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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20)
초대교회에 예언, 방언, 신유와 같은 기적적 은사가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단 하나의 목적은, 신약 성경(정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과도기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참된 계시임을 확증(Sign)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리처드 개핀은 건축의 비유를 듭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초(터)'는 단 한 번만 놓인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그 터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릴 뿐 터를 다시 닦지 않는다." 즉, 신약 성경 66권이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특별 계시를 전달하고 확증하던 기적적 은사들(표적 은사)은 그 역사적 목적을 다하고 자연스럽게 중지(Cease)되었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단호한 입장입니다.
3. 현대 은사 운동의 치명적 위험성: '성경의 충분성' 훼손
만일 오늘날에도 누군가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예언하셨다"거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극단적 은사 지속론),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인 '성경의 절대 충족성(Sufficiency of Scripture)'을 붕괴시키는 치명적인 이단적 행위가 됩니다.
성경 66권 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구원 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웨인 그루뎀과 같은 온건한 지속론자들은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과 같은 절대적 권위가 없는 오류 가능한(Fallible) 예언"이라고 변호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오류가 섞인 예언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성령의 참된 예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매섭게 일갈합니다. 성경을 떠난 신비적 음성이나 환상에 의존하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주관주의적 혼돈과 교만으로 몰아넣습니다.
4. 성령의 주권적 기적과 섭리는 중지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목회적 균형을 위해 매우 정밀한 신학적 구분을 해야 합니다. '계시적 은사(예언, 방언 등)'가 중지되었다고 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기적 자체'가 중지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의사의 포기를 넘어선 초자연적인 치유(신유)를 베푸시며, 초월적인 능력으로 교회의 위기를 돌파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사람(신유 은사자)의 손끝에서 나오는 지속적인 '소유된 은사(Charisma)'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비상한 섭리(Providence)'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부인하는 차가운 이성주의자(자연신론자)가 되어서도 안 되며, 기적만을 좇아다니는 맹목적인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완성된 진리만을 붙들되, 살아계신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심을 굳게 믿고 부르짖는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5. 제29강 결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린도전서 12:31)
현대 교회가 방언을 하느냐 마느냐, 기적이 있느냐 없느냐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분열하며 에너지를 낭비할 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 논쟁을 마무리하며 가장 위대한 반전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31)
기적적 은사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보다 무한히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은사(가르침, 섬김, 위로, 구제 등)를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있는가'입니다.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기적을 체험했다 할지라도,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형제를 향한 이타적인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귀를 찢는 소음에 불과합니다(고전 13:1).
참된 성령의 사람은 기적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에 굴복하여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자입니다.
(제30강 예고: 성령론 제6부의 영광스러운 결론이자, 모든 은사를 통제하고 완성하는 절대적 기준! '제30강: 성령의 열매 - 은사를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갈라디아서 5장)'으로 은사론의 찬란한 막을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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