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세운 대조영
나는 발해를 세운 고왕으로, 본래 이름은 대조영이에요. 나와 내 아버지 걸걸중상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 군사들에 의해 요서 지방에 있는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갖은 고초 끝에 발해를 세우게 되었어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해를 세웠는지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 볼까요? 대조영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 발해 건국의 터전을 닦아 주었다. 걸사비우 걸걸중상과 함께 당나라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여진 족장. 전투 도중 죽어서 그의 군사들이 고스란히 대조영 부대에 편입되었다. 이해고 당나라 편에서 대조영과 싸운 거란족 장수. 천문령 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고구려 영토는?668년 10월, 한때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흔들며 자기 나라 땅을 천하의 중심이라고까지 자부했던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어요.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은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수도인 평양성에는 당나라 관청인 안동 도호부가 들어섰어요.
당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고구려 사람들은 당나라의 식민 정책에 크게 반발했어요. 670년에 고구려 장군이었던 고연무가 중심이 되어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며, 고구려 왕족인 안승과 귀족인 검모잠도 안시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와 싸움을 시작했어요. 여기에 고구려 부흥군은 당나라가 영토 분할 문제로 신라와 나·당 전쟁을 벌이자, 신라 편이 되어 당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어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당나라는 평양에 설치한 안동 도호부를 만주에 있는 신성으로 옮겨야 했으며, 보장왕을 다시 데려와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사람의 환심을 사려했어요. 하지만 당이 믿고 파견했던 보장왕은 그 지역의 말갈족을 끌어들여 독자적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을 모색하는 등 고구려 사람들의 당나라에 대한 저항 운동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만 갔어요. 나라를 세우는 대조영 그러나 보장왕의 부흥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당나라에 들통이 나서, 왕은 당나라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가서 681년에 그곳에서 죽었어요. 이제 고구려 부흥의 꿈은 영영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요서 지방의 영주(현재 요녕성) 땅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을 중심으로 뭉쳐서 재차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걸걸중상은 고구려의 장수였는데, 나라가 망하면서 당나라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영주 땅에 끌려와 정착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영주 땅에서 696년에 거란족이 폭동을 일으켜 영주성을 함락하고 주변 고을을 점령한 뒤에 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어요. 이 기회를 틈타 걸걸중상도 말갈족을 이끄는 걸사비우와 연합하여 영주 동쪽의 여러 성을 점령하며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했어요. 당나라는 거란 출신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걸걸중상의 부흥운동을 진압하려 했어요.
이해고의 군대와 먼저 결전을 벌인 것은 말갈족 장수 걸사비우였는데, 걸사비우는 전투 도중에 죽었고, 걸걸중상도 이 무렵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이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운명은 대조영 손에 달려 있었어요. 대조영은 지도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들을 피해 천문령(현재 요녕성 창무 서쪽) 쪽으로 이동했어요.
전투를 치를 때마다 승리를 거둔 이해고는 오만해져서 아무 방비도 없이 천문령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어요. 대조영 부대는 천문령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해고 부대가 주변을 살피지 않고 골짜기로 곧장 쳐들어오자, 기습 공격으로 박살을 내 버렸어요.
이 전투로 대조영은 새 나라를 건설할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으며, 송화강을 건너 동모산(현재 길림성 돈화현 소재) 자락에 정착하여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어요. 이때가 698년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으며,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했어요. 
독자적 발전을 이루는 진나라대조영은 임금이 된 첫 해에 멀리 돌궐에 사신을 보내 친선 관계를 맺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중앙과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했어요. 그리고 독자 연호의 사용을 통해 진나라가 황제 국가임을 대내외에 당당하게 밝혔어요. 이처럼 진나라가 강하게 나오자, 당나라는 진나라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어요.
당은 사신을 보내 새 나라 건설을 축하해 주었으며, 대조영 또한 둘째 아들인 대문예를 보내 답례를 하면서 당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했어요. 한편 신라와 당나라는 진나라가 건설되자, 급속히 친밀해지면서 동맹 관계를 굳건하게 다져 나갔어요. 673년에 치른 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서로 사이가 멀어졌는데, 고구려의 후예들이 고구려의 옛 땅에서 새 나라를 세우자 위기의식을 느껴 나·당 전쟁 이전의 끈끈한 관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교과서 속의 대조영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당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많은 유민들이 당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당의 군대와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방으로 몰아냈다. 때마침 당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거란의 추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서 지방에 있던 대조영은 이를 틈타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랴오허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말갈인 부대를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뒤쫓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길림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발해를 세웠다(698). 〈중학교 국사 교과서 73쪽〉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 하면서 발해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집어넣으려고 한다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예, 그래요. 중국 정부는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정권 정도로 격하시켜 발해사 전체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만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러 증거로 보았을 때에 발해는 분명 우리 민족이 세운 한민족(韓民族)의 국가예요. 대체적으로 고대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왕의 재임 기간을 표시하는 호인 연호를 중국의 것을 빌려다 사용했어요.
하지만 발해는 줄곧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스스로를 황제 국가로 표현했어요. 오죽하면,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에 “발해는 연호 사용을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고 나와 있을까요. 또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 왕을 ‘고려국왕’으로 표현하여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어요. 이러한 사례만으로도 발해가 당의 지배를 받지 않은 자주적인 독립국가였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대조영이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말갈족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대조영 아버지인 걸걸중상만 보더라도 고구려 사람이기보다는 말갈족일 가능성이 큰데, 아무래도 장콩선생이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삐따기의 예리한 시각으로 보면 말이야. 어때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물론 대조영이 말갈족의 후예일 가능성도 있어요. 실제로 중국 만주 지역의 북쪽 지대를 흐르는 흑룡강에 근접해 있는 소도시 동강에 살고 있는 말갈족 계통의 혁철족은 지금도 대조영을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해요.
고구려나 발해는 다민족 국가였으며, 특히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다수의 말갈인들이 피지배층을 형성한 연합국가였어요. 따라서 우리 민족만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우스운 일이에요. 하지만 발해 지배층 자체가 고구려 계승 의지를 지니고 있었고 당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성 또한 확고했어요. 따라서 발해사를 중국의 견해처럼 당의 지방 정권으로 보는 것은 억지 주장이며, 우리 민족사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거에요. 
출처 묻고 답하는 한국사 인물카페 1, 2010.7.20 표제어 전체보기 - 한국사 인물들이 전하는 그때 그 순간! 청소년을 위한 한국 인물사 문답 여행 「장콩 선생님과 함께 묻고 답하는 한국사 인물카페」 제 1권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이 책은 한...자세히보기
- 저자
- 장용준(장콩) | 교사
- 장콩(장용준)은 남도에 있는 시골 고등학교(함평고)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다. 아이들과 역사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0여 년을 역사 교사로 살아오면서도 단 한 번도 가르치는 일에 싫증을 내본 적이 없다.&lsq...자세히보기
- 그린이
- 서은경 | 만화가
- 1999년에 잡지 <윙크>에서 진행한 제2회 만화 공모전에 당선하면서 만화가로 등단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선생님은 ‘낮은 울타리’에 <만화로 만나는 따...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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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엇하는 거야, 산동. 당연히 대조영의 후손인 태씨
친회장 산동이 한 말씀 올려야 하는 것 아니야

걸걸 중상, 걸걸 대조영은 당나라 조정이 억지로 만든 이름입니다. 그대로 쓰면 아니 되어요. 알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