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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년 내내 대리모들의 성탄>의 줄거리: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 중에 '남자의 임신'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으로 보자면 '남자의 임신'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즉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임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임신의 양상이 대리모의 임신과 같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대리모와 마귀의 대리모로 나뉠 뿐이지요. 하나님 대리모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의 비유가 바로 처녀 마리아의 잉태입니다.
일 년 내내 대리모들의 성탄
(예레미야 30:1~24)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6.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어찌하여 모든 남자가 해산하는 여자 같이 손을 자기 허리에 대고 모든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졌는가
7.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9.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일 년 내내 대리모들의 성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일 년 내내 대리모들의 성탄’
대리모 임신은 불임부부가 제3의 여성으로 하여금 임신하여 태아를 출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리모 임신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리모의 난자를 이용해서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을 했을 경우에는 이 여성이 친권을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불임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진 수정란을 대리모에게 이식해서 아이를 낳았더라도 아이를 주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법적으로 소송을 걸면 엄마라는 정의 자체가 논란이 됩니다. 엄마의 정의를 유전자를 근거로 확정할 것인지, 임신과 출산을 기준으로 확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임부부의 수정란을 이식해서 낳았더라도 장애아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의뢰한 부부가 아이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대리모 임신에 대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처음부터 대리모로 창조되었습니다. 본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임신은 여성의 전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남자도 여자도 대리모입니다. 마음의 임신을 통해 출산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의 임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계획한다, 구상한다.’라는 말을 씁니다. 보통 이런 말을 쓸 때에는 착상(着想)이 떠올랐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신할 때에 수정란이 자궁에 붙는 것을 착상(着床)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발음이 같고 의미가 다르지만 영어의 경우에는 의미에서도 일치합니다. 생각이 떠올랐을 때의 착상(着想)과, 임신을 의미하는 착상(着床)을 모두 ‘컨시브(conceiv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감정이나 의견을 마음에 품는 것에 대해서 conceive를 사용하고, 생각이나 계획이나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에도 conceive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자가 임신하는 것도 conceive로 표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임신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생각이 떠오르면 마음에 임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대리모로 지으셨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에서 살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는 것은 곧 아담이나 하와가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삶에서 판단 없이 살 수는 없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판단이 주어지면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눈덩이를 굴려가듯이 좋고 나쁨을 기초로 해서 생각이 커져갑니다. 이렇게 커져가는 생각은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가 10개월 간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이 형성되면 말이나 행동으로 출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내가 낳은 아기입니다.
타락 전에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며 살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생각이 무르익어서 말과 행동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씨가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말과 행동으로 출산되는 대리모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좋고 나쁨을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스로 판단한다는 말에는 감추어진 배후가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에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삶을 출발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의 가치관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가치관은 부모를 통해서 친구들을 통해서 문화를 통해서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판단은 이루어지고 생각이 형성된 결과 말과 행동이라는 아기를 출산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의 씨를 품었으니 세상적인 가치관의 아기를 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생각하고 말과 행동으로 출산하는 대리모가 아니라, 마귀가 좋아하는 대로 이 세상의 가치관에 입각한 판단으로 생각을 통해 말과 행동을 출산하는 대리모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징계와 심판에 대한 예언이었는데 30~33장은 위로의 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분위기가 바뀝니다. 시대적으로는 남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갈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로에서 해방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땅의 가치관으로부터 해방시키실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깊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이를 ‘남자의 임신’이라는 있을 수 없는 비유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 간단히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 본문은 아직 포로로 잡혀가지도 않았는데 포로에서 해방 될 것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은 징계와 심판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징계와 심판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려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어찌하여 모든 남자가 해산하는 여자 같이 손을 자기 허리에 대고 모든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졌는가’라고 하시며 이들의 모습이 마치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에 산통으로 인해 배를 움켜쥔 모습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구조적으로는 임신할 수 없는 남자를 통해서 해산의 괴로움을 일컬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이라면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가지게 되는 마음의 임신 때문입니다. 마음의 임신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해산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해산의 괴로움은 하나님의 대리모가 아니라 마귀의 대리모이자 세상의 대리모가 되어버린 결과입니다.
마음의 임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마리아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처녀 마리아의 임신은 모든 선민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할 가장 전형적이고 완벽한 모습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처녀 마리아의 임신은 생물학적으로는 원인이 규명될 수 없는 기적이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신체적 잉태의 상태는 또한 가장 온전한 마음의 임신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왕 다윗을 섬기리라’고 한 것은 앞으로 오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이방의 포로가 된 선민은 세상의 가치관에 포로가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섬기게 되고 해방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해방의 선언과 성탄의 메시지가 맞아 들어가는 중에 마음의 임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은 처녀 마리아의 임신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을 보면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처녀 잉태의 가장 큰 특징은 맥락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특징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임신은 하나님께서 선민의 나라를 멸절시키시는 것처럼 싫어하십니다. 마귀의 대리모, 세상의 대리모가 되는 이유는 바로 처녀 임신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맥락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것처럼 너무 뜬금없는 임신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맥락이 있는 임신이 이루어집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생겨납니다. 이런 임신이 이루어지는 마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 맥락 없는 임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임신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마음의 임신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올바른 임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연관성이 없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뜬금없고 맥락 없고 이유 없는 임신이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의 대리모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의 전문가입니까? 그렇지만 선민은 전문가의 지식을 통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임신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결과로 얻게 된 풍부한 경험에 의한 생각이라면 맥락이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 삶의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떠오르는 생각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연관성과 이유를 찾을 수 있고 맥락 있는 생각을 키워서 말과 행동으로 출산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선민들의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로 들어 설명을 드려봅니다. 지금 저는 십자가 복음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밴쿠버에서 목회를 할 때에 부교역자들과 회의를 하는 중에 우연히 화상채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화상채팅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핸드폰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저의 별명이 컴맹이었을 정도로 IT계통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화상채팅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고 깨닫게 된 순간 떠오른 생각이 지금 십자가 복음방송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던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으로 방송을 한다고 하니까 몇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방송국에서 일하시던 분이라 그런지 대규모의 촬영 설비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작은 방에 카메라 한 대와 컴퓨터를 놓고 송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제게 어떻게 먹고 사는지를 물으십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설교를 해도 목사님의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교인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도 제가 목회를 안 하는 것을 가슴에 한이 맺혀하십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활동을 하겠지만 목회 차원에서 제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뜬금없이 화상채팅으로부터 이 방송에 대한 생각을 착상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화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통화를 할 수 있다면 대화 대신 설교를 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하던 2004년에는 인터넷으로 설교방송을 하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방송 전문가가 아니었던 제가 아무 맥락 없이 생겨난 인터넷 방송에 대한 생각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있어서 전문가의 지식이나 경험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전문가는 전문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과 지식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잘하든 못하든 설교를 하는 전문가입니다. 이런 제가 설교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설교가 인간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박사나 석학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인간이 책을 통해서 얻는 지식의 한계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자들이 진정한 박사이고 석학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을 자부하기보다는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경험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도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녀나 배우자에 대해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경험입니다. 나 자신 하나 건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경험자의 태도입니다.
베테랑 운전자는 초보 운전자보다 더 많이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긴장하지 않음으로써 더 조심할 수 있게 된 사람이 베테랑 운전자입니다. 운전대를 잡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대리모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툭툭 떨어뜨려주시는 판단을 통해서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출산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타락 후에 사람은 마귀의 대리모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통해 판단을 얻음으로써 근본이 없는 사생아를 낳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 비유에서 나타난 것처럼 모든 사람은 세상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일찍이 애굽에서 포로 생활하던 시절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건강 돈 인기 명예 명품 등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치관에 사로잡힌 판단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마귀가 좋아하는 아기를 낳으며 살아가는 셈입니다. 하늘의 씨를 잉태하고 출산하지 못하고 마귀가 기뻐하는 근본 없는 것들을 잉태하고 출산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근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붙잡고 계십니다. 제가 화상채팅이라는 난데없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십자가 복음방송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과정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느낍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순자 책을 처음으로 접한 이후로 차례로 공자 노자 맹자와 불교의 반야심경 금강경과 성경을 비교하며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에서 제가 이러한 맥락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맥락을 이어가시며 지금 십자가 복음방송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세상의 맥락에서 비롯된 임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판단으로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9절에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고 하였습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서 결혼하고 아기를 낳게 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여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곧 그 대상으로 인해 기쁨과 만족이 주어진다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좋아하는 방법이 본문에서 다윗이 상징하는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에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일에 매진하는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지속 될 때에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는 것처럼 세상과는 연관성이 없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판단이고 생각이고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세상과의 인과의 고리가 끊어진 맥락 없는 말씀을 잉태한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맥락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영역의 전문가라면 먼저 그 전문가라는 사실에 대해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전문가 됨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그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주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자라도 그 경험에 대해 죽을 때에 하나님의 생각은 임신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평생 설교를 해온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설교가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해왔던 설교에 대한 전문가로써의 생각이 죽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생각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임신할 때에만 올바른 성경 해석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의 방법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러나 특별한 방법이나 법칙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보자면 매번 우연히 발견하는 것과 같은 맥락 없는 상황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생각을 주시지 않으면 설교해야 되는 본문을 해석 할 수 있는 핵심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계속 세상에 대해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맥락이 끊어지면, 하나님께서는 순간마다 필요한 생각을 주십니다. 내 인생을 이어가기 위한 맥락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맥락을 이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절된 순간마다 떨어뜨려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말과 행동이라는 아기를 낳으며 살아가는 대리모가 되면 됩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이 성탄의 의미가 오늘 본문 예레미야 30장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어서 세상과의 맥락을 끊어내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세상의 인과의 고리가 끊어진 임심을 했던 것처럼, 우리가 낳는 말과 행동의 아기가 온전히 하나님이 주신 씨에 의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식들을 낳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주신 판단으로 인한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해 오늘도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게 하시고, 마리아가 세상의 인과의 고리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하나님의 대리모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