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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 27 세 번째 부인 - 요 18: 28 관정으로 끌고 가니
요 18: 27 세 번째 부인 -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로 요한은 베드로의 통곡을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이 때의 정황을 다시 정리하면 세 번째 부인이 있었던 직후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셨고(눅22: 61), 그 때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울었다. (마가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1]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부가적인 설명없이 사실만을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지막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마 26: 74 -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시몬 베드로는 세 번이나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그는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정하였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정했다. 인간은 참 약하다.
2] 곧 닭이 울더라.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의 맹세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
* 요 13: 37-38 –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다고 전한다.
* 마 26: 75 –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막 14: 72 -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눅 22: 61-62 -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3] 베드로의 실패 (요 18: 12-27)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시고 대제사장의 아랫사람들에게 끌려 안나스의 집 뜰로, 가야바에게로, 공회로, 빌라도의 뜰로,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이처럼 시달리시다가 드디어 빌라도의 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형 언도를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주님은 손이 결박된 채 끌려다니셨으니 그 시달리심이야 이루 형용할 수 없으며, 하루 종일 굶으신 후라 그 시장하심이 얼마나 하셨겠는가?
(1)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요한과 베드로
가룟 유다의 인도를 받아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아렛사람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이때 주님의 제자들은 도망쳐 달아났으나 그중에서 주님의 두 제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먼 발길로 슬금슬금 결박된 채 붙들려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랐다. 이 두 명의 제자가 바로 요한과 베드로였다.
① 요한이 성공한 이유는 그의 담대함에 있다.
그는 예수님이 안나스의 집에 들어가실 때 주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 자신도 그 안 뜰까지 들어갔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실족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그의 신상에 어떤 결정적인 위기가 올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② 요한이 성공한 이유는 그의 사랑에 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다. 요한이 자신을 표현할 때에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었는지라”고 했다. (요 13: 23).
요한이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잠 8: 17).
요한의 신앙과 주님을 향한 충성심은 이런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나왔다.
(2) 베드로의 실패
베드로는 12제자 중 주님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신앙고백과 그가 받은 사명과 그의 적극적인 성품에 힘입어 늘 다른 제자들 보다 앞장섰기 때문에 이런 칭호를 들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의 평생에 한을 품게 된 사건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일어났다.
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문안에 들어가는 일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잘못하면 주님과 한패로 몰려 잡히게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다.
* 마 10: 28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② 베드로는 요한에게 이끌려 안 뜰로 들어갔다.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라고 했다(16).
끌려다니는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한다.
③ 베드로는 첫 관문에서 위기를 맞았다.
17절에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라고 말했다. 베드로에게는 올 것이 왔다. 그가 염려하고 두려워한 일이 그 앞에 찾아 온 것이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라고 지적하는 문지기 계집종의 물음에 베드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즉각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했다.
베드로는 이제 사람의 올무에 걸렸다.
* 잠 29: 25 -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한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올무에 걸린 것이다.
④ 베드로는 그 집 아랫사람들이 쬐는 숯불 있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라고 했다(18). 베드로는 하나님의 불,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사람인데 사람의 불을 찾아갔다.
계집종에게 지적을 당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쬐는 숯불 있는 곳으로 가 함께 쬐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 곳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잠시 후 대 제사장의 다른 종 하나가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다. 이렇게 지적한 이 종은 베드로의 칼날에 귀를 베임바 된 말고의 일가였다고 했다.
베드로는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또 부인했다. 이 때 “곧 닭이 울더라”고 했다. 베드로는 이처럼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다.
마지막에 토해낸 베드로의 부인의 소리는 절규에까지 이르렀다.
* 마 26: 74 -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가 이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심문을 받고 계셨다. 그리고 아랫사람의 손바닥에 의해 맞으시는 수모를 당하셨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측은히 보시고 그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 베드로는 이때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통곡하였다. 이 일이 베드로에게는 오히려 큰 유익이 되었다. 그는 이 일로 한 평생 주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순교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거꾸로 짊어졌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자.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했던 제자들이 그 밤에 그를 보호하지 못하고 다 도망쳐 버릴 것이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배려하셨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자신보다 남을 배려한다.
둘째,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자.
시몬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지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
* 눅 22: 51 -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자에게도 선을 베푸셨다. 우리는 그의 교훈과 모범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끝까지 선을 베풀자.
셋째, 우리는 친구가 우리를 버려도 낙심치 말자.
시몬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신뢰치 말고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거나 떠나갈 때라도 크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또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자.
넷째,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예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셨고 구타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세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셨고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 때 항상 담대할 수 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 잠 28: 1 -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7. 빌라도의 심문 ( 18: 28 – 38 )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요 18: 28 관정으로 끌고 가니 -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
요한은 가야바의 심문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이 전에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신성모독죄(마 26: 57-66. 막 14: 53-64. 눅 22: 66-71)를 뒤집어쓰셨다.
하지만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은 직접 언도하여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만 관정에 넘겨지고 자신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더렵혀진다는 이유로 들어가지 않았다.
1]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서 로마 총독의 관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총독으로 예수를 정죄케 함으로 백성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한 것 같다.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기록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썼다.
* 마 26: 57-66 -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 막 14: 53-64 -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 눅 22: 66-71 -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웠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본문에서 '관정(*,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 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 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리킨다.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했다.
* 행 23: 33 –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대축제일에 총독은 식민지 백성의 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 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안토니아의 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2] 새벽이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는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4경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 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2) 심문이 있는 당일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혹자는 본 구절 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영적인 해석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악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밤에 공회를 소집하여 그를 심문했고 그 새벽에 그를 로마 총독에게로 데려간 것이다.
3]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 날이 무교절의 첫날, 즉 절기 안식일이므로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하여 이방인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보다 자신들을 더럽히는 더 큰 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무지한 자들이었거나 자신들의 이성과 양심을 억누르는 위선자들이었다.
(1) 더럽힘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 간 유대인들은 예수만 넘겨주고 자기들은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범함으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이 아니라 랍비들이 정한 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 행 10: 28 –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정에 세울 때까지 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이미 유월절 식사는 끝났고 대축제 일이 첫날이 시작되었다.
* 마 26: 17-30 –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 막 14: 12-26 –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 눅 22: 7-23 –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날이 이른지라. 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혹자는 이 차이들을 조화시키려고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 절의 '유월절 잔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일동안 계속 먹는 '식사'인 '차기가흐'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Morris, Robertson).
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Robertson)은 이 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뜻')라는 단어에 대한 요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 (39절)
* 요 2: 23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19: 14에서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13: 3의 주석을 참조하라. 본 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월절로 표현했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대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범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