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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구원의 노래
일자: 2023년 6월 11일 주일
[요한계시록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설교 목적:
온 세상이 고요하다. 만물이 고요와 평화 속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새들은 노래하고 만물은 깨어난다. 다시 힘찬 하루가 시작된다. 그렇게 나날이 이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상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수없이 이야기한다. 그것은 인간이 위기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 위기는 전쟁과 갈등,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죽음의 위기다. 여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이 설교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정리한 것이다. 구원의 결과는 영생이라고 한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부를까? 하나님은 왜 교회를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실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흰 옷을 입고 부르게 될 영광의 찬송을 미리 부를 수 있는 감격을 마음에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다.
설교 개요
1.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도다!
2. 구원이 필요한 위기상황
3. 구원의 결과인 영생
4.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
5. 구원 사역의 동역자인 교회
1.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도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날이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즉시 도움을 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왜 잠잠하실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서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다면 좋겠는데 하는 안타까움에 부르짖어 기도도 해봅니다. 그래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 마음에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오기도 하고 ‘하나님이 지켜 주실 거야’ 하는 희망이 생기는 경험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어려운 시험을 만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그 고난을 이겨낸 사람 중에 욥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의 대명사는 욥입니다. 고난을 받아 힘들어하는 욥에게 엘리후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고통과 슬픔에만 빠져 있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욥이 엘리후의 권면을 듣고 나서 아마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글을 읽고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해 준 그 사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욥에게는 엘리후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욥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욥기 38~41장).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비로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모든 일들은 정말 크고 무거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비참함과 억울함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보니 그것들은 별것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과 다투거나 논쟁하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가르침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기 38:41). 하나님은 큰 나무 높은 곳에 사는 까마귀 새끼를 먹이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짐승이나 사람들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한평생을 선물로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흰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러 올려드리는 찬양이 나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9~10
요한은 환상 가운데 이 거룩한 무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하늘의 장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4절).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다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깨끗하게 씻은 사람들’입니다. 시편에서도 그 거룩한 무리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만물과 만민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일을 깨닫거나 경험하고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찬양을 합니다. 그들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택된 찬양단이며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입니다. 그 거룩한 백성의 찬양은 보통 삼부작(Trilogy)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 그리고 구원입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기 위해 선택받고 구별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2. 구원이 필요한 위기상황
이 세상에는 왜 구원이 필요할까요? 이 세상에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이 어그러지고 그 안에서 사는 만물이 고통 중에 신음하기 때문입니다(롬 8:22).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에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이 세상이 지금 ‘위기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위기상황인 세상은 어그러진 세상이며 약자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에 닿는 세상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려고 일어서십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의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런 날을 가리켜 성경은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부르거나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위기상황인 세상을 바로잡으실 때 행하시는 일들은 크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폭력과 보복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은 어른에서 아이들까지 번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이야기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전서 3:20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늘에 닿는 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한 부부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한 민족을 이루고 천하만민에게 복이 될 가정입니다. 그들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입니다. 바벨탑의 심판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애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이방인을 학대하고 그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 고된 노동을 시키고 영아살해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셨던 심판을 보면 정말 두렵고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특히 그 모든 일 중에서 홍해에 애굽의 모든 군대를 수장시키신 일은 정말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물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의 노래가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애굽기 15:1~2, 모세의 노래
이 세상에 구원이 필요한 때는 이 세상이 위기상황에 있을 때입니다. 출애굽을 경험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길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땅이 더러워졌습니다. 그 땅에서 고아와 과부들은 학대를 당하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억울한 소리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의 모습도 아니요 하나님이 거룩한 이름을 두시려고 구별하신 땅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그 백성들은 이방 나라로 다시 끌려가 괴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25절).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장차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오셔서 그의 집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위기상황에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위기상황은 그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생긴 '관계의 단절'입니다. 사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는 죽음 직전입니다. 그는 재물을 모았지만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고독한 부자입니다. 그것이 삭개오의 위기상황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인류는 고독이라는 위기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2018년부터 영국에는 고독부 장관직이 생겼습니다. 일본인들은 은둔형외톨이를 하키코모리라고 부르면서 거액의 재정을 투입하여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작년 2022년에 일본에는 146만명의 하키코모리가 있으며 그 중에 40대가 40%, 60대 이상이 25%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작년 한 해에만 2,115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사회적 취약계층을 돌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고독사가 증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부르는 싸이코패스적 범죄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단절과 소외의 문제는 사회를 위기상황으로 몰고가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가정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과 뒷담화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삭개오를 찾아가셨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자 삭개오의 반사회적 성향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개과천선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렇게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이 들려주는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 구원의 결과인 영생
가장 널리 알려진 성경구절 중에 하나인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 그것은 멸망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위기상황에서 멸망으로 빠지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얻게 되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영생(永生)은 한자로보면 영원한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은 없습니다. 태어나면 죽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삶이라는 영생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을 읽을 때 때때로 원어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그렇습니다. 영생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는 ‘헤 조에 아이오니온’이라고 합니다. 조에는 생명이며 아이오니온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이오니온은 ‘아이온’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함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고 하셨을 때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이온입니다. 현세와 내세를 말할 때 아이온을 사용합니다. 현세의 삶이 유한하다면 오는 세상의 삶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현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의 삶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는 세상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오는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열어주시는 삶입니다. 그것은 심판 이후에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므로 성경에서는 오는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엘 선지자에 따르면, 그 세상에서는 만인이 예언자급으로 하나님의 뜻에 정통할 것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하나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이사야 65:25).
현세의 삶에는 고독과 소외, 착취와 폭력, 증오와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는 세상에서는 화목과 평화, 친밀과 기쁨, 그리고 공존과 번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을 생명 가득한 땅으로 가꿀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라고 말했습니다(롬 5:17). 요한계시록에도 하늘의 환상 가운데 장로들이 부르는 어린 양을 찬양하는 노래가 나오는데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5:9~10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심판의 날에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처럼 새로운 삶을 받은 사람들은 노아의 여덟 식구이며 애굽에서 건짐을 받고 가나안 땅을 물려받은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의 다른 이름은 영생입니다.
신약성경의 표현으로 구원을 설명하자면 그것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이므로 하나님이 현세의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모습을 바로잡으실 때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의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요 5:24). 예를 들면, 삭개오는 현세의 삶에서 어둡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현세에서 배우고 익힌 삶이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충만하게 완성될 삶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외가 아니라 소통이며, 이기적 탐심이 아니라 더불어 공생하는 삶입니다. 그는 부지런히 일해서 자기도 공동체를 빛나게 하는 일원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동참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다시 태어난 삶과 같으며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의 삶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받는 구원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나오는 노랫말,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따라 가리라’(찬송가 436장)은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구원은 영생을 미리 맛보며 미리 누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영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멋진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가 받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아 누리는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이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지으실 때 인간에게 계획하시고 기대하신 바로 그 참 인간의 삶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고 점점 더 충만하게 누리는 삶,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까요?
4.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
설교 초두에 소개해 드린 흰 옷을 입은 성도들의 찬양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했습니다(계 7:10).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두려워하는 빌립보의 간수장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을 하나님과 어린 양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일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의한 자를 대신한 것으로서 그 결과 불의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될 때 거기서 얻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요? 시편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리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설명하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섬기면서 은혜를 맛보고 은총을 힘입을 때 우리는 점차 하나님을 알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는 기쁨이 생기고 삶을 새롭게 보고 이해하며 감사하는 관점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맛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이유는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표지판이 되십니다.
그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교회에 편지하기를 자신이 예수님을 표지판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 자신을 표지판으로 여기고 본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 11:1).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표지판으로 삼고 산다고 말할 때 아마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따라 살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권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편지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하면서 서로 겸손하게 섬기고 돌아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는 친히 자신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기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에 표지판이 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며 동시에 예수님의 본을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때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보고 들은 어그러진 이야기 대신에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배우고 꿈꾸고 희망하며 실천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맛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구원 사역의 동역자인 교회
오늘 설교의 본문은 거룩한 무리들이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들은 환난을 지나서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깨끗하게 씻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음을 알고 노래합니다. 구원은 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활동이자 개입이며, 그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모범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흰 옷을 입은 거룩한 무리는 깨끗한 행실로 상징되는 흰 옷을 입었고 하나님이 이루신 크고 놀라운 일을 찬양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피로 제사를 드렸다면, 새 언약의 제사장들은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항상 올려드리며, 구제와 봉사의 손길을 펴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3:15~16
거룩한 무리가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요한계시록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찬미의 제사를 지금 여기서부터 드릴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찬미의 제사와 선행과 나눔의 제사라고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신앙이 가장 발전한 형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고대에 신앙의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진실한 신앙인들은 점차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피의 제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존중하여 부르는 찬미의 제사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존중하여 선을 행하고 나누는 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가꾸는 일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외와 고독을 치유하며, 그들은 증오와 갈등을 치유하여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내며, 그들은 빈곤과 결핍으로 인한 비극을 치유하여 희망과 풍요를 일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이며 본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2인1조 전도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힘입어 구원받은 사람이 영생을 맛보며 살면서 그 기쁨과 유익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동시에 이웃을 돌아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선행의 제사를 드리는 것, 그것이 전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같이 식사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이미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늘의 찬양대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찬양과 은혜로운 나눔의 제사가 우리 교회와 우리가 사는 동네에 은은하게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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