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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0
고린도전서 2장 12절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함께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5: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기로 하시되, 참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그의 모든 은택들을 받는 자들만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20문). 이때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는 확실한 지식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는 견고한 신뢰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참된 믿음을 누가, 무엇을 통해 일으키시는가 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일으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믿음에 정의에 따라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할 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2문은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모든 내용은 사도신경이 잘 요약해 주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믿음을 정의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는 확실한 지식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는 견고한 신뢰라고 할 때 그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사도신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은 23문 이하 58문까지 사도신경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이어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을 참되게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으로서 칭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59-64문),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함을 베푸시고 전가시키셔서 마치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순종을 스스로가 이행한 것처럼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누가 일으키시는가?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통해 일으키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별히 복음을 통해 일으키십니다. 여기까지가 복음과 관련된 내용의 설명입니다.
이제 성례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5문을 보시면 복음과 함께 우리의 믿음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5문.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답. 성령으로부터 오는데(요3:5, 고전2:10-13, 12:3, 엡2:8-9, 빌1:19,29), 그는 복음 선포를 통하여(롬10:17, 약1:18, 벧전1:23-25)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행16:14), 또한 성례의 시행을 통하여 그 믿음을 확증하게 하십니다(마28:19-20, 고전10:16, 11:26).
일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전체 구조를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때 죄와 비참함은 율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모든 내용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도록 하시는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여 설명할 때가 있는데, 율법과 복음 자체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공로라면 복음에 대한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믿음과 관련해서 계속해서 설명하는데, 왜 믿음이 필요한지(20문), 믿음이란 무엇이고(21문) 그 믿음의 내용이란 무엇인지(22-58문), 그리고 그것이 주는 유익은 어떠한 것인지를(59-64문)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믿음의 출처는 어디인지를 말하면서 복음에서 성례로 넘어가게 되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된다고 할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으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키시고 믿음을 좀 더 확증하도록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방편이 무엇인가? 복음이요, 또한 성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2장 12절을 보시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인데, 그 말은 우리의 공로를 전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지난주 살핀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로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자들이었는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엡2:1).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엡2:2). 육체의 욕심을 따르며 지냈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할 뿐이었습니다(엡2:3).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런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습니다(엡2:4). 사랑할만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할만하지 않은데도 사랑하기로 하셨습니다. 작정의 내용으로 올라가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사랑하고자 하시는 자를 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누구를 통해 나타났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라고 말합니다(롬8:32).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까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면서 그 아들을 통하여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믿음까지 일으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금석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그의 은혜로 돌리느냐 아니면 일부든 전체든 우리에게 돌리느냐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핀 내용들은 칭의와 관련해 가톨릭의 공로 사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묻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왜 전부든 일부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가?(62문)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미래의 세상에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시는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이 아무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63문) 심지어 당신들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고 속되게 만들 수 있는데, 과연 그러한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참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가톨릭의 가르침처럼 우리의 공로를 일부라도 주장하려고 한다면,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과 같이 신인협력이라는 교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오늘 본문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과 선행에 대한 상급조차 성경은 은혜라고 말하는데,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공로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조차 공로가 되지 않기에 우리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믿음은 지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방편으로 믿음을 일으키시는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야고보서 1장 18절에서는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고 말씀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도 말씀합니다.
이때 읽어드린 성경 구절은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요리문답이 ‘복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율법 자체가 믿음을 일으키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율법은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알도록 합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통해 율법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런 우리를 복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만듭니다. 물론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율법과 복음은 대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이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율법 안에 복음의 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켜 그리스도와 그의 은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복음이 합니다.
특히 요리문답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킨다고 표현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 중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깨닫게 하심으로 믿음을 일으키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방식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입니다. 조금 전에 로마서 10장 17절을 언급했지만 13절 이하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어야 하는데, 믿음을 위하여 들어야 하고, 듣기 위하여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전하기 위하여 보내시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시는 자를 세워 그들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 복음을 듣고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특별히 복음의 선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요리문답의 경우 믿음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말씀의 선포, 복음의 선포를 말하고 있지만, 믿음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강화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말씀의 선포, 복음의 선포를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고 말씀하고 난 뒤 곧바로 베드로전서 2장에서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선포, 복음의 선포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 다시 말해 중생을 위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유지와 자라남, 그리고 강화를 위해서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말씀 사역과 관련된 직분을 말하면서 그들이 교회의 직분으로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복음의 선포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복음에 대하여는 이미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요약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이 참된 복음으로 있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복음이지, 우리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된다고 할 때 믿음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무엇을 방편으로 믿음을 주시는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본래는 돌 같은 마음이요 굳은 마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돌 같은 마음,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으로(겔11:19, 36:26) 믿음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는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례의 시행을 통하여 일으킨 믿음을 확증하시고 인치십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하나의 선언서라면 성례는 거기에 붙여지는 표징입니다. 복음이 선언서라면 성례는 거기에 붙여지는 신적인 뜻을 나타내는 인장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그의 말씀, 그의 복음을 통해 들려진다면, 들려진 바 그 말씀을 표와 인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이 성례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례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6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66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성례란,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인 치시고자 하는 의도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바 눈에 보이는 거룩한 표(標)와 인(印)인데(창17:11, 신30:6, 롬4:11), 복음의 약속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 한 번의 제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레6:25, 마26:27, 행2:38, 히9:7-8, 9:24, 10:10).
일단 성례라는 단어는 거룩한 예식 혹은 의식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말씀을 듣도록 하는 것이라면 성례는 볼 수 있도록 행하는 것인데, 어거스틴은 이런 점에서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요리문답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바 눈에 보이는 거룩한 표와 인이라고 설명하는데, 복음의 약속을 볼 수 있도록 표한 것이 성례요, 그것을 통해 복음의 약속에 대하여 신뢰할 만하다고 인치는 것이 성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좀 더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례를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고 우리에게 인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좀 더 분명하다는 것으로 복음 선포 없이 성례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례는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고 우리에게 인 치도록 할 의도로 제정이 되었습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들은 바를 눈으로 보게 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례는 그 자체로 행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복음의 선포가 앞서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성례에는 볼 수 있게끔 하는 표시가 있으며, 그런 표시를 통해 인을 치게 됩니다. 한 예로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할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신약의 세례의 의미와 같은데, 남자의 포피를 베는 것입니다(창17:10-11). 할례라는 표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할례는 마치 하나님의 인장과 같습니다. 말씀으로만 들려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볼 수 있게끔 하심으로 마치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와 인을 가리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고 또한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례가 표하고 인을 치는 것은 복음의 약속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 한 번의 제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베푸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때 성례를 제사처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례와 제사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우르시누스에 의하면, 첫째 본질에 있어서 다릅니다. 성례는 그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해 주는 예식인데 반해서, 제사는 예식일 수도 있고 도덕적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식으로서의 제사 외에 감사의 제사 혹은 찬송의 제사와 같은 표현들이 있는데, 이때 제사는 일체의 예식이 없이 하나님께 합당한 순종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도덕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성례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둘째 목적에 있어서 다릅니다. 성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덕들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종의 증거들입니다. 이런 차이는 성례와 제사의 정의를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성례는 그것이 나타내는바 실체들과 더불어 특정한 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혹은 성례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덕들을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바 순종과 예배를 그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혹은 목적을 갖고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례와 제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받으시는 것으로서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참고로 우르시누스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동일한 예식이 서로 다른 점에서 성례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세례와 성찬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베푸시는 것이요, 또한 그 속에서 우리에게 뭔가를 주시며, 또한 그 주시는 바를 우리에게 선포하신다는 점에서는 성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와 성찬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시행하는 점에 대해서만은, 혹은 우리가 이 상징물들을 마치 하나님의 손에서 받듯이 받아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종을 선포한다는 점에서만은 제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 제사라 표현하는 것은 감사와 찬송의 제사라는 의미일 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제사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제사는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속죄의 죽음을 위하여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셨고, 또한 우리를 속죄하기 위하여 친히 제사장이 되심으로 모든 것을 단 번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례가 제사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때 그것은 감사와 찬송의 제사일 뿐입니다.
이어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7문은 말씀과 성례의 공통점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차이점도 있습니다.
67문. 그러면, 말씀과 성례는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까?
답. 예,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제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복음 안에서 가르치시며 또한 성례로 확신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롬6:3, 고전10:16, 11:26, 갈3:28).
일단 요리문답은 말씀과 성례 둘 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향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 구원 전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제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복음 안에서 가르치며, 또한 성례를 통해 확신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말씀과 성례 둘 다 하나님께서 그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주체도 하나님이요, 성례의 주체도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교회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시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전해 주시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성례에서 사용되는 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때 사역자들은 표는 베풀 수 있지만 표가 나타내는 바는 결코 베풀 수 없습니다. 표가 나타내는 바는 오직 누구만이 베풀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만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 하는 것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비교입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를 통해 말씀을 전해 주시고 성례의 표를 베푸시지만, 그것으로 믿음을 일으키시고 강건케 하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이미 언급된 내용이지만 말씀은 우리의 귀에 들리는 데 반해 성례는 우리 눈에 보이도록 합니다. 또한 말씀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고 굳세게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굳세게 하는 역할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례는 들려지는 말씀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례는 그 자체만으로 믿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믿음을 성례를 통해 확증할 뿐입니다. 들리는 말씀 그리고 보이는 성례라고 할 때 요리문답 66문에서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좀 더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례를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고 우리에게 인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때 성례는 말씀에 부족함이 있거나 불분명한 것을 채워주거나 명확하게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명확합니다. 그래서 말씀만으로도 사실은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리는 말씀에 더하여 보이는 성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괴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코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 것입니다(기독교강요 1559, 4권 14장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이 성례를 결코 소홀히 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재정하셨다면,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재정하셨다면, 우리는 그 수단을 잘 사용함으로 주께서 목적하신 바에 따라 그 유익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어지는 문항에서 신약의 성례는 몇 가지인가 묻습니다.
68문.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에서 제정하신 성례는 몇 가지입니까?
답. 두 가지이니, 거룩한 세례와 성찬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후 69문 이하 82문까지의 내용을 통해 계속해서 살필 것입니다. 다만 신약에서의 성례라고 할 때 세례는 할례와 또한 율법이 명시한 각종 결례들을 대체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유월절 양을 비롯하여 율법의 각양 희생 제사들이 예시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신약에서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성례를 제정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이 두 가지 외에 다섯 가지 성례를 덧붙여 일곱 가지 성례를 주장합니다. 중생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는 세례성사, 신자를 은혜 가운데 강하게 하는 견진성사, 신자를 은혜 가운데로 회복하게 하는 고해성사, 신자를 은혜 가운데 유지시키는 성체성사, 죽음과의 투쟁에서 신자를 강하게 하는 종부성사 혹은 병자성사, 그리고 결혼과 관련된 혼인성사, 사제직과 관련된 신품성사가 그것입니다. 물론 세례와 성찬 외에 다섯 가지 성례라고 말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례로서 제정하신 것은 세례와 성찬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라 주께서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만을 교회의 성례로 행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