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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훈독경 (天一國訓讀經)
제3권 참된 신앙과 뜻길 - 제28일
뜻과 우리의 생애
날짜 : 1972. 6. 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생활 가운데서 선하고 악한 일이 결정되고, 하나님과 사탄의 역사가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영원한 뜻의 목적과 방향에 일치된 생애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선한 편을 어떻게 남기느냐 하는 것과 악을 어떻게 퇴치시켜 버리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뜻의 길이라고 할 때, 그 뜻이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을 향해서 갈 수 있는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목적하는 바가 멀면 멀수록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향, 그 목적과 일치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방향을 맞춰 나가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 목적이 멀면 멀수록 그 방향이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한 뜻을 중심 삼고 가고 계신다면 우리 인간들도 그 목적을 달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과 우리가 가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개인이 땅 위에 와 가지고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또 생활을 통해서 목적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하루 하루를 남기느냐 못 남기느냐 하는 문제가 어디서 해결되느냐? 그 목적에 대한 확실한 관점을 세워서 거기에 적중되고 일치될 수 있는 방향을 어떻게 갖추어 나가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방향이 어긋나면 그 목적과는 상관없게 됩니다.
이 방향의 일치라는 것을 중심 삼고 볼 때, 그 목적과 나는 직선상에 서야 됩니다. 목적과 나는 언제나 상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직선상에서 그 목적을 대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과 직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직선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 탈선되어 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방향이 잘못되면 수고하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거기에 누구든지 협조하게 되면 협조한 만큼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소모가 되는 것입니다. 헛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는 하나님이 협조하실 수 없고 같이하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느끼는 모든 감각이나 동작이 하나의 목적을 중심 삼아 가지고 언제나 직선상에 귀일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목적을 상실하게 될 때는 뜻과 나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57-231)
2. 신앙자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바르게 해야
생애라는 것은 긴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서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를 거쳐서 노년시대까지를 말합니다. 그 과정이 생활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활이 그릇되게 될 때는 생애도 그릇된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생애를 남기려고 해도 하루하루의 생활이 그릇되게 될 때는 그 생애가 기필코 그릇된 결과에 도달한다는 사실은 어찌할 수 없는 결론인 것입니다.
이걸 두고 볼 때, 신앙자로서 제일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자기의 일생을 중심 삼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겠다고 맹세하더라도 그렇게 맹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르게 하루하루를 생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이어나갈 수 있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생애의 어떤 가치보다 더 중요시하지 않고는 보람 있는 생애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루를 무심코 시작하지만 그 하루가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뜻의 목적과 방향이 엇갈려 가느냐, 바로 가느냐 하는 놀음을 하는 하루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생각지도 않은 불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뜻의 길 앞에 반역자가 될 수 있는 일도 그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세분해 보면 한 시간의 권내에도 그런 일의 경계선이 좌우되는 것이요, 그 한 시간이나 한 분 혹은 한 초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 한 분 혹은 한 초가 잘못되면 방향이 영원히 엇갈릴 수 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가 오늘 하루보다는 한 시간, 더 나아가서는 한 분에 있고 한 순간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 하루를 중요시하는 것보다 한 시간을 중요시해야 되겠고 한 시간을 중요시하는 것보다도 한 분 혹은 한 초를 중요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침반은 남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쪽 혹은 서쪽으로 돌려놓더라도 그것은 남북을 향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자신도 하나님을 중심 삼고 남북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이 한 방향을 지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나침반을 동서의 방향으로 돌려놓으면 남북의 방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힘의 작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는 양심의 방향성이 있어서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으면 내적인 면에서 자기의 마음이 양심의 방향성을 따라서 돌아가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 작용이 뭐냐? 양심 작용입니다. 보다 순수한 자석으로 만든 나침반일수록 보다 남북에 일치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양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방향은 언제나 일치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매일같이 방향을 일치시킬 수 있는 생활을 그려 가야 됩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이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의 하루가 중요한 하루가 아닐 수 없고 한 시간이 중요한 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간의 경계선이라는 것은 하루나 한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 혹은 한 초라는 순간을 중심 삼고 선악이 판결되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영원의 가치를 하루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요, 하루의 가치를 한 시간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요, 한 시간의 가치를 한 분 혹은 한 초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변하고 환경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뜻에는 개인이 가야 할 뜻도 있고, 가정이 가야 할 뜻도 있고, 국가가 가야 할 뜻도 있을 것이요, 혹은 세계 온 인류가 공동적으로 가야 할 뜻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에 가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생활하게 될 때는 영원한 어떠한 뜻을 중심 삼은 생활로부터 영원한 생애가 시작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의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생활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한 순간에 벌어지고 우리 일생의 운명이 한 시간, 한 분, 한 초, 한 순간에 좌우된다고 할 때 우리가 사는 하루의 생활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한 번 호흡을 하고 한 번 동작하는 것도 뜻과 더불어 일치될 수 있는 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총을 쏘아 표적을 맞추려면 총 끝하고 타깃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앞의 가늠자와 끝의 가늠쇠와 타깃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엇갈리는 날에는 동서 사방으로 벗어납니다. 그런데 영원을 두고 표적을 맞혀야 된다면, 다시 말해서 출발한 것이 영원히 가 가지고 적중되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어렵겠어요!
우리 인간도 쏘아진 총알과 같이 일생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냐! 그럼,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하루는 어디로 가느냐? 내가 출발한 점과 결과의 점이 일치되느냐, 내가 해 나온 생활이 뜻의 방향과 일치되느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57-234)
3. 뜻의 출발점과 직선이 되도록 방향을 맞춰야 할 신앙자
인간들이 태어나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가야 할 방향들은 동서 사방으로 엇갈려 있습니다. 즉, 하나의 선을 중심 삼고 보면 천태만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출발점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출발하고 어떤 사람은 저기서 출발하면서 모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두고 볼 때 선과 일치되는 생애를 남기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 행로라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행로를 바로잡아야 됩니다. 본래 인간은 그 행로를 바로 가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도 그 행로와 일치하기 위해서 보아야 할 것이 원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럼, 코는 왜 있느냐? 그 직선과 언제나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방향을 잃지 않게끔 선두에서 리드하기 위해서 코가 있는 것입니다. 입은 왜 있느냐? 그 목적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 영양을 보급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오고 가느냐? 목적의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걸음걸이를 남기기 위해서 오고 가는 것입니다. 이 직선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 결과에 일치될 수 있는 점을 가리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이목구비와 사지백체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어야 할 내 자신이 거기에 일치되지 못하게 될 때는 아무리 내가 귀중하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무가치한 것으로 떨어져서 파탄되어 버릴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자신의 방향을 생각합니까? 자신은 의례 올바른 방향에 일치된 자리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가고 있다는 습관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인간들의 폐단입니다.
나침반과 같이 어느 만큼 각도가 틀렸는지 알아 가지고 자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작용을 하면 모르지만, 그러한 작용을 못 하게 될 때는 내가 고의적으로 그러한 작용을 해 가지고 방향을 맞추는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 세상의 인간들과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자의 생활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57-238)
4. 하나님과 인간이 일치되는 점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뜻 가운데는 완성한 개인이 있어야 됩니다. 뜻과 일치될 수 있는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뜻과 일치될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 가야 할 목적지는 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뜻 가운데 일치될 수 있는 세계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 인간 세상에는 평면적인 세계뿐만이 아니라 뜻 가운데 일치될 수 있는 평면적인 세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는 천주주의라는 말이 있는데 그 천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이냐? 수직선과 횡선이 90도로 일치될 수 있는 방향을 말합니다. 그것은 낮이나 밤이나, 옛날이나 현재나 미래나 마찬가지의 각도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든지 갖다 맞추더라도 90도에 일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런 생활을 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적인 존재요, 인간은 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종횡이 영원히 공존할 수 있는 그 점이 중심점인 것입니다. 중심이라고 하게 되면 반드시 수직선인 것입니다. 횡선에서는 중심이 없습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면, 그 하늘과 땅이 한 점으로 모이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위에도 하나밖에 없고 아래도 하나밖에 없는 것이 원칙인 것입니다.
이 하나의 점 가운데 개인이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점 가운데 가정이 서야 되는 것입니다. 다만, 범위가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점을 중심 삼고 개인이 있고, 가정이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팽이를 보면 , 아무리 무거운 팽이일지라도 돌기 시작하면 가벼운 팽이보다 더 잘 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인간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그 점은 하나님과 인간이 일치되는 자리입니다. 이상은 상대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혼자만으로 기쁨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상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 상대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남북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가 되는데, 어디에서 하나 되어야 하느냐? 정 중앙에 와서 만나야 좋은 것입니다. 정 중앙 그 자리에 임해야만 비로소 중심이 결정되어 이상적인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 이상적이냐? 평면적인 감각을 초월해 가지고 수직적인 세계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평(平)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중앙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을 중심 삼고 개인이 설 자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심점에 개인이, 부부가 서야 되는 것입니다. 국가도 조금 클 뿐이지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서는 자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 자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57-240)
5. 일치된 상대 없이는 이상 세계를 이룰 수 없다
하나님도 천국의 행로를 가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 개인을 따라가려고 하실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가정이 있다면 따라 나서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이 따라 나서시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개인은 이렇게 가야 된다.”는 표준이 있다면 그 표준대로 따라가려는 사람입니다. 또, “가정은 이렇게 가야 되는 것이다.” 하는 표준대로 틀림없이 따라가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나라는 이렇게 가야 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패턴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세계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표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없고 방향이 없는 혼란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무엇이냐? 중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 해와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아담 해와야, 하나님이 에덴 동산의 모든 과일을 다 따먹으라고 하더냐?” 했을 때, “아니올시다. 다른 것은 다 따먹어도 선악과라는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던 대답을 듣고 사탄이 “그것이 아니다.” 하고 중심을 부정한 것입니다. 악이 무엇이냐? 중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방향을 엇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57-246)
6. 목적은 완전한 중심의 자리에서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것
뜻의 길은 개인의 길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을 향해 갈 때 내가 중심, 즉 주체라면 목적이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언제나 직선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 목적과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주체는 대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대상은 주체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출발은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출발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그 둘은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져서 결국에는 하나됩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는 목적이 있어요? 여러분이 가는 그 길이 개인을 위한 목적이면 가정도 그 목적을 위해서 가야 됩니다. 개인의 목적을 부정하는 가정은 없습니다. 개인의 목적을 살리는 가정입니다. 민족의 목적은 가정의 목적을 살리는 것이요, 세계의 목적은 국가의 목적을 살려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은 세계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 주는 것이 되어야 이상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가정이요, 가정의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국가요, 국가의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세계요, 세계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영계요, 천상 천하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운데는 세계의 중심도 들어가 있고, 나라의 중심도 들어가 있고, 가정의 중심도 들어가 있고, 개인의 중심도 들어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절대적인 주체가 되실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절대적인 주체가 되실 수 없습니다.
참된 개인이 가는 길은 가정과 직통하고, 세계가 가는 길은 영계와 직통합니다. 그러므로 내 개인이 가야 할 뜻의 길과 방향이 일치되는 패턴이 있어야 됩니다. 가정은 어떻게 가야 된다는 패턴도 있어야 합니다. 국가는 어떻게 가야 된다는 패턴이 있어야 되고, 세계는 어떻게 가야 된다고 하는 원칙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원칙은 지금의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 원칙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57-249)
7. 통일교회는 사랑을 중심 삼고 방향을 맞춰 나가자는 교회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뜻의 길을 가려내자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뜻의 길을 알지 못하고는 통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뜻의 길을 어떻게 가야 되느냐? 그 표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 표준을 누구로 잡느냐? 하나님을 표준으로 잡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대표적인 사람을 표준으로 잡아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면 그 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몸을 닮고, 마음을 닮고, 사랑을 닮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닮으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는 길은 이래야 된다.”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역사상에 대표적인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랑을 이루려고 다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혼자서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죽으면서 신랑과 신부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이 성취되는 그 날 이 땅 위에 소망의 가정과 나라 그리고 세계가 연결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고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로 나가는 데 있어서 그 방향이 엇갈리지 않고 언제나 중심과 일치되어 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57-253)
8. 선이 가는 공식적인 노정
선은 남을 위하는 데서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존재가 상대를 위하는 데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은 가정을 바라고 나가야 됩니다. 가정은 종족을 바라고 나가고 종족은 민족, 민족은 국가, 국가는 세계를 바라고 나가야 됩니다. 그 안에는 개인이 있고, 가정이 있고, 종족이 있고,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전부가 하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이 가는 공식적인 노정입니다.
우리가 하루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그 하루는 1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생애의 중심을 세우기 위해서 생활하는 것이요, 생명의 중심을 확정 짓기 위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생애의 방향을 엇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생활은 하루하루의 활동을 통해서 쌓아지는 것이요, 그것이 올바로 쌓아지지 않게 될 때는 생애도 엇갈리게 됩니다. 생활과 생애는 다릅니다. 생애는 일생의 전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고 생활은 하루, 한 시간, 일분 혹은 일초를 두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57-258)
9.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천도의 길을 가야
지혜로운 자는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때를 맞이한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맞추는 사람입니다. 때를 맞추는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때를 맞추기 위해서 모험을 하고 생명을 내놓고 대드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천도의 가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중심의 방향을 따라서 1분, 1초를 직시하면서 가야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깜박거리고 숨을 쉬고 일체를 중심의 방향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먼길을 하루 종일 가거나 달리고 나서 처음으로 쉬게 될 때도 “뭘 하고 왔나?” 생각하고, 눈만 뜨고 있으면 뜻의 길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쉬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그렇지 않다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중심과 방향을 맞추기에 온갖 신경을 집중시키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 탈선될지 모를 위험천만한 현실인 것을 알고 뜻을 위한 생애를 시정해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말씀드렸습니다. (57-281)
첫댓글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