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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먼저 하나님께 한턱 쏘기>의 줄거리:
사실 '한턱 쏜다'는 말은 '한턱 쓴다'는 말의 오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쏜다'하면 한턱 내는 사람에게 일어난 좋은 일로 인해 생긴 기쁨의 터질 것같은 강렬함이 더 잘 표현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한턱을 받는 대신 쏘기만 할 만큼 기쁨이 넘치는 인생이야 말로 선민으로서 한 번 소원해 볼 만한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쏘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 볼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한턱 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런 기가막힌 삶이 가능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한턱 쏘기
(레27:1~3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3. 네가 정한 값은 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는 남자면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4. 여자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5. 다섯 살로부터 스무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열 세겔로 하며
6. 일 개월로부터 다섯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은 다섯 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7. 예순 살 이상은 남자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열 세겔로 하라
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오늘 레위기 마지막 27장의 내용은 자발적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는 서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 자신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로서는 재산을 뜻하는 생축을 하나님께 드린다든지, 부동산인 토지나 가옥을 드리고 또 초 태생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러한 서원의 내용을 기록한 레위기 마지막 27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먼저 하나님께 한턱 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한턱 쏘기’
어느 경제 일간지에 실린 내용으로 ‘한턱’과 관련된 재판의 판례를 소개했습니다. 서울남부지원의 민사조정판례인데 A라는 사람이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친구인 B에게 한턱을 쏘겠다고 해서 술집에서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무려 90만 원 정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A가 B에게 90만 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눠서 내자고 하는데, B는 네가 한턱낸다고 한 것이니 못 내겠다고 해서 다투게 됩니다. 한턱내겠다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이상하게 꼬여갑니다. A는 한턱내겠다고 했지만 90만 원이나 나올 줄은 몰랐고 B에게 나눠 내자고 하니 바득바득 우기면서 안 내겠다고 해서 경찰에 고소를 해서 법원으로부터 재판을 받게 됩니다. 남부지원 판사님께서 판결을 어떻게 내렸느냐면 한턱의 정의를 먼저 세웁니다. ‘한턱이라 함은 맨 처음 주문한 것이 한턱이니 추가해서 주문한 것은 나눠 내야 마땅하다’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래서 최초로 주문한 20만 원은 한턱내겠다고 한 A가 부담하고 나머지 70만 원은 각각 35만 원씩 부담시켰다고 합니다. (하하하)웃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을 읽은 어떤 분은 댓글에 ‘앞으로는 한턱을 내가 낼 때에는 처음 주문으로 소주 한 병과 밥 한 그릇만 주문하고 계속 추가 주문하도록 하자. 그리고 내가 한턱 얻어먹을 때에는 처음 주문 때에 소주 한 박스와 맥주 한 박스와 고급 회 코스를 주문하자’라고 했습니다.
‘한턱’에 대해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몰라서 찾아본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가를 새삼스레 느껴보려고 했더니 ‘한바탕 남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의미가 다 살지 않습니다. 원래 ‘한턱 쏜다.’는 말은 잘못 된 말로 ‘한턱 쓴다. 한턱낸다.’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한턱 쏜다.’는 말이 더 강렬한 어감이 있느냐면 ‘쏜다.’는 것은 화약이 터지면서 총알이 나가는 것으로 ‘한턱’이라는 것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기뻐서 내는 것이 한턱입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겨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기쁩니다. 그 마음으로 한턱을 내는 것이니 한턱낸다, 한턱 쓴다는 어감이 약하므로 한턱을 대포알 쏘듯이 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늘 한턱낼 일만 생기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한턱 받아먹기만 해야 되는 입장은 불행한 것입니다. 한턱 받아먹는 입장은 먹어서 좋긴 하지만 한턱 쏘는 사람에게 생긴 기쁜 일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한턱 쏘는 일만 늘 생긴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가능합니다.
우리가 ‘베푼다’고 할 때에는 베푸는 분들이 따로 있습니다. 고귀한 분들이 따로 계시니 우리 같은 범민들은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우리 범민들도 베풀지는 못해도 한턱 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같이 형편없고 실수투성이인 인간들도 기쁜 일이 생기면 빚을 내서라도 한턱 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베푸는 삶은 못하더라도 한턱 쏘는 삶은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습니까? 오늘 레위기에서 그 답변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한턱 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살 수가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한턱 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이 땅에서 평생 죽을 때까지 한턱 쏘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만족과 기쁨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맨날 쏘는 사람들 밑에서 얻어먹고 살면서 그걸 얻어먹는다고 좋아하지 말고 맨날 축하만 해주지 말고 축하받을 기쁜 일이 늘 내게 있어서 쏘면서만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레위기의 마지막 34절을 보면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라고 나오는데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26장 마지막 46절에도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라고 똑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26장에서 말한 ‘규례와 법도와 율법은’ 레위기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일단 1장부터 26장으로 레위기의 내용이 끝이 납니다. 그런데 27장에 또 붙으니 학자들이 이 27장은 부록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26장에서 내용이 끝났는데 또 갖다 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이것을 부록이라고 하면 의미가 많이 약해집니다. 이 27장은 이미 마쳐진 주 내용의 부록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저는 부록이 아니라 1장부터 26장까지를 레위기 1권이라고 하고, 이 27장 하나를 레위기 2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앞에 있는 내용 전체의 무게와 27장 하나의 무게가 평형을 이룰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부록이라고 말하기에는 내용의 중요함이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27장의 내용은 “서원”입니다. 여기에서 ‘서원’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자발적인 마음입니다. 무엇인가 내게 허락되어 있는 이 세상 차원에서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처리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간섭할 수 없고 내 것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정 된 것들 중에서(물론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서원입니다.
앞의 1~26장까지의 내용과 다른 것은 앞부분에서는 정언적인 명령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정언적’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해서 주신 말씀으로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의무규정들입니다. 그런데 이 27장의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서원의 마음을 저는 ‘한턱 쏜다.’고 표현합니다. 27장의 내용은 ‘계명’이라는 말씀을 34절에서 하셨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언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서원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범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 자신과 생축, 가옥과 토지, 생축의 초 태생, 수확의 십일조 등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을 오늘 표현하고 있는데 이 내용이 앞의 26장까지의 내용의 무게와 동일한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앞의 1~26장까지에서 하나님이 제사법, 정결법 등 생활에서 지켜야 될 모든 법들을 다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충실하게 이루어지면 거룩함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룩함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상태로 구분되어 가다가 최종적으로 좋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 최종적으로 좋은 상태에 도달한 거룩함이 나의 현재 상태가 되어버리면 그 거룩함의 상태에 도달한 증거가 한턱 쏘고 싶은 마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좋은 상태는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존재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충만해질 때에 만족과 기쁨이 생기게 되므로 이 이상 축하받을 일이 없고 이 이상의 경축일다운 경축일이 없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좋고, 내가 사업에 성공해서 좋지만 그 좋은 일이 다 있는 가운데에서도 최종적으로 좋은 상태가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만족된 상태이고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사업이 잘되고, 자식이 일류대학에 들어가도 한턱내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은 비교가 안 될 만큼 궁극적으로 좋은 상태에서 기쁨을 누린다면 나타나는 증거가 한턱 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1장부터 26장까지의 말씀이 지켜졌는가 안 지켜졌는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면 내가 하나님께 한턱 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느냐 안 생기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안 생긴다면 아직 1장부터 26장까지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제시된 말씀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6장까지의 모든 말씀의 실효성을 검증하는 방법을 27장에서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어떤 내용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드린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에 자기 자신을 드리려고 해도 이미 레위인들이 다 있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성전에 드립니다. 그리고 가축과 토지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초 태생을 드립니다.
우리가 앞에서 어떤 내용을 다루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 있는데 그 선물들로부터 자유한 것이 선민의 자유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선물로 쥐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선물로부터 자유한 것이 선민입니다.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들어와 있는 것을 허용치 않기 위해서 버립니다. 나 자신의 목숨이 귀중하고 좋고, 생축이 좋고, 부동산과 가옥이 중요한데 이것들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으로 배부름이 일어나므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으로 한턱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엇으로 한턱을 냅니까? 내 마음에서는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들에 대해서 내 것이라고 인정해서 내 마음으로 처분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빠 생일에 어린 자녀들이 선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빠가 벌어다 준 돈 중에서 엄마가 얼마를 자녀들에게 주면서 아빠의 선물을 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것인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내 것이 되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아빠의 기쁨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기쁜 자들의 특징은 이 땅에 있는 것들로 기뻐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 자가 더 이상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 자에게도 기쁨이 더 가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 자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었다고 기뻐질 수도 없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해서 기뻐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 것은 거룩함입니다. 더 이상의 좋음이 없는 좋음의 상태인데, 여기에서 기쁨이 생동감 있게 더 가중될 수 있기 위해서는 나를 만족케 하시는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본문이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십니다. 28절에 보면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온전히 바쳐진’이라는 말은 ‘헤렘’이라는 히브리어인데 그 뜻은 ‘없애기 위해 격리된 것, 저주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으로부터는 받는 것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 성을 무찔렀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생축 전체를 다 몰살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철저하게 멸절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불행은 하나님께 무엇을 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음에 불행이 있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이냐면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려도 너에게는 받지 않겠다고 정하신 곳이 지옥입니다. 천국은 끝없이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내가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곳이 천국입니다.
미스 김을 좋아해서 선물을 하지만 그 선물을 탕탕 튕겨낸다면 그게 불행입니다. 주님은 몸 밖에 없어도 그 몸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사도 바울이 헌신을 드릴 때에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이게 행복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아무리 부자이고 어떻다하여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데 안 받으실 때에 불행입니다. 내가 받지 못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사도 바울과 사도들은 이 세상적인 의미에서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드리기 위해서 사는데 받아들여집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을 낸다든지 하는데 이 마음이 안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해서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상태 때문 일수도 있고, 또 하나는 헤렘의 가능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부터는 절대로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데 이것은 영원한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중에 자기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그 어느 것도 그 사람으로부터 받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에 그 사람 마음에는 뭔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를 않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그 장소에 자기를 드리고 싶고, 임재하시는 장소의 일을 위해서 토지와 가옥을 드리고 싶고 재산 중의 얼마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내게 경사가 났기 때문에 맨 먼저 하나님께 한턱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안 생긴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지 못해서 하나님 때문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닫으셔서 너에게는 절대로 안 받겠다고 결정하신 헤렘의 상태입니다.
받는 것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절반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거지입니다. 영적 거지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장 마지막에 드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것은 초 태생과 십일조는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의무규정으로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원의 이야기와 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기가 막힌 의미가 있습니다. 엄청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의무규정을 지키는 마음에는 앞에 열거 된 자기를 드리고, 생축을 드리고, 부동산을 드린다고 하는 것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을 드리고 싶은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을 드리고 싶을 때에 십일조와 초 태생을 드립니까?
‘초 태생’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뒤따라오는 모든 것을 다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을 때에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십의 구를 받아서 쓴다는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받은 십의 구를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앞에 내놓는다는 이야기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유도 선수들이 유도를 할 때에 자기가 잡으려고 하면서도 계속 상대방의 손을 쳐냅니다. 그 덩치 큰 유도 선수라도 왼손이든지 오른손이든지 옷자락을 한 움큼만 잡히기 되면 몸 전체의 크기에 비하면 사실 극히 작은 부분입니다만 몸 전체가 뒤집히면서 날아가 버립니다. 십일조는 유도입니다. 진짜 유도에서는 옷자락을 잡으려는 상대방의 손을 계속해서 뿌리칩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초 태생은 기쁨이 넘쳐서 하나님께 한턱 쏘고 싶은 마음으로 유도 선수 같은 마음이 되어서 내 옷자락 한 움큼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소득 전체가 열이라고 한다면 십분의 일을 하나님 손에 쥐어드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 십분의 일 자락으로 나머지 십 분의 구를 엎어버리시는 것인데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초 태생, 처음 난 것의 자락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드린다는 것은 그 뒤에 줄줄이 태어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한판으로 뒤집으셔서 내 뜻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인정한 것들을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기쁨으로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다 내어드립니다.
우리는 수확의 십일조를 이야기하고, 시간의 십일조를 이야기하고, 재능의 십일조를 이야기 하면서 십분의 일만 떼어내면 되는 줄 알고, 십 분의 구는 내 마음대로 쓰면 되는 줄로 압니다. 십 분의 구를 다 써서 하나님께 한턱 쏘기로 마음먹을 때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초 태생은 나머지 줄줄이 태어날 가축과 증식되는 재산들과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드리기로 할 때에 드리는 것입니다. 내 옷자락을 하나님께 내밀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한판 뒤집기를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일조와 초 태생의 비밀인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한턱 쏘고 싶은 사람만이 사람을 만날 때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턱을 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할 만큼 내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몸 하나밖에는 드린 것이 없는데 그 몸을 쥐시고 십자가에 거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 하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몸으로 한턱 쏘셨더니 하나님은 그 몸 한턱 받으시고 기쁘셔서 인류에게 한턱을 쏘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아들로 인한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으셔서 주님의 죽으신 그 몸을 가지고 인류를 위해 한턱 쏘신 사건이 구원 사건이고 십자가 사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한턱 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속성상 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받는 것은 우리 관심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돌아보며 무엇이 부족하다고 하지 말고, 지금 내가 세상에서 결핍되어 보이는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한턱 쏠 수 있을까를 봐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고 그래야 된다고 믿는다면 1장부터 26장까지의 내용을 지키는데, 그 복잡한 모든 내용들이 십자가 생활화 하나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빼앗아 갈 만큼 좋은 모든 것들, 신경 쓸 모든 것들, 걱정할 모든 것들에서 다 죽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십자가 생활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동선을 따라가면 거룩함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으로 완전히 기쁜 상태가 주어지고 이 경축할만한 상태에서 내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한턱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한턱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때에 하나님이 그걸 받으셔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한턱을 쏘실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함에 도달한 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되 가슴이 터질듯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내가 드린 것을 손에 쥐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기 위한 한턱 쏘심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선교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제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므로 하나님이 나로 인해 기뻐하시며,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나를 통해 한턱 쏘시는 과정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납니다.
27장은 1장부터 26장까지의 모든 내용이 실효성을 거두고 있느냐 없느냐를 검증해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한턱 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까지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만으로 기쁘고 만족한 거룩함에 도달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레위기 만세입니다. 레위기라는 책이 잠 안 올 때에 읽으면 수면제처럼 잠이 오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레위기가 만만세인 책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레위기를 우리 손에 들려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레위기의 모든 내용이 함축된 이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 우리가 언제나 어떻게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하여 한턱 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