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의 아홉번째 모임,
9월 모임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었습니다.
모임 참여자는 김정현, 장경호, 성수현, 조아라, 이지윤입니다.
독후활동(나누고 싶은 구절, 소감)
경호
이 책을 읽으며 한 사람의 삶이 타인의 시선과 언어에 의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무너질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선택하고 해석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카타리나의 삶 역시 자신이 살아온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언론과 사회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언론은 사실을 선택적으로 취하고 왜곡하며, 추측과 편견을 더해 카타리나를 특정한 인물로 규정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정작 카타리나 자신의 목소리와 삶의 맥락은 지워집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미쉘 푸코가 이야기한 권력과 지식의 관계가 떠올랐습니다. 누가 이야기할 권력을 갖고 있으며, 누구의 목소리가 진실로 인정받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결국 카타리나의 명예를 무너뜨린 것은 단순한 사실 왜곡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그 이야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의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사업가로서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당사자를 이해하고 돕는다는 명목으로 그 사람의 삶을 특정한 언어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문제와 결핍에 집중하느라 그 사람이 살아온 다양한 이야기와 삶의 맥락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는 일은 그 사람을 대신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이야기가 존중받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현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현실을 날카롭게 다룬 책이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잔인한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명예와 일상이 무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놀랍도록 짧았다. 자극적인 헤드라인 한 줄, 맥락을 잘라낸 편집, 인용을 가장한 왜곡만으로도 평범한 삶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이러한 언론의 폭력은 힘없는 개인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지식인이든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주도할 권리를 빼앗기는 순간 누구나 똑같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하는 사람과 기록되는 사람 사이의 무서운 권력 불균형. 당사자의 진짜 삶은 사라지고, 기자의 손에서 다시 쓰인 이야기가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은 씁쓸함을 남긴다.
비단 언론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도 깊이 고민해볼 문제다. 당사자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볼 수도, 스스로 다룰 수도 없을 때, 한 인간은 자신을 설명할 말을 잃고 타인의 언어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기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고 기록할 권리를 빼앗긴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사회사업가로서 내가 남기는 기록의 무게와 역할을 다시금 되새긴다.
아라
■ 인상깊은 구절
- 그녀가 블룸에게 가져다준 오려 낸 신문 기사 열다섯 장은 카타리나를 전혀 위로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저 이렇게 묻기만 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p.68, 민음사)
- 나머지 열여덟 통의 우편물 중 익명의 엽서 일곱 통은 손으로 쓴 ‘음탕한’ 섹스 광고였고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자들의 암퇘지”라는 말을 사용했다. … 그 필체에서 엘제 볼터스하임은 그가 의학 교육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 교육은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p.85-86)
- 그러니까 부유할 뿐만 아니라 정계나 재계, 학계에서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 때문에 영화배우만큼 유명한 사람을 거부한다고 하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그리고 그녀 같은 가정부가 영화배우 같은 사람을 거절한다고 하면, 그것도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취향을 이유로 거절한다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p.120)
■ 소감
과거 마을신문 담당자로서 신문기사 작성법을 배웠었는데, 소설 속 <차이퉁>지의 기자는 내가 배운 것을 꼭 반대로 한다. 어떠한 사건을 취재할 때 서로 상반된 입장이 있다면 양쪽의 입장을 취재하고 이를 중립적으로 다루어야하지만, <차이퉁>지의 기자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만한 자극적인 정보의 일부를 확대하여 기록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력을 누린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된 취재 행위를 자신의 권리라고도 여기는 것 같다. 기자는 대중이 원한다는 핑계로 카타리나에게 불리한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을 근거로 편향된 기록을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한다.
책을 읽으며 기록하는 ‘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의 전문가로서의 기록은 평가를 동반하기에 어느정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나 자신의 주관적 시선이 들어간다. 그 기록을 가지고 회의를 진행하고, 다시금 기관의 사람들 다수가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물론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기록해야한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단편적 모습만을 바라보고, 기록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고집이 세고 편견이 많은 사람이다. 현실에서도 일부의 기사나 글만을 보고 한 사람, 혹은 어느 집단의 평가를 이미 내려버린다. 이러한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금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 모임을 통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스스로의 모습을 꺠닫는 경험이 쌓이고,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 고맙다 카타리나 블룸. 고맙다 북톡스.
지윤
언론은 집요하리만큼 진실 그 자체보다 자신들이 조망하고 싶은 부분에 주목한다. 카타리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철저히 외면받는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카타리나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언론은 그녀에게서 멈추지 않고 가족과 그녀를 믿어주는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리며 선을 넘는다. 한 사람을 향한 공격이 그를 둘러싼 관계까지 무너뜨리는 모습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자극적인 사생활에 주목하고, 취재와 조사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삶을 파헤치는 일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내가 알리고 싶은 진실이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사생활을 밝혀야 하는 걸까. 진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언제나 정당한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사업가로서 만나는 당사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의 모습에 어떤 경험과 관계가 쌓여 있는지 내가 이해하는 부분은 아주 일부분일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만으로 한 사람을 안다고 여기거나, 함부로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뿐 아니라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당사자의 존엄과 사생활을 지키고 있는지 돌아봐야겠다.
정현
민음사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게 된 소설이다. 언젠가 읽어보고 싶었는데 북톡스와 함께 읽게 되었다. 함께 책 읽을 수 있는 모임이 있음에 감사하다.
언론으로 인해 한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그린 소설이다. 언론은 진실보다는 신문, 잡지가 팔릴 수 있는 자극적인 이야기를 선호한다. 그리고 대중도 자극적인 이야기에만 반응한다고 느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진실은 자극에 묻혀버린다. 그 점이 참 안타깝다. 자극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어느새 언론이 생겨난 이유가 변질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학생일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중에 후원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후원을 받기 위해 영상 속에 못 사는 모습을 강조해서 보인다고 들었다. 잠깐의 모습으로 후원금은 많이 받을 수 있겠으나 그 후의 삶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서 사람을 돕고 관계를 생각하는 사회사업가는 어떻게 일하면 좋을지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그 사람의 삶을 낙인 찍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 이 소설 덕분에 다시 생각해본다.
2026년 10월 책 모임 안내
- 도 서 명 : 「내가 버린 여자」 - 엔도 슈사쿠
- 진행일시 : 2026. 10. 16.(금) 19시
- 모임장소 : (식사장소) 고향촌칼국수 / (나눔장소) 인근 카페
* 모임에 관심있는 분, 함께하실 분 댓글 달아주세요.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