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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청 기독신우회 메시지
일자: 2023년 7월 12일 수요일
제목: 예수님의 꿈, 제자들의 꿈
성경: 누가복음 24:20~21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설교 목적:
예수님의 꿈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전수되었을까? 제자들이 전수받은 예수님의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두 꿈은 어떤 점에서 같으며 어떤 점에서 다를까? 그 꿈은 오늘 우리의 꿈과 어떤 점에서 같으며 또는 어떤 점에서 다를까?
이 설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새롭게 이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사도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설명함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설교 개요:
1.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바란 것
2. 속량된 이스라엘의 영광
3.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깨달은 것
5. 기독교 신앙의 핵심, 부활신앙
1.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바란 것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그들은 가족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도 대단한 결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가족이나 주변의 만류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실 성동구청 신우회 수요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대단한 결단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자신의 시간과 인생을 바치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할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더 큰 헌신과 결단에는 더 크고 간절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실망하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사람을 만나 왜 그렇게 실망한 얼굴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심정으로 대꾸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그 두 제자 중에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누가복음 24:19~21
예수님의 제자 글로바의 대답을 보면, 그 제자가 바란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속량해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기를 바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노예를 해방시켜 줄 때 그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주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풀어주실 것이라고 제자들은 바랐습니다.
제자들의 이 대답에는 그들이 왜 예수님을 따랐는지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이므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속량(贖良)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그토록 대단한 결단을 헸을까요?
이스라엘이 속량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렇게 풀려난 히브리 노예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위한 제사장이 되는 영광스러운 특권이자 임무였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모델이 되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신명기 15:15
그런데 그토록 빛나는 언약을 가진 민족이 훗날 다시 또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 이유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렸기 때문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봉사할 제사장의 나라가 열국의 비방거리가 되고 이렇게 미약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암송한 유대인들이라면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속량해 주실 것을 바라고 또 바랐을 것입니다.
예언자들도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3, 7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 이야기와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일을 맡기시려고 하나님이 택하신 분을 성경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속량하셔서 다시 온 세상의 모델민족이 되게 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고 확신했기에 지금껏 예수님을 따른 것이겠지요?
2. 속량된 이스라엘의 영광
그러면 이스라엘의 속량이 무엇이기에 제자들은 그토록 그것을 바랬을까요? 자기 민족이나 가문, 또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삶의 태도와 자세가 다릅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 속에 자기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일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고 장차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적부터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에서는 역사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과거와 조상들의 이야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과 시대적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성경이야기를 배우고 암송하며 자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은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들은 이 자부심을 몸에 새겼습니다. 그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그들은 시간의 이정표가 되는 곳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과 맥추절과 추수절 등입니다. 그 절기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부르시며 구원하신 일을 기억하기는 시간입니다. 그냥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음식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먹으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를 몸에 새기고 음식으로 기념하고 절기준수를 통하여 시간의 여정마다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란 이스라엘의 속량은 다시 과거의 빛나는 영광을 회복하고 열국의 모델이 되고 빛이 되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래 전에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을 얻었지만 그 후에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이 그들을 짓밟았고, 이제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탈과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백성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과거의 빛나는 역사를 몰랐다면 그러려니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기에 이스라엘의 갈망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장봉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보려고 극단적인 열성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자신의 속량을 바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속량된다면 아브라함의 언약처럼 천하 만민에게 복을 줄 수 있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나라들과 민족들은 시온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예물을 들고 동서사방에서 몰려올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온 세상의 중심이 되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하늘문이 열리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마침내 만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날에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열국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을 선도하여 하나님 앞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이런 일이 잠시 동안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궁궐의 위엄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열국이 예물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몰려왔으며 이스라엘은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과거에 비하면 제자들이 살던 시절은 정말 가련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형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제자들뿐 아니라 경건한 유대인은 누구라도 이스라엘의 속량을 간절히 고대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이런 상황에서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께 열광한 까닭은 바로 이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속량은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며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메시아가 오셔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일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온 이스라엘이 나사렛 예수께 환호를 보내고 열렬히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며, 그것은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을 일으켜 만국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가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할 때 희년이 성취되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풀어주어 모든 사람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다시 임하는 세상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할 때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셔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성전으로 삼으셔서 거기 거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사귀시고 그 백성은 하나님과 사귀면서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그들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지금 그런 세상이 왔으니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병든 사람과 소외된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 안에서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고 더불어 기뻐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온 유대 땅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으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그 기대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셨으니 제자들의 실망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깨달은 것
모든 기대가 일순간에 사라진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모든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컸든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서 자신들 곁에서 걷고 계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먼 훗날에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의 말에는 부활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지를 보여주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3~24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부활에 대한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9
유대인들이 믿은 부활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날에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그 날에는 선인과 악인이 모두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마지막 날이 이르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부활할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유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주는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는 영인지 귀신인지 하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만져보라 하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아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또는 ‘이것이 무슨 뜻일까?’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솟아났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셔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과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메시아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상을 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아는 의인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사람이 죄와 욕심에 묶여 있기 때문임을 제자들은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묶고 있는 그 권세는 군대의 권세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권세였습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인데 그 권세 아래 갇힌 사람들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두려워하면서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는 것을 제자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해방되어야 할 것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사는 삶이며 그렇게 하여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사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었습니다. 그런 해방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가 하나님의 권세 아래 굴복하고 그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을 때 사람을 붙들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지고 무력화되었다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그와 연합하면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선포한 이 메시지는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에서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날에 일어날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께 시작되었으니 지금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면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마치 아담처럼 새로운 세상을 맡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게 하심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고 제자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이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은 시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편 110:1~2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만국을 통치하시며 교회와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돌로 지은 예루살렘성전에 계시지 않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신 제자들 공동체 안에 거하신다고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을 부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헤롯 왕이나 빌라도 총독이나 로마의 황제 같은 세상의 권세자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크고 위대한 권세 아래 자신들이 보호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듣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자신들 안에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 나라는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섬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 생명이 살아나고 기쁨이 샘솟게 하는 세상입니다.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지음을 받은 아담처럼 또는 하나님의 속량을 받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에 복이 되라고 구별된 백성이 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세상을 맡은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요 제사장이며 편지임을 확신했습니다. 온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확신이었고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5. 기독교 신앙의 핵심, 부활신앙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꿈을 받아들인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후에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깨닫고 나서 그 의미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며 오늘 우리에게 전수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구약성경에 면면히 이어온 하나님의 이야기 가운데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난 그림이었다는 점에서 성경 이야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할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시고 그 세상이 어떤 것인지 비유로 가르치셨고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품격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율법의 재해석을 통하여 설명하셨으며, 자신의 몸짓과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고 소외된 사람의 벗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모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예수님의 진심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언약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며 사회적으로는 무명한 사람들이었지만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칼과 창이 아니라 복음과 사랑으로 세상을 복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을 그렇게 열정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꿈이 제자들의 마음에 심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꿈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기독교 신앙은 오늘날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난 2천년 동안 이어져 오면서 오늘은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꿈을 배우고 그 꿈을 이해하고 기대하면서 우리 가운데에서 그 꿈이 실현되기를 소망하며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꿈은 성경 이야기 속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 꿈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나님의 성령이 일깨워주는 영감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기도와 예배 가운데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매주 수요일 점심 시간에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 그들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지나간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과 확신이 커질 때마다 교회는 더 큰 희망과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서로 섬기며 이웃을 축복하고 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왕자로 태어난 아이가 점차 자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수용할 때마다 왕의 품격을 갖추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질그릇에 보화를 담은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의 꿈을 배우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분발하여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