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야기… ❶ [인천(仁川)] 지명의 유래
혹은 조상 중에 정승, 판서 한 사람쯤은 있어야 자신의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 가는 사람 면상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 사람 집안에 정승이 있었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다. 다만 사람의 행실이 시원찮으면 “저 아비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듣게 될지 모르겠다. 조상님의 화려한 내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본인의 모습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어느 지역의 지명(地名)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게 된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고장 [인천]이 그 사례에 해당한다.
고려시대, 왕실에는 인천 이씨(李氏) 출신의 왕후가 여럿 있었다.
인종의 어머니 인천 이씨(李氏) 순덕왕후(順德王后)는 내향(왕후의 친정 고을)이 바로 지금의 인천이었다.
고려 중엽 막강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천 이씨(李氏) 이자연(李子淵)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그의 맏딸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소생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는데 순종, 선종, 숙종 임금이다. 이후로 이자연의 아들 호(顥)의 딸이 순종비가 되었고, 호의 아들 자겸(資謙)의 딸들이 예종과 인종의 비가 되는 등 왕실과 사돈을 맺고 위세를 떨쳤다. 고려 왕실은 왕후를 배출한 고장이라 하여 어질 인(仁) 고을 주(州) 즉, 인주(仁州)라고 불렀다.
공양왕이 등극하게 되자 이듬해 아들 석(奭)을 세자로 책봉하고 세자비로 인천 이씨(李氏) 이원굉(李元紘)의 딸을 맞아들였다. 인주(仁州)를 7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하고 지주사(知州事)를 파견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경원부(慶源府)와 지주사(知州事)를 모두 폐지하고 군(郡)으로 강등하여 다시 인주(仁州)로 부르게 했다. 태종 13년(1413년)에 큰 고을이 못되는 주(州)는 모두 명칭을 바꾸도록 했다. 이로 인해 주(州)의 한자에서 점 3개를 빼고 마침내 인천(仁川)이 되었다.
그러나 인주(仁州)나 인천(仁川)이나….
옛적에 왕후가 배출되었던 고장이라고 한들 자랑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오늘날의 인천은….
“동북아시아의 경제수도~ 인천~!” 구호가 아주 거창하다.
이렇게 성취되기를 바라는 염원이겠지만, 구호에 그쳐서는 아니 될 말이다. 허장성세(虛張聲勢)로 명성을 높일 수는 없을 터이니 이에 걸 맞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제 감각을 갖춘 시민의식이 더욱 고양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푸시맨 (인천을 사랑하는 평범한 시민)
첫댓글 so~~~
fantastic!!!!!!
좋은 날 택하여 인천 투어 가이드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
@맑은물가 예ᆢ
고맙습니다ᆢ^.~
인천 아니 인주가 좋은 고장이군요!
헌데
이자현의 맏딸 인예왕후의 소생이 순종이 되었다.
이자현의 아들 호의 딸이 순종비가 되었다?
4촌간?
쫌 심했다! 인주의 조상님^^
향토 문헌을 살펴보니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인천 이씨 가문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었습니다. ^^
이자겸은 권력을 독식하다가 그 유명한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는데 그의 아들들과 함께 결국 형장이 이슬로 사라집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끝내 죽음을 당하는... 그래서 후손에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며 역사의 교훈을 안겨주네요.
제 고향 이야기네요. 떠나온지 10여년이 되었는데 많이 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천은 상전벽해의 현장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