기 형제들의 생명을 보전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지 않으려면 이 목적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형님들의 생명을 저에게 맡기셨는데 만약에 제가 제 손에 맡겨진 은혜를 충실하게 나눠주지 못한다면 저는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사람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라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동시에 요셉은 하나님의 집행에는 인간의 어떠한 악(惡)도 달라붙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만사가 그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의 악한 꾀와 하나님의 뛰어난 공의를 잘 구별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팔아 넘긴 잔인성과 배신은 정말 가증스러운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으로서는 결코 하늘의 경륜과 무관하게 팔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눈감아 주었다가 나중에 가서 이 사건을 이용하려는 뜻에서 잠자코 계셨거나 그들의 악의의 고삐를 풀어주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서 그가 확고하게 의도한 행동의 순서를 정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악한 동의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서 팔렸다는 점을 하나의 기정 사실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이 온당한 말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탐욕과 관계되는 것을 전부 인정하셨다는 의미에서의 공동작업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아우를 죽이려고 음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서부터 요셉과 이 형제들의 구출을 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것도 그분의 뜻과 무관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모두 인정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계획을 다스리며 그들의 뜻을 휘어잡고 그들의 노력을 원하는 대로 돌려놓으며 만사를 통제하시고 제어(統御) 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시도할 경우 그분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활기를 넣어주시며 감동시키기 때문에 그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그분에게서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단과 불경건한 자들이 횡포를 부릴 경우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악한 행동이 장본인들에게 돌아가고 그것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전가되도록 하십니다.
신실한 자들이 성령의 충동에 이끌려 올바른 행동을 하는 방법으로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각자의 악의 주모자요 사단을 그들의 지도자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 죄악의 흑암 속에서도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결코 그의 행동에 대한 공정한 원인이 없지 않듯이 인간들은 각자 사악한 뜻에 따라서 죄책의 쇠고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악한 기대와 부당한 욕망을 죄절시켜 버리신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적잖은 위로를 받습니다.
무례한 자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멋대로 바삐 쏘다니며 실컷 성질을 부리며 하늘과 땅을 뒤범벅으로 만들게 내버려 둡시다. 그들이 그들의 광분을 통해서 얻는 것은 전무할 것입니다.
그들의 격렬한 행동은 무기력한 것으로 입증될 뿐 아니라 그들의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이요, 그 결과 그들은 그들로서는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지만 우리 구원을 꾀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무슨 독을 뿜어내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선택자들을 위한 약(藥)으로 뒤바꿔놓고 마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기대에 반해서 그가 죽음으로 가득 찼을 뿐이었던 시초의 여러 사건들로부터 즐거운 결말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버림받은 자들의 음식을 독(毒)으로 뒤바꾸고 그들의 빛을 흑암으로 뒤바꾸며 그들의 식탁을 덫으로 뒤바꾸는 한마디로 그들의 생명을 사망으로 뒤바꾸는 하나님의 처사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공의와 정직에 입각한 것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으로서는 이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인 주제에 교만하게 그들을 주물러 만드신 분을 상대로 으시대기 보다는 겸손하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신비를 칭송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3. 본문 20절 끝 부분은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입니다.
요셉은 자기 직무가 하나님 섭리의 의도에 종속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항상 이 온건을 개발하는 가운데 각자가 신앙의 눈을 통해서 저 높은 곳에서 세상 통치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각자 직분의 한계를 지키며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의 권고를 받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살피고 각자 임무를 스스로 수행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이유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광신자들처럼 혼잡하게 날뛰는 가운데 이리 저리 배회하는 일이 없도록 삼가야겠습니다.
자기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도록' 신령하게 선택받았다는 요셉의 말을 애굽인들에게까지 확대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확대해석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이 말의 범위를 야곱 가족에게 국한시킵니다.
요셉은 교회 후손이 자기 수고를 통해서 파멸로부터 구출되는 상황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돌리며 그것을 여기서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수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후에 일으켜 세우신 막대한 무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후손은 그 숫자가 불어나기 전에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4. 본문 21절은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입니다.
1) 요셉은 시종일관하여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자신의 의지를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요셉은 그 형들이 행한 악한 행동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서 결과적으로 도리어 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20절).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에 근거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가 지금 뿐 아니라 그들의 장래의 안전까지 보장하는 말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2) 악의와 상처를 끼치는 일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뿐 아니라 '악을 선으로 극복하는 것'(롬12:21)이 거짓 화해가 아니라 확고한 화해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도움을 줄 위치에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할 계기가 와 있는데도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 행동을 통해서 그가 아직도 상처를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보복을 하지 않을 경우 그것으로 남의 과오를 용서해 준 것으로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움을 베푸는 일에서 우리의 손을 떼는 것이 곧 앙갚음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처사입니다. 가령 형제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를 돕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가 꼭 필요한 경우에 도움을 간청하는데도 그가 우리에게 불친철한 행동을 한 일이 있다 해서 그를 버린다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돕지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학대한 원수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만이 우리는 우리 마음에 완전히 악의가 없다는 점을 입증하는 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마음' 에 깊이 간곡하게 이야기했다는 말은 그가 그들에게 친절하게 말함으로써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말끔히 씻어 없앴기 때문입니다.
세겜이 디나를 유혹하면서 그가 그녀에게 끼친 수치는 망각하고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그녀의 마음에 대고 간곡하게 이야기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4) 이렇게 요셉에게는 우리 주님에게서나 기대되고 맛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 아래 자신을 놓을 때 이런 은혜가 그 사람을 통하여 공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가는 일이 자기 임무일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심도 있게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절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된다는 사도바울의 말이 그런 뜻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런 내용이라고 믿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 위에 쏟아 부으시는 은총의 의지는 지금도 우리의 위로와 격려의 내용이고 장래에도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그런 것입니다.
창 50: 22-26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본문에서 모세는 요셉의 최종 생애와 그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2-23절은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입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만세 전에 택하신 은혜로 된 사람이요, 그 은혜는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지상 생애 전반에 걸쳐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요셉은 오래 살면서도 자기 아버지 가족들과 잘 지내며 받은 바대로 은혜를 끼쳤습니다(22절). 사람이 권세를 가지면 교만해지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로써 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수명을 말하는 것은 오랜 기간동안 한결같은 마음을 품었다는 뜻에서입니다. 요셉은 애굽 사회에서 크나큰 영광과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으로서는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께 밀착되어 사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밀착되어 사는 방식은 곧 하나님의 계시에 접하여 사는 생활이 됩니다.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자기 부친의 집과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고난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접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게 고난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매개하는 사람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요셉께서 점차적으로 궁정의 보화를 뒤로 한 것도 지상적인 위엄이 자기를 하나님 나라로부터 떼어놓는 일이 없게 하려면, 이 모든 것을 멸시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과거에도 자기 마음을 애굽에 묶어 두려 했던 모든 유혹을 기피했던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요셉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요셉은 자기 영광을 제쳐놓고 천한 신분으로 내려갑니다.
자기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세속적인 지위를 계승하려는 소망을 점차 잊어버리게 합니다.
사람이란 일단 차지한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자기 행운을 후손에게 물려주려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60년 동안 자신과 자식들이 천한 처지에 남아 있고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지상적인 위대성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요셉은 마치 옛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힘을 얻으려고 허물을 벗어버리는 뱀을 닮고 있습니다
요셉은 증손자까지 본 사람인데도 왜 불어나는 숫자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는가
요셉이 세상 지위나 풍요를 얕보았던 것은 그의 자손들에게 유목생활에 집착하는 편을 택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식구로 취급받을 수만 있다면 애굽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런 정신에서 바른 신앙 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요셉의 생전에 수많은 자손들을 허용하심으로써 그에게 하나님의 신령하신 복에 대한 맛을 어느 정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맛을 통해서 장차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유혹을 받는 가운데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격려와 힘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2. 본문 24절은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입니다.
1) 여기서 모세가 말하는 형제들이라는 말속에는 실제 그의 형제들 뿐 아니라 다른 친척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요셉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들 모두의 눈이 요셉의 높은 권위 때문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만큼 자신의 위엄의 광채 때문에 그들 중 누구에게라도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자신이 그들의 모범이 되어 이 점을 깨우쳐 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습니다.
그 다음 둘째로, 애굽왕국에서 제2인자였던 요셉이 그 큰 명예를 불문에 부치고 그저 단지 약속의 상속자 처지만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2) 요셉께서 "나는 죽으나"라고 말씀한 것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불멸의 말씀인 만큼 용기를 가질 것을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에 의지하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을 두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장차 구속에 대한 증인이 되고 보증인이 될 정도로 이처럼 확실성을 지니게 된 것은 자기 부친에게 그처럼 배웠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그에게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이 그에게 위임된 구원의 언약을 자기 후손들에게 양도하는 교사와 선지자로 신령하게 임명되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친 증거를 환상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말보다 더 확고한 것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사취 당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손하게 대해 주실 필요가 없게 되고 맙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이 인간의 입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인간으로 부터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서 위로 이끌려 올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마음 속에 날인해 주십니다. 이처럼 신앙에는 다른 기초가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자신에게 그 기초를 두고 세워집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전도(傳道)에는 결코 거기에 대한 권위와 존경이 결핍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제한을 두는 것은 이런 저런 환상을 원하는 나머지 교회의 일상적인 사역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무모한 호기심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3. 본문 25-26절은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입니다.
이 말로 요셉은 그들이 애굽에 사는 동안은 이 말이 망각 속에 묻혀지고 말 것이요, 그들의 유랑은 하나님께서 당분간 그들에게 등을 돌려대신 것과 같이 보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계속해서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리라"(사8:17) 하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문단이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요셉이 자기 무덤을 이처럼 불안하게 선택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그것은 그것이 구속의 날인(捺印) 역할을 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자기 형제들이 자기 유해(遺骸)를 메고 가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유해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는 유익한 유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후손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안전하게 신뢰하도록 명령한 영원한 언약이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사장(死藏)되지 않는다는 점을 뚜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께서는 그들의 구출에 대한 모든 의심을 말끔히 제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맹세를 그 실예로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4.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에 부으신 은혜와 그 분의 은총에 반응하는 요셉의 신앙을 요약 정리하고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마칩니다.
1)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자로서 요셉은 철저히 남을 용서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자기들이 오래 전에 요셉을 팔아 버렸던 죄 때문에 그의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로서는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 요셉은 그는 형들이 용서를 빌 때에 울었습니다(17절).
요셉이 왜 울었겠습니까?
그가 오래 전에 그 형들에게 팔리웠던 일이 억울하여 울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억울했다면 일찍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들을 벌써 오래 전에 용서하였던 사실(45:4-8)이 말씀에서 확증됩니다(18-21).
분명히 그의 울음은 그 형들을 불쌍히 여겼던 까닭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된 그로서는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자복한 사실을 도리어 황송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면전에다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두고 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모습이 요셉의 일상이 될만큼 그는 남의 잘못을 기억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는 남들을 죄로 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교만한 행동인 줄 알았습니다(18-19).
(3)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 그는 자기에게 잘못하였던 자들을 도리어 위로하였습니다.
그 위로는 억지 위로가 아니고 자기가 믿는 진리 그대로 과거 사건을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로 보고 진정한 마음으로 한 위로였습니다(20-21).
2)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그대로 알아모신 요셉은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우리 본문 24절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란 말씀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자기 죽는 것은 문제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알게 하신 그대로 약속을 지켜 주실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겸하여 택한 백성이 내세(來世)에 들어가도록 하실 것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내용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내용을 요셉에게 주셨고, 요셉으로서는 이런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약속을 성취해 주실 것이니 만큼 염려 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시는 은혜를 따라 하나님을 알아 모시고 반응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구원을 얻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뢰심은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도 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대수술을 해야 될 병자가 의사를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그에게 내맡기며, 태평양을 건너가는 사람은 선장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배 안에 싣습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믿음을 주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대해서야 얼마나 더욱 신뢰할 만합니까?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또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와 장래를 자세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 구원을 완성하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알아 모신 우리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실 때, 이런 신뢰가 생애 전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각양 반응을 하는 자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입은 자는 오그라드는 형태가 아니라,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유지하면서 펼쳐지는 자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