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뽕나무 위의 삭개오 / 누가복음 19:1-10 궁조, 청삼
이 성경 구절 안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원망하는 사람이며, 둘째는 주님을 가리는 사람이고, 셋째는 주님을 보려고 애쓰는 자입니다. 우리 사회 안에도 이런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주님을 알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대해서는 자신이 행한 것과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지 모르고, 주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실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면서, 자신의 사심으로 인해 주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원망합니다. 이는 유다와 같은 것입니다. 한 여인이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그 돈이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아버지가 여러 자녀를 둔 경우, 아버지는 모든 자녀를 똑같이 사랑하지만, 어떤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어떤 자녀는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 순종하지 않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계십니까?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 중 어떤 분은 은혜를 받고 어떤 분은 받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에 있는 것이지, 주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둘째 부류는 주님을 가리는 사람들이며, 이들은 모두 높은 지위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을 가리는 사람들은 불신자나 평신도가 아니라, 목사나 장로, 감리사, 감독과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모두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우리 감리교회 안의 장애물이 되어,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열심히 주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난장이였지만, 주님을 간절히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키 큰 사람들이 주님을 가려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자신이 주님을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아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고 기쁨에 넘쳤고, 주님께서도 삭개오의 집에 오셔서 유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가장 천한 사람 삭개오의 집에 구주가 오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주님을 영접할 만한 믿음이 있었지만, 원망하는 사람들과 키 큰 사람들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삭개오와 같이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모두 삭개오와 같습니다. 우리도 작은 난장이와 같고, 우리 앞에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도 뽕나무에 올라가야 합니다. 뽕나무는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올라가면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천한 백정이 장로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