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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열차-남인수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一 밤차는 가자고 소리 소리 기적소리 우는데 옷소매 잡고서 그 님은 몸부림을 치는구나 정 두고 어이 가리 애처로운 이별 길 낙동강 굽이굽이 물새만 운다 눈물 어린 경부선
二 떠나는 가슴에 눈물 눈물 서린 눈물 고일 때 새파란 시그널 불빛도 애처로운 이 한밤아 마지막 인사마저 목이 메어 못할 때 쌍가닥 철길 위에 밤비만 젖네 울고 가는 경부선
三 아득한 추풍령 고개 고개 눈물고개 넘을 때 희미한 차창에 그 얼굴 떠오르네 비치네 기차도 애처롭게 허덕지덕 달릴 때 새빨간 님의 순정 가슴에 젖네 비 내리는 경부선
尹奉吉
생몰년도: 1908년-1932년 호: 매헌(梅軒) 활동분야: 독립운동 다른 이 ; 윤우의(尹禹儀)
생애와 업적 “文夫出家生不還(장부가 집을 나가니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겠다),"
스물세 살의 청년 윤봉길은 자신이 써놓은 일곱 글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아내,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과연 이 길밖에 없는가. 그 동안 해왔던 것처럼 농촌운동을 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 아닌가.
어려서부터 성정이 남달리 굳세고 물러서는 법이 없었던 윤봉길은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나와 한학을 공부했다. 오치서숙(烏峙書塾)이라는 서당에서 매곡(梅谷) 선생에게 사서삼경을 배우면서 한편으로 〈동아일보〉 등의 신문과 《개벽》등의 잡지를 통해 생각의 폭을 넓혀가던 그는“무식이야말로 왜놈보다 더 무서운 현실의 적이다 라는 깨달음 속에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야학을 열고《농민독본》이리는 책을 직접 써서 농민들을 계몽했으며,부흥원(復興院)을 조직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다. 또한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했으며,건강한 신체단련을 위해 수암체육회를 만들기도 했다.
고향 마을에서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차츰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던 무렵 그를 찾아온 낯선 타지 사람이 있었다. 김좌진 장군 휘하의 대한독립군 공작원 이흑룡이라고 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국내외 정세와 민족의 앞날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에도 이흑룡은 가끔씩 윤봉길을 찾아 국제정세며 독립군의 활약상등을 전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흑룡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윤 동지처럼 의기가 넘치는 열혈청년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뜬눈으로 날을 밝히며 고민하던 윤봉길은 마침내 중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시대적 수난을 감수하고 민족 전체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좁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1930년 3월 5일 새벽,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의 고향집을 빠져나와 신의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흑룡을 만나기로 했는데 일은 처음부터 여의치 않았다 가는 도중 기차 안에서 거동수상자로 연행돼 45일간이나 선천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풀려났고,어렵게 다시 연락이 닿은 이흑룡,그리고 신의주에서 만난 김태식 • 한일진과 함께 만주에 무사히 도착하지만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당시 독립군 내부는 크게는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고,작게는 소소한 파벌들이 엇갈리며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유랑의 시간을 보내던 윤봉길은 1931년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함께했던 동지들도 각자의 길을 선택한 뒤라 누 구한사람 그를 알아보며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나를 맞는 사람은 없었으나,목적지에 온 것만으로도 무상으로 기뻤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때로는 날품팔이의 막일도 하고 공장에 직공으로 다니기도 하면서 독립운동 관계지 들과의 접선 길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상하이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어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로 김구를 찾아가 인사를 했지만,확실한 신분 소개가 없는 그였기에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러다 안중근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자기 소개를 하고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안공근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그의 소개로 동포실업가박진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지만,가슴속 깊이 큰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시적인 생활의 안정에 만족할 수 없었다. “조선독립을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이곳 상하이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이 울컥 울컥 솟아올랐다. 그때마다‘서두르지 말고 초조해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보자’는 안공근의 위로와 격려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기사에 강한 충격을 받은 그는 박진에게 부탁해 김구와의 역사적 만남을 갖는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토해냈다.
“선생님,저는 제 마음속에 사랑의 폭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의 몸과 마음속의 폭탄을 조국독립에 써주시기 바랍니다"
“윤 동지야말로 하늘이 내게 보내준 사람이오. 내 지금 일을 도모하려 해도 사람이 없어 낙심하던 차에 윤 동지 같은 젊은이를 만나니 천군만마를 한꺼번에 얻은 기분이오"
김구의 대답이었다.
뜻을 함께하기로 한 김구와 윤봉길이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어느 날,윤봉길의 시선이 펼치던 신문에 꽂혔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이날 일본 본토는 물론 조선 • 만주 • 대만 • 상하이 등지에서 대대적 경축행사가 열린다. 더구나 상하이에서는 천황 생신 경축에 더하여 일본군의‘상하이사변 승전 축하행시 까지 겸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경축식장은 홍구공원,일본인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며 참석시엔 도시락 1개와 물통을 휴대할 수 있다고 했다.
그 길로 김구에게 달려간 윤봉길이 말했다.
‘선생님,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건 저에게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바로 이날을 위해 일편단심 사랑의 폭탄을 마음속에 품고 이역만리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김구와 윤봉길은 손을 맞잡았다. 한 순간의 흥분이 지나자 김구는 윤봉길에게 다시 물었다.
“정녕 그 일을 할 작정이오?"
스물다섯 살 열혈청년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제 목숨은 이미 조국에 바치기로 약속된 것 아닙니까?"
특수 폭탄을 제작하여 폭발실험까지 마친 뒤 윤봉길은 정식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입단선서를 하고,신변 정리를 위해 유서와 자서약력, 그리고 시 몇 편을 남겼다.
그리고 4월 29일 촉촉한 봄비가 내리던 홍구공원으로 들어섰다.
정문을 통과할 때 중국인 수위가 입장권 제시를 요구하자 유창한 일본어로“나는 일본인이오,입장권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이오”라고 대답한 뒤 유유히 정문을 지났다.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지닌 채였다. 목표물로부터 5미터 정도까지 접근한 그는 모든 참석자들이 해군 군악대에 맞춰 일본 국가를 부르던 순간 물통 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식단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식단 중앙에 명중한 폭탄의 요란한 소리는 홍구공원을 뒤덮었다. 또 하나의 도시락 형 폭탄을 집어 들던 윤봉길은 곧 팔다리가 붙잡히는 몸이 되었지만,그의 입에서 나오는 절규는 아무도 막지 못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1"
윤봉길의 수류탄에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 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의거 직후 윤봉길은 옆에 있던 사복경비원에게 붙들려 헌병에 인계되었고,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1월 18일 일본에 호송되어 12월 19일 총살당했다.
평 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로 꼽히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 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하이 의거는 1920년대 이후 침체 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초기처럼 임시정부가 전체 독립운동계의 구심적 위치를 회복케 했으며,이후 독립운동 3,1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외교적 성과를 올렸으며, 한중 연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사람들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취급하던 중국 인사들이 이 사건 뒤 독립운동가들을 돕기 시작했으며, 임시정부에 대해 동전 한푼 지원 하지 않던 장제스가 김구와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약하기도 했다. 장제스는“중국의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 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며 극찬했다.
한편,“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 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난 어린이가 갚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 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라고 있는 것이오”라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윤봉길에 대한평가가《도왜실기》에 실려 있는데,당시 윤봉길 의거에 대한 임시정부 측 인사 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作成者 黃圭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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