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문제가 있어 동서 한의원에 내방한지 서너번
아직도 병이 잡히지 않는다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 그만 갈까 했더니 동서가 그러다 큰일난다 하여 또 대천을 찾았다
진료를 받고 천안으로 오르던 중 주포에 있는 보령성곽에 들렀다
천안에서 보령오는 길 내 생전 이렇게 심한 안개길을 경험한 적 없는 날씨인데 하루종일 이 날씨가 이어졌다
이 성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산성)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위치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아 만든 것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 630여m, 높이 3.5m이고, 성에는 적대(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던 곳) 8개소, 남ㆍ북ㆍ동문 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 1432년에 제민당ㆍ공아 ㆍ병기고 등 140여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 성벽 약 70m와 북쪽 성벽 약 360m만이 보존되어 있다.
보령관아문은 조선시대 보령현의 외곽에 쌓았던 보령읍성의 남문 문루 건물로, 세종 13년(1431)에 현감 박효성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문루 앞으로 보이는 주포읍내 길이 옛모습 그대로 간직한채 있다
예전엔 보령현의 주 거리로 많은 이들이 왕래했으리라
문루 뒤로는 주포초등학교와 주포중학교가 위치해 있다
근대화가 되는 과정에서 일본놈들은 그 지역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조선의 관청을 헐고 식민사상을 주입할 수 있는 학교를 주로 세웠다 그래서 대부분 오래된 학교는 그 지역 명당에 위치해 있다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설송) 두 그루가 교문을 웅장하게 호위하고 있다
1930년대 친일잔재의 표상이 되는 나무이다
여느 시골처럼 학년당 채 1학급이라 하기엔 너무나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소인수 학급이다
예전엔 학교 관사로 쓰였음직한 학교 도서관 모습이다 옆의 주목나무는 일제통치시절 총독부가 기념식수한 나무란다
학교를 나와 보령향교로 옮겼다
소달구지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시골 풍경 그대로 모습이다
민가집 옆마당에 소담스럽게 국화가 늦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보령향교는 1723년(경종 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868·1964·1967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을 비롯하여 5채의 부속건물이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의 대성전은 맞배지붕으로,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또한 전후면을 고막이벽으로 하여 좌우는 하방벽을 쌓고 그 위에 벽체로 마감하였다.
솟을대문이 정면으로 두 채나 되어 더욱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향교 왼편으로 난 길을 걷자니 전형적인 시골 길이 마음을 따스하게 감싼다 진당산의 기운이 이 동네를 깊게 감싸 아늑함을 더욱 느낄 수 있다
다시 홍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