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기원(沈器遠) 사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청송심씨(靑松沈氏) 1587년(선조 20년)생으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었으나 잇다른 호란을 겪었고, 1644년(인조 22년, 57세)에 결국 역모를 꾸미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의 도당으로 몰려 유배를 갔다가 복위되어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던 심달원(沈達源)의 고손자이다. 선조 시기 학자이자 작가였던 권필(權韠)의 문하생이기도 했으나 그 때까지만 해도 벼슬 하나 없던 유생의 신분이었다.
광해군이 명-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고, 재위 5년(1613) 계축옥사로 조정 안팎이 뒤숭숭해졌다. 궁궐 증축 및 토목 공사가 잦고 매관매직 등 혼란이 발생하자 신경진,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 등은 광해군의 패륜을 이유로 들며 반정을 일으켰는데, 당시 유생이었던 심기원 역시 동참하였다.
1624년(인조 2년)에 종이품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괄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가 소천(昭川)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한교와 소천 현감 안사함(安士誠)에게 붙들려 압송되었다. 그런데 심기원이 신경진 등과 짜고 흥안군을 국문하지도 않은 채 창덕궁 돈화문에 목을 매달아 죽여버리는 악수를 두었다. 원래 조선은 사형도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서 집행한다. 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왕족을 죽임은 심각한 월권행위였기에 인조의 눈 밖에 나서 돌아오자마자 하옥되었다. 다만 흥안군이 반역에 동참하려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던지라 사형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1627년(인조 5년) 후금의 군대가 침공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감찰사(都檢察使)로 임명된 후 소현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을 간 뒤 분조를 도왔다. 이후 소를 보내 풍정연(豊呈宴) 및 왕이 정전(正殿)에 머무르는 것을 즉각 중단하고 분위사(奔慰使)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세자를 모시고 분조를 한 공을 인정받았는지 이듬해 인조 6년(1628년)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임명되었다가 인조 12년(1634)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년) 반정공신으로 좌의정 겸 남한산성 수어사였던 심기원의 모반사건이 터져 조정이 분란에 휩싸였다. 그 무렵 심양에 인질로 가있던 세자빈이 부친상을 당해 소현세자와 함께 일시 귀국했는데 임금이 문상을 가지 못하게 하자 ‘못난 임금을 폐하고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자’라며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심기원의 휘하에 있던 황헌과 이원로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에게 밀고함으로써 수면 위로 드러났다. 곧바로 국청이 열리고 주모자인 심기원과 회은군이 잡혀 들어왔다. 그때 심기원은 고변자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자신을 모함했다며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회은군 역시 며칠 전 심기원의 아우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문병하러 간 것 외에는 다른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미 비위가 뒤틀린 인조는 두 사람을 살려주지 않았다.
심기원은 인조반정의 1등공신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워 요직에 임명되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반역죄로 처형된 만큼 심기원의 시신은 팔방에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지만 심기원의 가족들로 하여금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인조는 심기원을 좋은 벗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심기원에게 크게 실망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일찍이 그는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인조의 서삼촌인 흥안군을 국문도 없이 멋대로 죽여 인조의 미움을 받았는데, 모반보다 당시의 사건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회은군 역시 사사되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소환되어 악형을 받은 끝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김자점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항간에 그가 역모를 조작했다는 풍문이 자자했다. 이 사건으로 최명길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김자점은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고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그 후 김자점은 청나라의 역관 정명수, 이형장 등과 결탁하여 친청세력을 형성하고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을 공고히 했다.
▲ 영국공신(寧國功臣)
조선 1644년(인조 22년)에 회은군(懷恩君)을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 심기원(沈器遠)의 역모를 평정한 공신에게 내린 훈명(勳名). 구인후(具仁垕), 김유(金瑬) 등 7인에게 내렸다.
심기원사건은 같은 훈신 사이에 있었던 군사권의 쟁탈, 반청(反淸)·친청(親淸)의 정쟁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결국 친청의 김류·김자점(金自點) 등이 승리한 사건이다. 이 때 역모사건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1등에 구인후·김류·황헌·이원로 등 4명, 2등에 신경호(申景琥), 3등에 여이재(呂爾載)·정부현(鄭傅賢)·이계영(李季榮) 등을 책정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이 공신책봉에 이의를 제기, 그 부당함을 말하여 그 해 6월 다시 책정하였는데, 1등은 구인후·김류 등 2인으로 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效忠奮威炳幾決策寧國功臣)이라 하였고, 2등의 황헌·이원로에게는 효충분위병기영국공신이라 하였다. 공신으로 1·2등만 책정하고 3등은 모두 삭제하였는데, 이는 태종 때의 정사공신(定社功臣)에 3등이 없다는 홍서봉(洪瑞鳳) 등의 주장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2년 뒤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1,655인 가운데에 포함시켰다. 영국공신에 책록된 구인후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고 황헌은 회흥군(檜興君), 이원로는 완양군(完陽君)에 각각 봉군되었으며 모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된 의령남씨 선조
- 남두명(南斗明) :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4세
- 남효원(南孝元) : 충경공 충간공 간성공파 14세
<참고문헌>
의령남씨족보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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