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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1-15절
오병이어와 예수, 그리고 무리들
요한복음 5장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으로 시작한다면 요한복음 6장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로 시작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드러내실 뿐 아니라, 유대인과의 논쟁 속에서 자신의 신분이 어떠한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즉 안식은 자비와 선을 위한 날이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며,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바롤 행하시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비와 선이라고 할 때 38년 된 병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죄의 종으로 있던 자를 자유케 하신 것, 단지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까지 고치신 것이 더 중요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영생과 심판에 대해서까지 말씀하시면서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와 이후 오병이어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은 이런 영생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은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하는데, 오병이어와 관련된 말씀은 네 개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대해서도 살펴본 바가 있고 마태복음 설교를 통해서도 살펴본 바가 있지만 다시 한번 이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단 네 개의 복음서가 이 오병이어를 다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경우는 사건 자체만을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사건과 더불어 이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따라서 사건 자체만을 다루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경우 비록 그 의미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의미는 요한복음의 내용과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의 내용과 달리 해석하는 것, 예를 들어 일부 사람들이 오병이어에 대하여 기적의 역사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아이의 정성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해석은 요한복음 6장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오병이어가 없더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하기도 했지만(마4:3), 예수님은 못해서 안 하신 게 아닙니다. 능히 하실 수 있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걸 교훈하시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마4:4). 달리 말하면 사탄의 시험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 목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살펴본 요한복음 5장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가 있어야지만, 아이의 정성이 있어야지만 기적이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은 사람의 정성이 있어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일하시는 분이 아니란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의 신성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분명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앞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정성이 있어야지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없어도 일하실 수 있으며, 오히려 은밀하게 사람이 정성을 쏟도록 하심으로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아이가 떡을 가져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자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은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빼고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로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병이어 사건은 결코 사람이 초점이 되는 그런 사건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온 아이의 정성이 초점이 되고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본문을 보기에 앞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오병이어 사건은 명백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한 사건임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경우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면서 성경을 신앙의 규범으로 삼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도 그의 인성에 강조점을 두는데, 그 결과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그의 동정녀 탄생, 부활과 승천 등에 대하여 거절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기적에 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일부 가톨릭 신부들을 통해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있을 때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의 기적이 아니라 한 아이의 헌신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여 나눠 주었을 때 사람들이 감동하여 각자가 가지고 온 것을 다 내어놓았다고 본문을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정진석 추기경 역시 헌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았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사람이 초점이 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해석이지만, 또 다른 문제는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야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대립으로 나왔다고는 하지만 가톨릭의 경우는 그나마 기적과 이적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오병이어와 관련해서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가톨릭은 성경 자체가 기준이 아닙니다. 이성이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까 기적의 역사는 교훈을 위한 것으로 있다고 판단하게 되면 그때는 기적이 기적이 아닌 것이 됩니다.
어쨌든 오병이어 사건은 기적이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도록 만든 사건도 아니며, 사람의 정성을 드러내는 사건도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란 사실을 드러내는 기적의 사건이며, 나아가 사람의 정성 이상의 분명한 뜻을 드러내고자 하신 사건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런 이해와 더불어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 누가복음에 보면 이 오병이어 사건 앞에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헤롯의 귀에 들렸을 때 혹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또한 세례 요한의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수에 대한 소문이 헤롯에게까지 들려졌던 겁니다. 헤롯의 입장에선 두렵기도 하지만, 그런 두려움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겁니다. 특히 누가복음 9장 9절에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눅9:9)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신 것은 아마도 그런 헤롯을 피해 가셨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유명 인사였는지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 가셨는데도 불구하고 큰 무리가 따랐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남자 장정만 5천명, 실로 엄청난 수가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표적을 통해 사람들은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 혹은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큰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런 표적이 곧 위대한 선지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마태복음에서는 병든 자를 먼저 고쳐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14:14).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병든 자를 고치주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눅9:11).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큰 무리를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는 말씀도 하시는데(막6:34), 목자 없는 양과 같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병든 자들, 혹은 귀신들린 자들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저들의 영적 실상으로 인하여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내용이 생략되어 있지만 그들의 상태,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불쌍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인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심으로 인해 식사할 겨를도 없이 해가 저물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경우 이런 내용은 생략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오병이어 사건이 언제쯤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지금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월절과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과 어떤 연계성을 보여주고자 하심임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따라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왔을 때,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 연결해서 본다면 해가 저물었을 때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하면 6절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단 야고보서에 보면 시험의 목적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기 때문에(1:4) 이런 면에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험은 어떤 면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 그런 표적을 보이신 것처럼 능히 먹이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당신께 있다는 고백을 듣고자 하신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16장에서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b) 즉 이런 참된 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이상 고백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면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은 결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 제자들에게 당신이 능히 먹이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는 고백을 주시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7절에서 빌립이 이렇게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보자면 2023년 올해 최저 임금이 9,620원입니다. 대략 9,500원으로 잡고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한다면 76,000원이 하루 품삯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백 데나리온이 부족하다고 했으니까, 76,000원에 200을 곱하면 대략 1,500만 원 정도입니다. 조금씩 먹이더라도 최소 얼마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1,500만 원입니다. 최소치가 아니라 평균으로 하자면 그것보다 더 올라갑니다. 쉽게 말해 빌립은 굉장히 계산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런 계산으로 인해 이 많은 무리를 먹일 돈이 우리에게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나섭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적어도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뭔가 나오겠구나!” 싶을 수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발휘하는구나!” 그러나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한 순간도 그 믿음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걸 봐도 그 기적이 믿음을 만들어 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더욱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바로 그렇게 따라 다니고 보고 듣고 한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 전혀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아니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을 때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병이어 사건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병을 고치시는 기적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그들은 전혀 발휘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것 같아 보일지라도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경험하더라도 주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붙들고 있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믿음을 발휘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시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걷게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우리의 자리는 바로 이 자리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뭔가 힘이 있어 보이고, 뭔가 경건의 모습을 갖추었어도 그것이 능력을 만들어내고,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를 주목하지 말라. 달리 말하면 주목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시느냐? 단순히 빌립 한 사람을 시험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을 시험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목적은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계시는 겁니다. 돈이 없어 안 된다. 뭔가 약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으로는 무리다. 이게 인간의 모습이란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존재, 그가 바로 제자들이요, 오늘날 우리의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에 심어주실 때까지는, 아니 심어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유지시켜 주지 않으면 결코 믿음을 발휘할 수 없는 게 인간임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냄을 통해 무엇을 깨닫기 원하느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걸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런 제자들 앞에 그리고 많은 무리들 앞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앞서 빌립과 안드레의 말을 요약하자면 돈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자리에 앉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사람들을 앉히는데, 어쩌면 그들 마음에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의구심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묵묵히 예수님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앉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축사하십니다. 1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시되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인성을 따라 기도를 하십니다. 특별히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4절과 5절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바, 예를 들어 먹을 것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지 않고, 또한 그것에 대한 감사가 기도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더럽히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교훈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감사함에 따른 기도는 거저 신앙의 형식 이상의 내용임을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먹는 것, 그것은 분명 내가 돈을 지불하고 먹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 감사 기도요, 그런 감사 기도를 통해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거룩함으로, 구별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떡을 제자들로 하여금 나눠주게 하셨을 때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시면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바로 모든 사람이 배가 부를 정도로 먹었다는 사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거두게 되니 그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찰 정도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제자들과 무리에게 알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는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임을 분명히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이겠습니까?” 또 “떡과 물고기가 있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었지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단지 병든 자만을 고치시는 게 아니라, 저들의 배고픔도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 그것도 넘치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몇 가지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행하신 기적은 다른 기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친히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심으로 예수님께서 참으로 신성을 지니신 분이란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실 정도로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비록 우리가 지금은 노력하여 얻게 되는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얻게 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고 계시는 선물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서 이 사건이 일어날 때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했는데, 유월절이란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서 면하게 되는 그런 날입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출애굽을 하게 된 날이기도 합니다.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 좌우와 인방에 피를 바름으로 죽음이 건너가게 된 그런 사건이요, 종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건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날입니다. 또한 이 날을 저들 민족의 시작의 날로서 정하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했을 때 우리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기가 가까웠을 때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떡을 먹고 배불렀다, 혹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실 능력이 있으시고,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만 말씀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구원과도 관련된 사건이요, 매우 영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요한복음 6장 24절 이하를 보시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베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4-26) 그러니까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찾아다니고 있느냐 하면 표적을 통하여 표적의 참된 의미 때문에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27절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오병이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줬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셨던 것은 단지 육신을 위하여 먹는 거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그것을 ‘썩을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무엇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느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에 저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히 30절에 보시면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묻습니다. 31절에선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상기시키고자 한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즉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나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만나를 먹은 것처럼 지금 예수님을 통해 먹을 것이 없는 가운데서도 먹고 남음이 있는 그런 은혜를 얻게 되었다는 유비가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드러내고 계신 것은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셨는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마14:19). 마치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처럼, 심지어 그것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자 했던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 역시 보이는 것은 오병이어이지만 그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고, 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란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게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병이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신 것은 단순히 저들의 육적인 배고픔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저들의 주린 영혼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것이 핵심으로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던 겁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해 무엇을 진정으로 주고자 했느냐 하면 생명의 떡인 예수님 자신을 그들에게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는 것도 사실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통해 알리신 바와 같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자임을 알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허락하셨던 겁니다(신8:3). 너희가 구원을 받았느냐? 유월절을 통해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을 확인했느냐? 그럼 너희가 사는 삶은 떡만 먹으면서 사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게 바로 만나를 통해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 입니다.
그런데 그 만나가 누굴 상징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지금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알리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는 이상 주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한 순간도 유지할 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앞서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제자들을 시험하셔서 드러내셨던 것처럼 그들 스스로는 결코 참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없는 자들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또한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이상 그들 스스로는 결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65절과 66절을 보시면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물론 여기서 제자라고 하면 12제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을 통칭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느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않으면 누구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니까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던 겁니다. 다르게 이해하면 표적을 보고 따랐지만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이 되자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7-69)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할 때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것만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로 오면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란 말씀이 있는데, 얼핏 보면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구약에서 말씀하시던 그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는 듯 보입니다. 물론 오병이어 기적을 보았고 실제로 경험한 바가 있어서 전혀 유익이 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정도면 유익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었던 유익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그것이 26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말로는 그가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하지만, 구약에서 예언한 선지자를 통해 누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떡을 먹고 배 불리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외적으로 고백한 것은 옳습니다. 저들은 표적을 보았고 그 표적에 대하여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었느냐?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도 뜻하신 내용이 아니라, 그저 세상 임금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가 세상의 임금이 되면 먹고 마시는 데는 부족할 것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니라 세상 일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적어도 믿는 자가 세상적으로 볼 때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데, 무리들의 이런 자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내용으로 갖추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방향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우리는 의외로 우리의 세상 욕심을 감추고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하여 내놓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임금 삼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 분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가?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임금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고 자신을 내어주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리들처럼 표적을 보면서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고백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임금 삼으려고 하는 저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참된 고백도 중요하지만 참된 고백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이 나타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여러분에게 육적인 것을 줬다고 너무 쉽게 육적인 것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육적인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넘치도록 주실 수 있고, 다 쓰고도 남음이 있게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신자는, 성도는 그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주님만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만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리고 그분의 말씀만이 생명을 주고, 또한 영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만나를 주셨지만, 그 만나를 통해 교훈하고자 하신 것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저와 여러분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도,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그분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참된 제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넉넉함, 부족함 없는 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살아가야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 떡임을 나타내신 것은 그분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도,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첫댓글 본 설교는 141019설교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금 설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