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de, Glanados,Gluck,Godard,
Gørecki, Gossec,Grieg, Grofé,
Hildegard,Hindemith, Holst,
Honegger, Hummel
※(注) :적색 번호(예#813)는 음악의 링크 번호임
(1) 가데(Gade,Jacob : 1879~1963 ,덴마크)
(2) 그라나도스(Glanados, 1867~1916스페인)
그라나도스는1867년7월27일 바르셀로나 근처의 레리다에서 태어났다.육군 대령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부터 호안 밥티스타 푸욜(Joan Baptista Pujol, 1835~1898)을 사사했고,화성과 작곡을 전설적인 펠리페 페드렐(Felipe Pedrell, 1841~1922)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젊은 그라나도스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1887년 파리로 가서 샤를르 드 베리오(Charles de Beriot, 1833~1914)를 사사했고, 188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그의 첫 번째 야심작인「스페인 무곡집Danzas espanalas」을 출판했다.
이후 그라나도스는1901년 아카데미아 그라나도스(Academia Granados)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는데,이 가운데에는 후일 스페인 음악계를 이끌어간 마드리게라(Paquita Madriguera),쿤키타 바디아(Conchita Badia),프랑크 마샬(Frank Marshall)등이 있다.
1912년 그라나도스는 미국 피아니스트인 어네스트 쉴링(Ernest Schelling)을 만났다.쉴링은 스페인 밖에서 그라나도스의 음악을 알린 첫 번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그는 피아노 모음곡인「고예스카스Goyescas」를 뉴욕에서 출판하도록 도움을 주었고,작곡가로 하여금 이 모음곡을 오페라로 만들도록 격려했다.결국 오페라는1916년1월28일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초연되었다.그라나도스는 이 자리에 참석하여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그리고 미국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다.영불 해협에서 그라나도스가 탄 서섹스호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된 것이다.
(3) 글루크(Gluck, 1714~1787오스트리아)
(4) 고다르(Benjamin Louis Paul Godard 1849~1895프랑스)
1849년8월18일 파리에서 태어났고,바이올린을 후멜에게 사사한 뒤1863년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화성학(和聲學)을 공부하였다.로마대상에는 두 번 참가했으나 실패하고,1878년에 파리 음악콩쿠르에서 교향곡《타스》로1등상을 획득하였으며,이를 출세작으로 그 후에도 많은 관현악곡과6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대중 취향의 음악이 많아 근로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895년1월10일 칸느에서46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오페라「조슬랭」(1888)의4막에 나오는‘조슬랭의 자장가’가 유명하다.
(5) 고레츠키(Gørecki, Henryk Mikolaj, 1933~2010폴란드)
(6) 고섹(Francios-Joseph Gossec, 1734~1829벨기에-프랑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고섹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15세 때안트워프 대성당의 성가대로 활동했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헌병대 군악대장이 되어 수많은 애국가요를 작곡했다. 1795년 파리음악원 작곡교수에dlaaudehlT고, 95세의 긴 생애 동안30여개의 교향곡을 비로사여 오페라20개와 다수의 종교곡과 실내악곡을 작곡하여 프랑스 교향곡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 최초의 교향곡 자곡가이며,종교음악가이고 음악교육에 대한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7) 그리그(Grieg,Edvard 1843~1907노르웨이)
(8) 그로페(Grofé, Ferde 1892~1972미국)
그로페는'심포닉 재즈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운다.거슈윈의「랩소디 인 블루」등은 그로페의 관현악 편곡에 의해서 비로소 생명의 빛을 늘렸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당시 그는 거슈윈과 함께 폴 화이트맨 악단의 일원이었는데,「랩소디 인 블루」는 여러 곳의 여행을 계속하는 기차 안에서,거슈윈이 써내려 가는 대로 피아노 스코어를 받아들고 편곡을 서둘렀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어쨌든 그로페의 관현악 편곡에 의해 심포닉 재즈는 갑자기 광채를 발했고,세계 악단의 한 가운데에서 빛나기 시작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로페는1892년3월27일에 뉴욕에서 태어나,어머니에게 피아노·바이올린·화성을 배웠으며,비올라를 조부에게 배웠다고 한다.그는 소년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했고,생활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이윽고 로스앤젤리스 교향악단의 비올라 주자로서10년간 일했다.그리고 화이트맨이 악단을 조직했다는 것을 알자 이에 참가하여,화이트맨이 뉴욕에서 화려하게 재즈 연주회를 열었을 때는 그 중심이 되어 화이트맨의 기획을 성공시켰다.많은 작품을 썼지만,그 중에서 모음곡「대협곡」과「미시시피」가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데,그는1972년4월3일 산타모니카에서 타계했다.
(9) 힐데가르트(Hildegard, 1098~1179독일)
여성들 역시 교회를 위한 지식의 보존과 음악 발전에 한 역할을 담당했으며,중세시대의 이러한 역할이 부여된 여성들은 수녀들이었다.특히 한 수녀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그녀는 서부 독일의 작은 마을인 빙겐의 여수도원장인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였다.힐데가르트는 오늘날 과학서와 의학서를 남긴 과학자로,그리고 교회의 특별한 의식을 위해 직접 시와 음악을 만든 작곡가이자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 기억된다.
▲일대기 및 작품
(10)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독일)
1895년11월16일 독일의 하나우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일류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고,여러 악단에서 연주했다.후에 고등음악원에 입학했으며,작품2번인C장조4중주곡은 멘델스존 상을 획득하였다. 1915년 프랑크푸르트 가극장의 콘서트 마스터로 취임했고,비올라 주자로서 아마르 등과4중주단을 조직하였으며,후에 베를린 고등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고,1939년에는 미국에 이주하여 예일 대학 음악부 수석 교수로 취임, 1942년까지 재직했다. 1956년,빈 필하모니의 지휘자로서 이 악단과 함께 해외 연주 여행했으며,그는 꾸준히 작곡과 저술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의 말년의 작품에 이르러 적지 아니 매너리즘에 빠진 경향이 있으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처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수준급임에 틀림이 없다.또 그의 음악은 현대음악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19세기의 속박을 절단한 점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점이다.그는1963년12월28일 프랑크푸르트에서68세의 생애를 마쳤다.
(11) 홀스트(Holst, Gustav Theodore 1874~1934영국)
스웨덴 혈통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874년9월21일 영국에서 태어나1934년5월25일 타계했다.
구스타브 홀스트는 친구인 본 윌리엄스(R.Vaughan Williams)와 더불어 영국의 근대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그는 런던의 왕립 음악원에서 공부한 다음 한 동안 트롬본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서른 살 무렵부터 덜위치 여학교의 음악교사로 일했고,그 후 세인트 폴 여학교의 음악감독과 몰리 칼리지의 음악감독 등을 역임하면서 주로 주말과 공휴일을 이용해서 작곡을 했다.홀스트의 작풍은 바그너와R.슈트라우스를 위시한 독일 낭만주의의 기반 위에 그리그의 서정주의,라벨의 세밀한 리듬과 정교한 관현악법,그리고 영국 민요의 곡조 등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었다.아울러 힌두교의 영적 세계와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도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인 관현악 모음곡「행성」을 비롯하여,현악합주를 위한「세인트 폴 모음곡」,교향시「이그던 황야」,합창곡「예수 찬가」,「제1합창 교향곡」,오페라「사비트리」등이 있다.
(12)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스위스)
미요·뒤레·오리크·타이페르·풀랑크와 함께 근대 프랑스 음악의 최선봉6인조로서,인상파 음악에 대항한 이 악파는 직절(直截) ·단적(端的) ·강건(剛健)미를 주장하면서 현대까지 그 혈맥을 잇고 있다.
오네게르는 스위스인을 양친으로 하여1892년3월10일 프랑스의 르아브르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음악 교육을 받았으나,그 전에 이미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1990년에 취리히 음악원에 들어가1911년까지 재학했고,후에 파리 음악원으로 진학하여 당디 등에게 사사했다. 1914년부터 작곡 생활에 들어갔는데,처음에는 통속적인 악곡을 쓰고 있었다. 1916년,「피아노를 위한 토카타와 변주곡」을 쓴 것이 기악곡에의 출발이었고,계속해서 많은 실내악곡을 발표했다.
1916년에는 에릭 사티를 으뜸으로 하는 일단의 운동에 참가하면서 근대 프랑스 음악의 혁신을 꾀했는데,이른바 최선봉인6인조는1920년에 결성되어 오네게르가 앞장서서 활약했다.「기관차 퍼시픽231」(1923)과「럭비」(1928)는 세계 각국의 악단이 다루어 음악 애호가의 절찬을 받게 되었다.비교적 최근 작품으로는,클로델의 신비극「화형대 위의 잔다르크」(1935)의 부수음악이 알려져 있다. 1955년11월27일에 타계했다.
(13) 후멜(Johann Nepomuk Hummel,1778~1837)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서 우아하고 기교가 풍부한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했다. 1819년 바이마르의 악장을 지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의 과도기에 활약한 음악가이다.보헤미아의 프레스부르크(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2년간 빈에 있던 볼프강 모차르트(Wolfgang Mozart)의 집에서 살면서 그로부터 음악을 배웠으며,그후 신동 피아니스트로서 아버지와 함께 독일·네덜란드·영국 등지를 순회연주했다.
영국에서는1년간 무초 클레멘티(Muzio Clementi)로부터 배웠다. 1793년 빈으로 돌아와 요한G.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Albrechtsberger),프란츠J.하이든(Franz J.Haydn),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등으로부터 교습받았다. 1804~1811 년 하이든의 뒤를 이어 에스테르하지가(Esterhá zy family)의 성가대 악장을 지냈다. 피아니스트와 음악교사로 성공을 거둔 뒤1819년 바이마르의 성가대 악장이 되었다.
중요한 작품들로는 3중주곡,소나타,론도, 6개의 협주곡 등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작품들로서 모두 스타일상으로 우아하며 멜로디와 꾸밈음에 기교가 풍부하다.
유연하고 음색이 명확하며 당시의 빈에 유행하던 경쾌한 연주법에 잘 어울렸으나,후멜과 동시대인으로서 강력한 경쟁자였던 베토벤의 작품들에 찾아볼 수 있는 감정의 깊이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후멜은 또9개의 오페라, 3개의 미사곡,《만돌린협주곡mandolin concerto》,《6중주곡 D단조 Septet in D Minor》등의 실내악곡을 작곡했다. 1828년 발행된 저서《피아노 교본 Piano School》을 통해 운지법을 혁신했다.
◆ Wikipedia : 후멜(Johann Nepomuk Humm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