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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1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9
설교 제목: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서 2:13~16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부르시며 의롭게 하시며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나는 의롭게 하신다는 말을 하나님의 뜻을 품을 준비를 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했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을 그 뜻을 마침내 완수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뜻을 받고 이해하고 적용할 때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경험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성경과 경험을 서로 비추어 바른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실 구도의 길이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확신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받고 품으며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치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의롭고 영화로운 삶
2.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3. 하나님이 주시는 꿈
4.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
1. 의롭고 영화로운 삶
지난 주에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29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형상을 덧입고 새롭게 되는 것은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소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음을 깨닫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지으심을 받은 것에 비유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그 선한 일에 다시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롭게 지으심을 받는 것이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전에 맡기신 일을 다시 맡아서 세상을 관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많은 형제들로 구성된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며 세상을 선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지향하는 목적이며, 하나님께 부름받은 공동체인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계속 이어서 말합니다. 그것은 전에 예정, 소명, 칭의, 영화라는 단계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매우 추상적이고 인간중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교회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장차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할 일이 있습니까? 인간의 사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저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은 그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전반의 내용과 비추어보면 매우 협소하고 한쪽에 치우친 해석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이며 마스터플랜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시고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통치하시고 관리하시고 번영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이며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핵심이며, 이스라엘의 시내산 언약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입니다. 예수님도 포도원을 맡아 관리하는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이라는 포도원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인간이 처음부터 지으심을 받은 그 목적을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미리 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우리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에는 의롭다 하시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성경에는 의롭게 하시고라고 번역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30, 표준새번역성경
의롭다 하신 것과 의롭게 하신 것은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의롭다 하시고는 흔히 ‘칭의’로 이해됩니다.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가 소개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도 도입됩니다. 그런데 의롭게 하신다는 말은 좀 다릅니다. 그것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롭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의로운 사람 노아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이 있습니다. 이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노아에게는 방주를 예비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낳은 그의 아들을 바치라 하셨습니다. 요셉에게는 정혼녀가 낳을 아들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자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이유는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담을만한 그릇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받고 담고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디모데전서 1:12~14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자기의 뜻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 뜻을 기쁘게 받아 순종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게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견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saints)이란 단지 우리를 구원의 완성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실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완전히 순종할 때 그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온전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시고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2:23).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시는 과정도 명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 뜻을 마음에 품고 순종하여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롭게 되는 것이며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는 삶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7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실천할 때 주의할 점을 일러줍니다.
2.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는 매우 따뜻합니다. 그 교회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자신의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빌립보서 4:1). 그렇기에 빌립보서는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신실한 신자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형제들이여, 감옥에 갇혀 있는 저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여러분을 부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서로 도와주고 짐을 져주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세상에서 칭찬을 받고 저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됩니다. 저의 소식을 전하러 에바브로디도가 갈 것입니다. 여러분을 미혹하게 하는 무리를 조심하십시오. 특히 여선교회 지도자 여러분 서로 화복하십시오. 저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서 저는 오늘의 본문인 빌립보서 2장 13절부터 16절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하시고 그 일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공동체 가운데서 그 일을 할 때는 어떤 일이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삶 속에서 이루어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만 하나님의 뜻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받고 그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존중하며 정당한 절차를 따라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망과 시비가 없이 원만하게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어그러진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교회는 그 하는 일과 그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 모두 세상에게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절차나 세련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려는 마음과 공동체가 하나되어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립보서 4:2~5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의가 생겼을 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나의 앞 길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도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도 복음에 멍에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끌고 가는 멍에를 함께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게 하셔서 그 뜻을 준행하는 영광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소원을 주시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공동체와 함께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때는 모든 일이 원망과 시비가 생기지 않도록 피차 존중하며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란에 휩싸이게 되면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꿈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인사말입니다. 그것은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말하면서 그 일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하나는 바라게 하시고 그 바람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바람을 갖게 하시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소원을 갖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소원은 때때로 꿈의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꿈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꿈은 우리를 흥분하게 하거나 걱정하게 합니다. 꿈은 아직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꿈을 꾸거나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될 때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 희망은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하게 하고 현실을 견디게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꿈은 인생을 활력있게 만드는 활명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라고 앞에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가실 때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때때로 꿈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 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오늘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꿈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그는 볏단의 꿈과 별의 꿈을 꾸었습니다. 들에서 일할 때 형들과 볏단을 묶고 있는데 형들의 묶은 볏단들이 일어서서 요셉이 묶은 볏단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하늘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 별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이 꿈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요셉은 이것이 무슨 꿈인지 알았을까요? 형들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이 요셉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요셉의 꿈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가족이 모여 사는 시절에 한 사람이 특별한 꿈을 꿉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깨우침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요셉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인지도 몰라!’ 전에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하늘의 별과 같은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시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꿈은 사람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진리를 떠날지라도 자신만큼은 진리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게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 종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모든 종들과 달리 요셉은 외국에서 팔려온 종임에도 집안 모든 일을 맡아 관리하는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은 이익을 보아도 마음을 지키고 도리를 다했으므로 그는 결국 보디발의 신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믿음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꿈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지 않게 해 줍니다.
요셉의 꿈은 감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왕의 측근들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꿈에 따라 한 사람은 복직되었고 한 사람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듣고 나서 그 꿈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인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꿈을 듣고 그것을 해몽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의 꿈이 어떤 의미인지를 판단하게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꿈을 따라 살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 때때로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뜻을 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꿈입니다. 그 꿈은 말과 행실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그 안에 있는 뜻이 다릅니다. 어떤 뜻은 속되고 어떤 뜻은 거룩하고 고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꿈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매우 중요한 자질입니다. 어떤 사람을 가까이할 것인가, 어떤 사람과 더불어 일할 것인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줄 것인가?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우리는 인생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소득이 없는 일에 휘말려 인생을 허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꿈은 우리에게 사람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4~16
요셉의 꿈 이야기에서 마지막 꿈은 왕이 꾼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자기 나라의 운명에 대한 꿈을 꿉니다. 그것은 일곱마리의 튼실한 소가 삐쩍 마른 소들에게 먹히는 것이었고 나일의 평원에서 일곱개의 알곡 이삭이 동풍과 함께 자란 일곱개의 마른 이삭에게 먹히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통해서 요셉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대비를 합니다. 그렇게 꿈을 통해서 요셉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을 사람에게 계시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 뜻을 계시하실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하고 그 꿈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꿈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뜻은 꿈을 통해서 주어지고 마음에 소원을 통해서도 주어지지만 예언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언의 은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예언은 점쟁이의 예언과는 다릅니다. 사주팔자를 믿는 사람이나 부적을 믿는 사람들은 점쟁이의 예언을 두려움 가운데 믿고 따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의 조종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 예언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렇게 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나고 지중해를 건너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는 전도자 빌립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네 딸들은 신앙심이 좋았습니다. 거기서 며칠을 머무는 동안에 유대로부터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사도행전 21:10~12
여기를 보면 전형적인 유대인의 예언 행동과 메시지가 나옵니다. 성령이 계시하시기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붙들려서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그 예언을 듣고 그곳 사람들과 바울의 동역자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고난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체포된다고 하잖아요!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성경을 봅시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13~14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발견합니다.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지나간 여러 성에서 성경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동족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꿈이나 예언이나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그것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점보듯이 자신의 일신을 위한 피할 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거기에 자신이 어떻게 동참해야 하는지를 인도해 주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속신앙과 기독교신앙의 차이입니다.
지금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유세를 하던 중에 총탄에 오른쪽 귀를 맞은 일로 시끄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트럼프를 구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위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의 위기를 모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포되었고 나중에는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그 일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결국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나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옳게 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담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리 저리 휘둘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묵묵히 그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