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애지문학작품상 후보작
김보나 권기선 우정인 이순화 홍정미 이미순 백지
황차의 별
김보나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너는 종종 묻곤 했다. 지금 보이는 빛이 일억 광년 전의 은하에서 온 거라면…… 우리를 둘러싼 것은 부드러운 이 어둠뿐이냐고.
말라붙은 찻잎에 들끓는 물을 부을 때마다 향내가 살아났다. 따뜻한데 죽어 있던 차를 마시면 마른 장작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속에서부터 불씨가 타오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물을 삼켜 살아나는 불이 있다면.
연녹색 강에 물결을 일게 하던 인부들의 망치질은 그쳤어도 여전히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밤이다. 누군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책의 문자열처럼 비가 내리면 사람을 앞에 두고 차를 마셨다. 철관음, 금준미, 백호은침…… 울렁이는 금빛. 언젠가 받은 볕이 끓어넘치는 물을 한 모금 넘길 때
“죽기 전에 오렌지 빛을 본 사람이 있대. 쪽빛이나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사람도 있대. 그게 자기 마음의 색이래”
고대 인도 사람들은 불의 신이 인간과 신을 연결해 준다고 믿었다. 제물을 살라 신에게 닿도록 연기를 흩어놓기 때문에 그렇다지.
네가 찻물을 올리던 때, 물이 사정없이 끓어넘치던 그때에도 우리 곁엔 불의 신이 있었을까.
어쩌면 찾아드는 신이, 지금 보이는 빛이 일억 광년 전에 출발했다 해도…… 연노랑 빛에 기어이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
떠날 사람이 내준 차를 마신다. 물로 타오르는 불. 홧홧하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실몽失夢
권기선
아이를 낳으면 손가락을 만져보고 싶었다 감자에서 올라오는 포슬포슬한 김을 마주하며 어쩐지 꿈을 잃은 것 같은데
가정이 아닌 형태가 너를 울게 할 것 같아 손을 만진다 둥글게 갈아냈던 반지와 손가락의 지름을 눈물을 참고 있는 눈망울을 쓰다듬고 싶었다
작게 흠집이 난 테이블 유리에는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조그맣게 걸려 있고
공기의 무거움을 마음의 찬물처럼
생각해도 어루만질 수 없는 걸 안다
너를 닮은 아이였을 수도 나를 닮음을 바란 너였을 수도 있다
혼자 쓴 다짐을 보았지, 아이를 낳으면 만져보고 싶은 가정의 형태를 보태려 하지 않아도 가득 들어왔던 과일처럼 생기에 찬 태몽을
기록을 태우는 일이 잔인한 일인지 포옹으로 불행을 독대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고 흘린 눈물이 눈가에 박혀 종일
입김처럼 떨고 있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신종 도감
우정인
보고되지 않은 종에 대해 쓴다
화석으로도 발견된 적 없기에 뼈의 길이와 섭생을 유추할 수 없다
그들은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 서식한다
쿵쿵과 고요함 사이에 끼어 산다
쉽게 깨어지는 구름과 하루 사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꼬리뼈가 지워진 자리 망할, 불면증에도
그것은, 산다
여러 마리가 뒤엉켜 살기도 한다
발자국 화석이 보고된 적 없으나 유인원과 동종으로 유추된다 발 소리는
깊은 밤, 더욱 우렁차다
이 동물을 야행성이라 쓰기로 한다
짧고 간결하게 스타카토,길고 지루한 난타, 의자 긁는 소리, 피아노 소리, 진공청소기 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알 수 없는 고함소리, 낭묘와 여묘처럼 수상한 울음,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바람의 여백 침묵과 침묵 사이에 때때로 둔탁한 마침표를 남긴다
수많은 제보가 모여들지만
아무도 그들을 목격했다는 보고는 없다
인터폰이나 초인종 소리에 거칠고 포악해진다는 제보가 때때로 접수된다
그냥, 살고 있다고 쓴다
멸종 기대 동물, 이라고 쓴다
우리 집 위층에도 있다고 쓴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고군산군도
-찬물 때
이순화
하얗게 물꽃 넘나드는 전라북도 고군산군도가 송이송이 한 묶음 꽃이다
자박자박
물때 드는 소리 적막하고
철썩철썩
물꽃 뒤척이는 소리 드높은
절해고도
섬
불어라 바람아
물이 타고 있다
불어라 바람아
바다가 타고 있다
무녀도 무녀의 장구 소리에
물꽃이 성부를 그려내고 있다
우주 순환의 장엄한 노래여
불을 높이 들어라
그래그래
피울 수 있을 때 피워야지
외로움도 깊어지면 노래가 될 수 있나니
고동치는 너의 심장에 장구를 놓아라
내 굵은 두 팔에 중력 조석의 푸가를 올려라
고군산군도……무녀도, 대장도, 비안도, 십이동파가 당신께 바치는 한 송이 꽃이다
---애지 여름호에서
수선화, 그 저녁
백승자
겨울의 동지들이 노랗게 날아오른다
상처난 사월은 여전히 침묵하는 중
두근거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봄이 노랗게 오는 건 아니라 했다
봄은 반드시 겨울의 비명을 토해내야 온다 했다
그럴 듯한 말들은
절박함과 박절함 사이에 끼여 초라해지고
주저앉고 싶은 무릎이 갈팡질팡이다
대체 열심의 하늘은 얼마나 높은 건지
믿을 만한 믿음은 있기나 한 건지
마지막처럼 별을 보곤 하던
그 저녁
벌겋게 달아오른 흉터에서
그녀를 보았다
내 어둠을 안고
사월로만 늙어가는 내 절대의 가이아
벼랑 끝에도 우주가 있어
간절한 봄이 핀다
초록스러운
울음꽃스러운
---애지 여름호에서
외딴집의 내력
홍정미
배나무 옆, 목 매달아 죽은 처녀 이야기가 전해 오는 집에서 유년을 보냈다 어머니는 배나무 아래에 가면 소름이 돋는다며 가지 않았다 처녀의 깊은 한은 마당에 흰 꽃잎으로 흩날렸다 나는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슬픔을 맞으며 내내 편안했다
그 외따른 집 강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며 영어 단어를 외웠다 구불구불한 학교 길에 영어단어들이 굴러다녔다 저녁이면 단어들이 저벅저벅 배나무 아래를 배회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 배나무 가지가 창호 문에 어려들면 영어 단어를 더 크게 외웠다
노발리스를 읽고 또 읽었다 많은 시의 텍스트가 배나무에 주렁주렁 열렸다 말없이 열리는 푸른 꽃의 세계, 은유는 낡은 벽 속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그 텍스트 속에 숨은 비밀은 말이 되지 못해 배꽃으로 흩날렸다 언어와 함께 배나무를 헤집고 도망치는 바람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내 어린 날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배
나무에 갇힌 채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애지 가을호에서
확률
이미순
느낌이 서늘한
그것은 공중에서 떨어졌다 정확하게 내 오른쪽 귓불을 스쳐 목덜미에서 어깨 위로 가볍지 않게 떨어졌다
아직 살아있는 듯 온기 있다
벌레처럼 피부에 착 달라붙는 느낌으로 움찔했다
한밤중에 손등이 따끔해 얼떨결에 손으로 잡아 에잇, 하고 벽에다 집어 던지고 보니 지네였던 때가 떠올랐다
어깨 위를 움켜잡았다 물컹했다 곤죽이 되었다
움켜잡았던 손을 쳐다보니
새똥!
새똥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로또 맞을 확률과 맞먹을까
에잇, 에잇
혼자 맞을 확률에 맞았다
---애지 가을호에서
D-day 외 1편
백지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던 날,
엄마는 채식주의자*를 건네주었다
학교 도서관의 도서 폐기 목록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늘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다
엄마를 믿어도 될까?
사냥개의 다큐멘터리를 보던 날,
엄마는 토끼를 쫓는 사냥개를 보고 잔인하다 했다
엄마랑 돼지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중이었는데
사냥개와 나, 둘 중 누가 더 잔인한지 헷갈렸다
시험문제를 풀 때마다 답지는 반쯤 찢어져 있었고
찢어진 답지를 찾아 엄마의 꿈속에서 늘 헤매고 다녔다
꿈을 깨도 하루 종일 다리가 아팠는데
엄마는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언제까지 다리가 아파야 할까?
*한강 소설
---애지문학회 사화집, {D-day}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