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피안(彼岸)의 세계다. 구름 속에 갈무리되어 마치 하늘나라처럼 신비스러운 유토피아, 곧 극락의 세계가 속리산이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의 옛 이름은 구름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운장대(雲藏臺)였다.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펼쳐진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리산은 동서로 이어지는 높은 능선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는 겹겹이 산줄기가 뻗어 있고 그 사이로 여러 개의 계곡이 깊은 골을 이루어 신령스러운 명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속세를 벗어난 아름다운 절경으로 속리산은 제2의 금강이라고도 불린다. ‘속리’라는 이름은 신라시대에 갖게 된 명칭이다. 신라가 통일을 한 후 불교가 융성해졌던 784년(선덕왕 5)에 진표스님이 이 산에 이르게 되었다.
산 아래 밭에서 소들이 밭을 갈고 있었는데 스님을 보자 일하던 소들이 모두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렇게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를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곳 사람들이 속세를 버렸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보다 오니로 물든 세상에서 깨끗하고 신성한 산으로 떠난 곳이라는 의미로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벽암대사비는 1664년(현종 5)에 건립되었고 비신의 높이 214㎝, 너비 108㎝, 두께 35㎝이며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금강문(金剛門) 앞에 위치하는데, 커다란 반석(盤石)에 홈을 파고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우진각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었다.
비문은 대사의 제자 처능(處能)의 부탁으로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지었고, 글씨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으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두전(頭篆)을 썼다.
그러나 위 설명문에서도 복창군 이정에 대한 부분은 빼 버렸고 비에서도 그 부분은 깨져 있다
벽암대사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법주사를 현재의 법주사로 남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런 인물의 비문은 보존이 소홀하여 밖에서 깨져가고 있는데 그 옆 속리산사실기비는 그렇지 않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5년(현종 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과 수정봉(水晶峰) 위의 거북바위에 대한 속설(俗說)을 소개하면서 미신의 타파를 주장한 것이다.
수정봉은 법주사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그 정상의 흙이 붉은데, 그 까닭은 본래 수정봉 위에는 천연적으로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중국의 술객(術客)이 와서 거북의 머리가 중국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번쩍 쳐들려 있는 형상임을 보고, 중국의 재화(財貨)를 모두 실어내갈 영물(靈物)이라고 하면서,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고 등 위에 10층탑을 세워 기운을 진압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이야깃거리 하나일 뿐인데 그 비문을 남긴 이가 서인의 맹주 송시열이고 송준길이니 이렇게 법주사수정교 앞의 보호각 안에 번듯하게 모셔져 있다.
한쪽은 법주사를 중창한 대선사의 비인데 전자를 쓴 이가 경신환국을 가져와 역적으로 몰린 남인의 한 중심이니 보잘것 없게 내동댕이 쳐져있게 하고 한쪽은 서인의 맹주로 조선후기 그들의 나라를 만들어 일제에 협조하다 현재에도 그들의 후손이 나라를 이끄니 이러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법주사에 있는 암각자들도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속리산 법주사 일원’을 비롯해 ‘가야산 해인사 일원’ 등 사찰과 주변의 자연경승지를 포함하고 있는 유산이 다수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적과 함께 명승으로 중복하여 지정하는 것은 사적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그곳에 쓰여있는 암각자들을 보자
조선후기 호령했던 서인 패거리들의 이름이 주로 암각되어 있다
이민서로 대표되어 노론 4대신의 숙부인 이민적, 이민직 같은 밀성군계 인물들.
이들의 자식들이 이이명, 이좌명, 이관명, 이건명이다
송시열, 송준길의 가문 은진송씨들인 송씨들.
여흥민씨 삼방파로 숙종대 인현왕후를 배경으로 조선말 고종 주변을 꿰차고 주무른 민씨들.
인조반정후 국혼물실을 기치로 내걸어 왕비만큼은 자신들 당인 서인에서 내야 한다 고집해 이를 추진 결국 왕권이 아닌 외척의 세상이 되게 하여 자신들이 좌지우지 나라를 가지고 논 서인들.
그들이 숙종을 깃점으로 영조, 순조이후를 세도정치 등으로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자신들 세계에서 그들 조직만 잘 사는 세계로 만든 이 나라.
지금까지도 서인들 후손이 친일파가 되고 그 친일파를 척결치 않게 한 이승만을 앞세워 나라를 장악, 현재의 보수정치 주인공으로 백성을 골병들게 하는 이 나라 정치.
그리고 역사를 조작하여 대표적 서인 장동김씨 김옥균 같은 인물을 메이지유신의 당사자 후쿠자와 유키찌, 야마가토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카오르 등 일본제국주의를 만든 이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움직여주니 치켜세워져 개화파란 같잖은 선각자로 만들어 후세에 훌륭한 인물로 세뇌시키는 역사.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을 이승만 정권 내내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을 내세워 탄압 월북하게 하거나 이승만정권 내내 암살 및 이기붕 박마리아를 내세워 척결해 기득권 세력을 장악한 그들.
그 후쿠자와유키찌가 만든 게이오대학에서 장학생으로 특채되어 공부한 윤석* 대통령 아버지 같은 인물이 나라를 이끄는 이상한 나라가 된 이 나라에서 미래의 희망을 논해야하는 미륵신앙을 찾아야 한다는 괴변이 통하니.
이 시대의 민중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서인들 그들도 좋은 것은 알아 민중이 속세를 떠나 찾은 이곳까지도 그들의 땅으로 빼앗아 자기들만 즐겼으려니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들이 민중을 핍박하여 빼앗은 돈으로 이 법주사도 현재의 법주사가 되었다면 이곳을 찾아 즐기는 나도 그들과 같은 한 몸통인가? 그것도 참 괴롭고 고통스런 이 시대를 같이 살아야한다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