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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을 꿰뚫어보며 살자>의 줄거리:
세상을 꿰뚫어볼 수 없다면 실제로 삶을 사는 대신 삶을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풍성한 열매가 없이 공허한 이유가 바로 세상을 꿰뚫어봄이 없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흉내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꿰뚫어볼 수 없으면 모두가 다 시각장애인라고. 세상을 꿰뚫는 시선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을 꿰뚫어보며 살자
(마가복음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을 꿰뚫어보며 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을 꿰뚫어보며 살자’
우리는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껍데기만 보는 삶은 혼돈에 빠져들고 열매 없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50년을 살았고 60년을 살았는데도 도대체 뭘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삶의 껍데기만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꿰뚫어보며 살지 못했기에 오리무중의 흑암이 평생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세상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것은 숨겨진 모략이나 음모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마주하며 무엇인가를 볼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도 나의 곁에서 그 대상을 보고 계십니다. 또한 무슨 사건을 마주하든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와 함께 그 사건을 마주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나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꿰뚫어본다는 것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본질적인 분은 없습니다. 배우자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도 나의 배우자를 보고 계십니다. 건강문제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도 나의 건강 문제를 보고 계십니다. 이때에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일의 주권자이시며 의도를 가지고 이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볼 때에 우리가 직접 세상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이야말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을 마주했을 때에 하나님의 눈동자에 이 사건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우선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시선은 본질이 아닌 현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가르쳐준 기준을 따라 보는 동안에는 껍데기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껍데기만 보고 사는 세상은 공허하고 혼돈 속에 빠져들고 오리무중의 흑암이 뒤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잘 아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눈에 비친 서로를 볼 수 없다면 부부관계는 언제나 혼돈 속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고 허무하여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오해가 오해를 일으키고 비난이 비난을 물고 일어나며 불만이 더 큰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을 고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시각이 세 단계에 걸쳐 회복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눈에 침을 뱉으십니다. 그리고 안수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안수를 하십니다. 세 단계를 거쳐 시각장애인은 완전히 치유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시각을 회복하게 하셨을까요? 시각장애인을 고치시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10이라면 첫 번째 안수만으로는 능력이 5밖에 발휘되지 않았기에 재차 안수를 하셨던 것일까요? 결코 그러한 이유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신다면 침을 뱉으실 필요도 없었고 안수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보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말씀으로 삼으시고자 의도적으로 세 단계를 거치신 것입니다. 본문의 시각장애인이 고침 받은 사건은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행위로 나타난 말씀이자 설교입니다. 우리는 이 세 단계에 강하게 담겨있는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교훈을 조심하여 마음이 그들과 같이 세상에 접촉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교훈이란 실세를 추구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실세로 여긴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었고 헤롯당에 속한 자들에게는 헤롯이 실세였습니다. 이들이 실세를 찾고 이용하려고 했던 이유는 이 세상에서 손에 넣고 싶은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실세로 믿고 추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얻고 싶은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실세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세상에서 좋게 여겨지는 대상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이유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시각장애가 되어서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9장 4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르게 보고 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은 전혀 세상을 바르게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했고 그러한 가르침을 퍼뜨리는 이들의 모습이 맹인과 같았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요한계시록 3장에서도 등장합니다. 17~18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질책을 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시각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시각장애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행위로 나타난 설교입니다. 한 사람의 시각장애인이 온전히 치유 받은 것만을 기록하고자 한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이 완치되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못 보는 상태에서 보는 상태에 이르는 과정 중에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시고 두 번 안수하시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실제로 시각장애를 겪고 계신 분들도 세상을 마음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치유사건에서 나타나는 과정은 삶의 기본이 되는 본다는 행위에 반드시 예수님이 개입되셔야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취지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과 나라와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없다면 그 어떤 가르침도 맹인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예수님을 통할 수 없다면 맹인의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맹인의 가르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깊이 개입되실 수 없다면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개입을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람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보고 있어도 예수님이 개입하실 수 없다면 진짜 배우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돈이나 권력 같은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의 시선에 비친 본질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의 본질을 볼 수 없다면 돈에 대한 생각들 또한 혼돈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쓰지만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기에 벌면 벌수록 공허해집니다. 왜 돈을 벌려고 했는지에 대해 오리무중에 빠지게 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은 있어도 세상의 경제문제를 잠시라도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하나님의 시선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제시할 수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경제학자들조차 돈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새 코로나19로 많은 분들이 경제적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 문제를 이겨나가는 진짜 방법은 돈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또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학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개입이 세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눈에 침을 뱉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통용되던 미신적 민간요법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침은 예수님의 분신을 의미하고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침이 눈에 발라졌다는 것은 예수님과 마음이 밀착된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이제부터 그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예수님의 침이 덧대어진 상태에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먼저 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불뱀 사건으로부터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장대의 구리 뱀을 세웠을 때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뱀을 바라본 사람은 나았고 무시한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항상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육체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기에 앞서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침 묻은 눈에 안수를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침이 묻은 것만으로는 시각장애인의 눈은 완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무처럼 희뿌옇게 보이며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눈에 빛이 들어오고 상이 맺히기는 하지만 세상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은 이 상태는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배우자를 마주 대할 때에 육체의 눈으로는 배우자의 본질과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만 본질을 마주할 수가 있게 됩니다. 다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피사체에 가까이 접근해서 찍는 것을 접사라고 합니다. 꽃이나 작은 곤충에 초점을 맞추면 주변이 희미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뚜렷하게 초점이 맞추어져 보이는 것은 내가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에 육체의 눈으로 마주하는 배우자의 모습은 배경이 되어 흐릿하게 보입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먼저보고 예수님 안에서 죽은 나를 보고 있는 동안에 마음의 초점은 돈 문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안수하십니다. 그러자 시각장애인의 눈이 완전히 나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먼저 본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마음은 빛의 속도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마음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올라가고자 애쓰는 과정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덧 나의 마음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배부르게 되면 이 세상을 향한 시선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내 마음에 전달되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꿰뚫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장을 보면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 왕을 도와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사울 왕은 군대를 재촉하여 더욱 밀어붙이고자 합니다.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군법으로 명령을 내리자 모든 군인이 식사를 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싸우다 지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요나단은 싸우는 중에 이 명령을 듣지 못했고 지친 가운데 우연히 들에서 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그 꿀을 찍어 먹었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배부름이 눈이 밝아지는 효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굶주려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본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지 않는 한 대기업 총수나 세계적 재벌들도 배가 고픈 건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배를 채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단 하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보통 삼일 되는 날이 제일 괴롭습니다. 살면서 맛 봤던 모든 음식들이 다 떠오릅니다. 하늘에서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정도입니다. 기도가 삼일 째에 접어드니 하나님께 몰입되어야 마땅하겠으나 음식 생각 밖에는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허기진 상태에서 배우자를 바라보면 배우자가 나를 채워주기만을 기대하게 됩니다. 배우자가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아서 허기진 상태에서는 자녀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좋은 대학 들어갈 것을 요구하고 출세와 형통을 가르칩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 수 없으니 자녀의 본래 모습을 꿰뚫어볼 수도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감사가 없고 공허하기만 합니다.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이성을 보고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마음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멋진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배필과 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멋지고 예쁘게 보이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에 좋게 보인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대로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미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여겨지는 대상은 좋게 보이고, 없어지면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은 미워하게 됩니다. 좋음과 나쁨, 예쁨과 미움이 모두 마음의 허기에서 발생합니다. 마음이 허기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결코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꿰뚫어볼 수 없다면 눈 뜬 장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창이 이사를 했다고 해서 집들이를 갔더니 집이 너무 멋지고 좋습니다. 마음에서는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럴 때에 깜짝 놀라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허기진 마음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허기지지 않고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만족함이 주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강남의 아파트든 명품이든 일류대학이든 눈곱만큼도 갖고 싶은 대상으로 비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에 예수님의 침이 발라진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찰떡같이 달라붙게 된다면 예수님을 채우시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세상의 가치들이 더 이상 좋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좋게 여겨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임하여 쓰임 받게 되는 것을 좋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껍데기를 보고 반응하는 나의 마음을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세상 것이 갖고 싶고 부러울 때마다 깜짝 놀라며 시선을 주님의 십자가로 돌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세상을 좋아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일체를 이룰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 평강과 배부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상태가 유지될 때에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고, 꿰뚫어보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어 갈 것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먼저 보기만 하면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체의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보다도 마음으로 예수님을 먼저 보게 하셔서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가 꿰뚫어본 세상마다 빠짐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보게 하셔서 간증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