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마애여래좌상)-예부터 이곳에 신기한 비결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을 꺼내는 날, 한양이 망하고 비결을 꺼낸 자도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훗날 동학교도의 비결 탈취 사건이라는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1890년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전라감사 이서구가 마애불의 가슴을 열어 비결을 꺼내려 했다. 그때 갑자기 천둥이 치는 바람에 비결을 꺼내다 말고 도로 집어넣었다. 그 뒤 동학교도의 남접 접주였던 손화중이 그 비결을 꺼냈다고 한다. 동학교도였던 오지영이란 이의 《동학사》에 나오는 얘기다. 손화중은 그 뒤로 동학교도의 세를 불려 고창의 무장읍성을 점령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도솔암 마애불에 대해 설명하는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도솔암 내원궁 가는계단에서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의 우정을 확인하는 암각서(巖刻書) - 세분은 조선 중기 호남 출신의 문신들로 복제(服齊) 기준(奇遵, 1492~1521) 선생이 20년 선배이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미암(眉巖) 류희춘(柳希春, 1513~1577)은 비슷한 연배이다. 미암과 하서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노원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과거 인종의 추종세력에 대한 숙청을 주장할때, 류희춘 등이 반대하자 파직을 당하였고, 양재역 벽서 사건(1547년,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등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사건)이후 류희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희춘은 유배지가 고향인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다시 바뀌었다. 귀양가는 도중에 미암은 하서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자네가 멀리 귀양가고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아들을 나의 사위로 삼겠네" 했다고 한다. 당시 미암의 외아들은 벼슬이 없었으니 하서의 집안에서는 반대를 하였으나 하서는 셋째 딸을 외아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권력에서 밀려나 귀양가는 사람의 자식을 자신의 사위로 맞이하는 하서의 우정과 의리를 엿볼 수 있는 장소라고 ....
첫댓글 너무 의미있고 좋은 연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