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영산원을 신축하다
원기8년 음력 6월말, 소태산대종사는 서중안 부부와 회상을 열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
영광에서 모친 정타원 유정천의 환후 소식을 듣고
서중안과 전주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문정규를 대동하고 서중안 부부와 봉래정사를 나왔다.
서중안 부부와 헤어진 소태산대종사는
문정규와 함께 줄포로 나와 윤선(輪船)을 타고 법성포에 내렸다.
소태산대종사는 어머니께 사탕이라도 사다 드릴까 하다가
'내가 어머님한테 사탕을 사다 드렸다가 어머님이 나한테 애착을 가지면 어쩔거나'하고
걱정이 되어서 그냥 영광 연성리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아우 박동국의 집으로 갔다.
박동국은 당숙에게 출계(出系)되어 영광읍 근처 연성리에 살았다.
유정천은 소태산대종사가 구도하고 깨달음을 얻고
영산에서 방언공사와 법인성사 후 변산으로 입산할 당시 작은아들이 있는 연성리로 가서 살았다.
소태산대종사는 먼저 모친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동국에게 모친에 대한 그간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소태산대종사는 모친을 시탕하다가 동국에게 말했다.
"도덕을 밝힌다는 나로서 모친의 병환을 어찌 불고하리요마는,
나의 현재 사정이 시탕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너도 아는 바와 같이
나를 따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벌써 많은 수에 이르러
나 한 사람이 돌보지 아니하면 그들의 전도(前途)에 지장이 있을 것이요,
이제까지 하여 온 모든 사업도 큰 지장이있을 것이니,
너는 나를 대신하여 모친 시탕을 정성껏 하라.
그러하면 나도 불효의 허물을 만일이라도 벗을 수 있을 것이요,
너도 이 사업에 큰 창립주가 될 것이다."
동국이 형님의 뜻을 이해하고 모친을 더욱 정성스럽게 시봉할 뜻을 밝히자 모친을 위로했다.
"인간의 생사는 다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오니
모친께서는 안심하시고 항상 일심청정의 진경에 주하십시오."
소태산대종사는 모친 곁을 떠나 정사로 돌아갔다.
얼마 후 8월26일(음력 7.15) 모친이 열반했다.
소태산대종사의 모친이 열반하자
영광, 부안, 김제, 진안, 전주 등지의 제자들이 조문을 와서 영광 연성리에 모여 치상절차를 마쳤다.
그들은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하고 구도하여 깨달음을 얻고 바다를 간척한 영산으로와
옥녀봉 아래 도실(道室)에 모였다.
갑자기 많은 제자들이 좁은 도실에 모이자 장소가 협소하여 불편이 심했다.
또한 도실은 터가 낮고 습한데다가 위치가 외진 곳에 있어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제자들은 많은 대중들이 모이기 좋은 곳으로 옮기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도실을 옮겨 짓자는 발의가 나오자,
새 회상 창립을 위해서라면 일신을 바쳐서라도 힘써 일하겠다고
오창건, 김기천, 이재철, 송규, 박세철, 이동안, 송도성, 이춘풍, 송적벽, 김월봉, 김광선, 김남천
12명이 나섰다.
새 도실 건축은 돛드레미(帆縣洞) 옆 산기슭에다 터를 정했다.
이 터는 산비탈에 가시나무가 많이 우거진 자갈 산이었다.
터를 측량하여 매입하고 음력 8월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했다.
자갈을 치우고 흙짐을 나르는데 해골과 뼈다귀가 숱하게 나왔다.
3개월여 동안 제자들은 옥녀봉 아래 도실을 옮겨
목조 초가 열 칸으로 짓고, 도실 아래채 4칸을 뜯어온 목재를 보태어
좌우에 여덟 칸 2동을 학원실과 식당채로 지어 음력 11월에 완공하고,
3,000여 년 전 부처님의 영산회상을 다시 이곳에서 부터 건설하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영산원(靈山院)'이라 했다.
영산원 건설에는 직접 일은 못했지만
서중안, 서동풍, 송벽조, 이완철, 서기채, 유건, 이순순, 김명랑, 김홍철, 문정규, 유기만, 신정권,
김영철, 김순천, 양하운, 김화옥, 이대련화, 장적조, 이강연화, 이만수월, 정청강월, 박벽송월,
강일생화, 이일근, 전삼삼 등이 물질적으로 후원했다.
사진; 원기40년대 영산원 전경.
사진; 영산원(앞)과 학원실의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