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무제 원소 원년에 예군 남루 등 28만 명이 신라에 내려와 창해군을 삼았다고 하고, 또한 후한서에 예는 북으로 고구려와 왜구차와 접하고 남으로 진한과 접하며 동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서로 낙랑과 접했다고 했으니, 가단의 군국지에 이르기를 신라는 북으로 명주를 경계로 삼았는데 명주가 곧 고예국이라 했다. 문헌비고에 지금 강릉부 동쪽에 예 때 쌓은 고성의 유적이 있었다고 한다.
대관령 밖은 동양에 약한산천이 부상을 가렸었다. 野老가 흥망의 일을 알지 못하고 전간에 한가히 고동장을 주웠구나.
대관령은 興地勝覽에 강릉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그 주의 진산이라 했다.
여진의 장백산이 굽이쳐 동해변에 드러난 것이 심히 많았는데 이 령이 가장 높아 동해 위에 우뚝 솟아있었다. 김극기의 시에 의하면 "가을 서리 기러기 지나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녘 닭 처음 울 때 솟아났다"고 하였으니, 가을 서리는 기러기가 지나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녘에는 닭이 울 무렵에 솟아났다는 것으로 그 지극히 높음을 말한 것이다.
약국은 예국과 같으니 여지승람에 강릉부는 본래 예국이었는데 철국이라고도 하고 약국이라고도 했다.
부상은 부상과 같은데 부상은 부상을 가리키니 부상은 해가 뜨는 곳이다. 약위가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비췄다는 뜻이다.
흥패는 흥망과 같으니 예국 이후의 무수한 흥망을 가리킨 것이다.
고동장은 삼국사기에 신라 남해왕 16년에 북명(지금의 강릉) 사람이 밭을 갈다가 왕인을 얻어 신라에 바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