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요약 그는 유대 상인이었던 베른하르트와 마리에 사이에 태어난12명의 자식 중 둘째였으나,그중5명은 디프테리아로,누이는 뇌암으로 사망했으며,동생은 자살을 하는 등,파란 많은 가족사를 경험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말러는 성격이 어둡고 괴팍했으며,그가 가장 사랑했던 바로 밑의 남동생 에른스트까지 죽자 그의 뇌리에는“죽음이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열다섯 살에 이미 빈 국립음악원에 합격한 뒤 브르크너를 사사하며 음악적으로 성장합니다. 18세에 음악원을 졸업한 말러는20세에 살에 오스트리아의 바트 할 오페레타의 지휘자로 데뷔한 이래,카셀 궁정극장·프라하 가극장·라이프치히 가극장의 부지휘자를 거쳐,부다페스트 왕립가극장 음악감독,함부르크 시립가극장 수석지휘자,함부르크 교향악단 지휘자,빈 궁정오페라극장 음악감독 및 지휘자,빈 필하모니 지휘자를 거쳐, 37세에 빈 궁정가극장 음악감독으로10년간 자리를 굳혔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고통과 수모에 사직한다.이듬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수석지휘자로 부임했으나 토스카니에 밀려 사임하고 뉴욕필하모닉 지휘자로3년 계약한다. 지휘자로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휘날렸던 그는근대 오케스트라의 지휘법을 완성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휘에 밀려 하지 못했던 작곡을 하기 위해1892년부터 여름철에 잘츠부르그의 슈타인바흐에 오두막을 짓고 교향곡에 전념했다. ■ 낳지도 않은 딸의 죽음을 예언한? 가곡집「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42살에 19세 연하인 알마 신들러와 결혼했는데,그 한 해 전인 1901년에 그는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ueckert, 1788-1866)가 동양의 시편들을 번역하고 개작한 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리케르트는 두 아이를 잃고 깊은 상심 속에 살다 간 아버지이기도 했는데,그 쓰라린 심정을 기록한 시 몇 편을 읽은 말러는 마음이 움직여,어둡고 침울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뤼케르트 시에 어울리게 반음계 형식을 사용한 연가곡을 같은 제목으로1914년에 발표했다. 1곡 ‘이제 태양은 저토록 찬란하게 떠오르려 하네(Nun will die Sonn' so hell aufgehen)’와 3곡 ‘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Wenn dein Muetterlein)’,그리고 4곡‘때로 나는 생각하지,아이들은 그저 놀러 나간 거라고(Oft denk' ich, sie sind nur ausgegangen)’를 말러는1901년 여름에 작곡했다.이해에 말러는 알마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고,몇 년간 각별히 왕성한 창작 시기를 보냈다. 1901년부터 1906년 사이에 교향곡4번, 3번, 5번6번이 차례로 초연되었다. 알마와 결혼한 그해에 말러는 사랑스러운 첫 딸 아나 마리아를 얻었습니다.그리고 교향곡5번이 초연된 1904년 여름에<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의 2곡 ‘왜 그처럼 어두운 눈길을 보냈는지 이젠 알겠네 (Nun sehe ich wohl, warum so dunkle Flammen)’와 5곡 ‘이런 날씨에(In diesem wetter)’를 작곡해 이 연가곡을 완성했으며,그 이듬해에 둘째 딸 아나 유스티나가 태어났다. 그런데 3년 후인 1907년에 장녀 아나 마리아가 죽는다.
그러자 말러는 마치 자신이 작곡했던 연가곡이 딸의 죽음을 불러온 것 같아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고,원래 심장이 약했던 말러는 이때 결정적으로 심장병을 얻어 위기를 겪게 된다.이때부터 말러는 작곡할 때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고,이 죽음은 고통,죄,피할 수 없는 상황 등의 연상으로 이어져 그의 예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부인 알마의 외도에 눈물 흘린 처량한 인생
말러는 1901년11월7일 지인과의 식사 모임에서 알마 신들러라는 여성과 만났는데,그녀는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사교계와 예술계에서 주목 받는 여성이었습니다.그녀의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가수 겸 유명 배우였습니다.어렸을 때부터 유명한 예술가와 교류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그녀의 세련된 행동과 미모는 당시 많은 예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지적이고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알마는 말러와 만나기 전 이미100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했고,오페라의 제작에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깨어있는 여성이었습니다.또 당시의 유명 작곡가 쳄린스키에게 직접 작곡을 사사한 그녀는 한때 그와 교제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1901년 처음 만난 이후 이 들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했고,말러는 서둘러 알마에게 청혼 했습니다.말러의 나이 마흔한 살,알마는 스물두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지요
두 사람은 곧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들의 비극은 약혼 직후 시작됩니다.연주 여행 중 말러는 알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편지의 내용에 경악한 알마는 결혼 생활에 대한 불길한 예감까지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편지에는 알마가 결혼하기 전에 모든 활동에서 손을 떼고 결혼 이후에는 자신만을 위해 내조하는 가정적인 아내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지는 편지였지요.아주 이기적이고 완고한 말러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편지였습니다.알마는 말러의 편지를 두고‘차가운 손으로 심장을 뜯어내는 느낌’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말러의 청혼1년 뒤3월,알마는 말러와 결혼했고 그가 원했던 대로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결혼하자마자 첫째 딸을 출산했고 2년 뒤에는 두 번째 딸도 출산했습니다. 겉으로 본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 사이처럼 보였지만 날이 갈수록 알마의 마음은 답답해졌고 자유가 그리워졌습니다.결혼 후 말러는 음악회로 더욱 바빠졌고,빈 시간이 생길 때면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말러와 나이 차가 컸던 알마가 어쩌면 갈수록 말러를 어렵게 느꼈을 수 도 있었습니다. 말러의 생활 패턴을 따라야 하는 부인의 역할에 점차 숨이 막혀온 알마는,말러에 대한 사랑 역시 차츰 식어가고 있었습니다.뒤이어 불행도 찾아왔습니다.1907년 아직 어린 나이의 첫째 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두 딸에게 크나큰 애정을 쏟았던 말러는 충격으로 심장 발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딸의 죽음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말러는 빈 궁정 가극단에서의 자리를 사임하고 새로운 환경을 위해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가극단으로 향했는데,이곳에서 알마는 아이를 유산하는 등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결국 미국에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1910년 여름,오스트리아 그라츠 근교의 작은 도시로 딸과 함께 요양을 떠났습니다.그리고 그곳에서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를만나 교제를 시작합니다.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그로피우스는 한 통의 편지를 일부러 말러 앞으로 보냈습니다.이 편지 때문에 말러는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었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알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러에게 그동안 참아 왔던 자신의 불행과 고통스러웠던 결혼 생활에 대해 말러에게 쏟아냈습니다(말러 사후 이들은 결혼한다). 알머에게 헌정한 교향 곡 제8번 <천인 교향곡> 연습장면 초연시 연주자(성악가 포함)는 800명에 달했다 함(통상 4관 편성의 관현악단은 100~120명)
말러는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교향곡 제8번<천인교향곡>을 알마에게 헌정하여,알마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갈구하였다. 미완성인 제10번 교향곡 1악장 아다지오에서는 알마(Almar)를 표시하는 트람펫의A(라)음을 절규하듯이 20초 동안 숨을 쉬지않고 뽑아냄으로서,자신의 삶을 관통해온 알마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현실을 직시한 극도의 고통을 절규한다. 4악장은 큰 북의 무시무시한 타격으로 끝난다.그리고 악보의 맨 끝에 이렇게 써놓았다. 그대만이 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의 사랑이여, 안녕!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으리 알름쉬(Almschi:Almar의 애칭)!
말러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구원,실존,슬픔,즉 삶과 죽음이라는 극과 극,그 사이 사이를 탐구한 사람이다.
<출처 : 서양음악사 100장면(2),pp.357~361) 및 Wlkipedia>
● 감상 :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중 <높은 지성에 대한 찬미> 꾀꼬리와 뻐꾸기가 서로 자기가 노래를 잘한다고 우기다가, 귀가 큰 당나귀(높은 지성을 가진)에게 심판해 달라고 하였는데, 노래의 노 자도 모르는 당나귀가 노래를 시키자 꾀꼬리는 하이 C까지 뽑내며 노래하였고, 뻐꾸기는 그저 "뻐꾹 뻐꾹" 반주만 하였다. 그러자 당나귀가 <뻐꾸기 승>이라고 했고, 뻐꾸기는 히요하며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꾀꼬리는 기가차서 하늘만 멍하게 바라본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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