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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志于學士최동군
哀公問社於宰我 (애공)이 (문사어재아)한대 |
The duke Ai asked Zai Wo about the altars of the spirits of the land. <애공(哀公)>이 <재아(宰我)>에게(於) <토지신(社)>(을 상징하는 신목(神木)나무)에 대해 물었다(問). |
哀(슬플 애) 公(공평할 공) 問(물을 문) 社(모일 사//토지신) 於(어조사 어) 宰(재상 재) 我(나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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宰我對曰 夏后氏 以松 (재아대왈 하후씨)는 (이송)이요 殷人 以柏 (은인)은 (이백)이요 周人 以栗 (주인)은 (이율)이니 曰使民戰栗 (왈사민전율)이니이다. |
Zai Wo replied, "The Xia sovereign planted the pine tree about them; the men of the Yin planted the cypress; and the men of the Zhou planted the chestnut tree, meaning thereby to cause the people to be in awe." <재아(宰我)>가 대답(對)하여 말하기를(曰), <하후>씨(夏后氏)는 소나무(松)로써(以) <은>나라 사람(殷人)은 잣나무(柏)로써(以), <주>나라 사람(周人)은 밤나무(栗)로써(以), 백성(民)들로 하여금(使) 두려워하게(戰栗, 전율하게) 함을 말합니다(曰). |
宰(재상 재) 我(나 아) 對(대할 대) 曰(가로 왈) 夏(여름 하) 后(임금 후) 氏(성씨 씨) 以(써 이) 松(소나무 송) 殷(은나라 은) 人(사람 인) 以(써 이) 柏(잣나무 백) 周(두루 주) 人(사람 인) 以(써 이) 栗(밤 율//두려워하다) 曰(가로 왈) 使(부릴 사) 民(백성 민) 戰(싸움 전) 栗(밤 율//두려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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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聞之曰 成事不說 (자문지왈 성사불설)하며 遂事不諫 既往不咎 (수사불간)하며 (기왕불구)로라 |
When the Master heard it, he said, "Things that are done, it is needless to speak about; things that have had their course, it is needless to remonstrate about; things that are past, it is needless to blame." 공자(子)께서 그것(之)을 듣고(聞) 가라사대(曰), 이미 이루어진 일(成事)은 더이상 (들추어) 말하지 말며(不說), 돌이킬 수 없는 일(遂事)은 더이상 간언(충고)하지 말며(不諫), 지나간 일(既往)은 더이상 탓하지 마라(不咎). |
子(아들 자) 聞(들을 문) 之(갈 지//어조사,대명사) 曰(가로 왈) 成(이룰 성) 事(일 사) 不(아니 부(불)) 說(말씀 설) 遂(따를 수) 事(일 사) 不(아니 부(불)) 諫(간할 간) 既(이미 기) 往(갈 왕) 不(아니 부(불)) 咎(허물 구//꾸짖다) |
八佾-21 더 이상의 인신공양을 막은 것은 제갈공명의 만두(饅頭)였다.
팔일편 제21장은 토지신인 사(社)에 대한 이야기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땅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유교권 문명에서 한 국가를 건설할 때 반드시 따라야 했던 규범 중의 하나로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해서 궁궐의 좌측(동쪽)에는 <역대 국왕들 및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를, 그리고 우측(서쪽)에는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세웠는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단>과 곡식을 신을 모시는 <직단> 이렇게 두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곡식의 신> 보다는 <토지의 신>이 훨씬 서열이 높다. 그래서 <토지의 신>에게는 예로부터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낼 때 특별한 제물을 바치는 데 그것이 보통의 희생양이 아니라 바로 산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양이었다.
잠시 춘추좌씨전 희공 19년(BC 641)의 기록을 살펴보자
> 夏宋公使邾文公(하송공사주문공) : 여름에 송(宋)나라 양공은 주(邾)나라 문공으로 하여금
> 用鄫子于次睢之社(용증자우차휴지사) : 증(鄫)나라 임금을 사로잡아 차휴의 토지신(社)에게
희생물로 바치게 하여
> 欲以屬東夷(욕이속동이) : 그것으로 동이족 오랑캐를 놀라게 하여 복종시키려 했다
이런 전통은 계속 이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신공양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팔일편 제21장에 등장하는 노나라의 애공(哀公) 역시 토지신에게 인신공양을 한 후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공자의 제자인 재아에게 물어보았는데, 직접적으로 인신공양에 대한 부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토지신에 대한 것을 물어본 것이다.
이에 재아는 곧이 곧대로 대답했는데 그 내용이 "예전부터 토지신의 상징으로 신목(神木)을 심었는데, 하후씨의 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은나라에서는 잣나무를, 그리고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신목으로 삼았다. 그런데 주나라가 밤나무를 신목으로 교체한 이유는 밤 율(栗)자가 전율(戰栗)케 한다는 뜻으로도 쓰임에 따라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목적이 있다" 고 대답을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아가 너무 위험한 발언을 했고, 또한 앞으로 더 위험한 수위에 도달할까 걱정되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왈부 하지마라>는 뜻을 3번씩이나 다른 표현으로 바꿔가면서 나타낸 것이다.
아무튼 인신공양에 대한 부분도 동서양의 고대문명에서는 공히 존재하고 있었다. 일단 중국의 경우만 살펴보면 3세기 초반까지는 변방지역을 중심으로 인신공양의 풍습이 간간히 내려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설 삼국지에는 칠종칠금 고사의 유래로 유명한 공명의 남만원정 부분에 인신공양 이야기가 나온다.
촉나라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인 남만(南蠻)의 맹획(孟獲)을 치고 본국으로 돌아올 때 여수(濾水)에 이르렀는데 풍파가 심해서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한 부하가 남만의 풍습에 따라 사람 머리로 물귀신에게 제사를 올리자고 하자 공명이 생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여 양고기를 밀가루로 싸고 만인(蠻人)의 머리(頭)처럼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더니 풍파가 가라앉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본래 만인의 머리를 뜻하던 만두(蠻頭)는 인신공양을 대신하는 음식이었으나 후에 만(蠻)과 만(饅)의 음이 같아서 만두(饅頭)가 되었다고 명나라때의 저작물 망수유고(亡修類稿)는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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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자에 대해 좀 더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논어연재는 여기서 잠시 쉬고
대신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공자세가> 부분을 가지고서 공자의 일생을 정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