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노은리고택 주변 노은동 마을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리고 엄찬고택 입구의 마을길을 따라 500여미터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를 방문했다
홍북면 노은리는 고려 공민왕 때의 최영 장군이 1316년에 출생한 영지이기도 하다.
노은리 삼봉산정에 있던 무민공 최영의 사우는 어느 때 철거되었는지 기록이 없고 1995년 말 삼봉산정에 사당을 재건축하였다.
최영 장군은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고려의 명장이다.
본관은 철원 동주-창원(昌原)이라는 설도 있음.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이고,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최원직(崔元直)이다.
최영의 집안은 5대조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이후로 대대로 문관에 오른 문벌 가문이었다. 그러나 최영은 젊은 시절부터 풍채가 당당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 무예를 즐겼다.
최영이 태어나고 활동한 시기의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틈만 나면 왕의 자리를 노리는 반란이 일어났다. 여기에 명나라에서 일어난 홍건적이 고려의 국경을 넘나들었으며, 일본의 내정이 불안하여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때 무인으로서 최영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었다. 고려의 영토를 유린하고 국경을 넘는 외적뿐만 아니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국정을 혼란스럽게 하는 내란이 일어날 때면 최영은 어김없이 관군을 이끌고 나섰다.
최영은 평소 우직하고 청렴결백하기로도 유명했다. 오늘날까지도 최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은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최영은 왕들의 신임을 받으며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국토 방위와 국정 안정을 책임진 최고의 명장으로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최영은 고려를 위협하는 전투마다 나가서 용맹을 떨치며 싸우는 한편, 전투가 끝난 후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각처에 구제소를 설치해 양식과 종곡을 주어 백성들의 농사를 장려했다. 또한 전사자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는 등 무장의 예를 다했다.
그러나 최영의 길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유력한 실력자로 부상한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아 한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다. 참소로 경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하지만 신돈이 실각한 후 다시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전과 같이 왜구를 쳐부수고 제주도의 반란을 토벌하며 고려를 굳건히 지켜 이름을 높였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연산(連山)에 침입했을 때 원수 박인계(朴仁桂)가 참패해 전사하자 최영이 직접 나섰다. 이때 왕이 최영의 나이가 60세의 고령임을 들어 말렸지만 결국 왕의 허락을 얻어낸 최영은 몸소 군을 이끌고 운봉(雲峰)의 홍산(鴻山)으로 행군해 왜구를 대파했다. 왕이 승전보를 듣고 기뻐하며 최영에게 시중의 직을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최영은 사양했다.
이후에도 최영은 왜구들이 무서워하는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는 별호로 이성계 등과 함께 왜구를 여러 번 섬멸했다.
우왕의 큰 신임을 받은 최영은 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388년(우왕 14)에는 수문하시중의 직에 올랐다. 그런데 이즈음 고려는 커다란 외교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본토에서 일어나 원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고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통고했던 것이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로 점거하고 설치한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이며, 공민왕 때에 이르러 최영이 출정해 회복한 곳이었다.
최영은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자, 우왕에게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백년 만에 겨우 회복한 영토를 순순히 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무장 최영의 생각이었다. 그는 명나라가 국가를 이룬 지 오래지 않아 힘을 겨룰 만하다고 판단했다. 우왕 역시 최영의 생각에 동조해 전국의 군사를 모집하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최영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명장의 이름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했다. 하지만 최영과 우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해 출정을 명했다.
선발대로 압록강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장마를 만나자 전쟁이 불가한 네 가지 이유, 이른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조정에 다시 회군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군을 재촉하였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명을 어기고 회군을 단행하고 말았다.
우왕과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온 최영은 이성계의 군대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회군 병력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최영은 결국 붙잡혀 유배에 올랐다.
떠오르는 명나라와 친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신진 세력 그리고 이성계에게 아직도 원나라와 친하게 외교를 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최영은 위로는 국왕의 신임을 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우러름을 받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리하여 결국 최영은 요동 정벌 실패와 함께 신진세력에 의해 그해 12월 참수되어 생을 마감했다.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적과 대치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했던 최영. 그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늘 승리를 쟁취했던 장군이었다. 요동 정벌의 실패로 몰락했으나 오로지 고려를 위해 무장의 도리를 다한 그는 확실히 고려 최후의 명장이었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무덤은 오랫동안 풀이 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요동 정벌 실패 후 유배되었던 최영이 개경으로 불려 와 참수되기 전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무리하게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며 권세를 탐한 죄'였다. 그러자 최영은 이렇게 말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내 평생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다. 만약 내가 평생에 있어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 그의 무덤에서는 1970년대까지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고려의 충신, 조선의 절신이 태어난 홍성의 노은 땅을 탐방하고 천안으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