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이십육칙(二十六則)
이승권렴(二僧卷簾) 두 승려가 발을 말아 올리다.
본칙(本則) 역(譯)
청량 대법안은 대중들이 점심 공양 전에 설법을 들으러 오자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 때 두 승려가 함께 가서 발을 말아 올렸다. 법안이 말했다.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다. 清涼大法眼, 因僧齋前上參, 眼以手指簾. 時有二僧, 同去卷簾. 眼曰, 一得一失.
평창(評唱) 역(譯)
무문이 말했다. 자, 말해보라. 누가 얻은 것이고 누가 잃은 것인가? 만약 여기에서 외짝 눈을 얻는다면 곧바로 청량국사가 실수한 곳을 알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결코 얻었느니 잃었느니 헤아리지는 말아야 한다. 無門曰 且道. 是誰得誰失. 若向者裏著得一隻眼, 便知清涼國師敗闕處. 然雖如是, 切忌向得失裏商量.
송(頌)역(譯)
게송으로 읊다. 말아 올리니 밝고 밝게 거대한 허공에 사무치나 거대한 허공도 오히려 나의 종지(宗旨)에는 맞지 않네. 어찌 허공마저도 모두 놓아버려서 전혀 빈틈없어 바람조차 통하지 않음만 같겠는가? 頌曰 卷起明明徹太空, 太空猶未合吾宗. 爭似從空都放下, 綿綿密密不通風.
사족(蛇足)
청량(淸凉)의 대법안(大法安) 선사(禪師)는 법안종(法眼宗)의 고승(高僧)이다. 나한계침(羅漢桂琛) 선사의 법을 이었다. 청량원(淸凉院)의 문익(文益) 선사다. 대법안(大法安)은 시호(諡號)다. 법안종(法眼宗)을 창종(創宗)한 종주(宗主)인데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아래 청원행사(淸源行思)로부터 구대법손(九代法孫)이다. 한 종파(宗派)를 일으킨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 만큼 선지식(善知識)으로서 수행안목(修行眼目)이 출중(出衆)해야 한다. 법안선사가 개오(開悟) 깨닫게 된 것은 해제(解制) 행각(行脚) 중에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산길에서 헤매다가 다 허물어 져가는 작은 암자 지장원(地藏院)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원주가 반갑게 맞아주어서 서로 인사를 나누다가 원주가 묻기를 어디로 행각(行脚) 하십니까? 남방으로 갑니다. 원주가 행각이란 무엇입니까? 물었다. 법안선사는 모른다고 답을 했다. 원주 말이 부지최친(不知最親)이라고 평을 했다. 모르는게 부처라는 뜻이다. 대안선사는 몰라서 모른다고 하였는데 평이 친절하고 좋다. 원주가 다시 묻기를 조법사(肇法師) 보장론(寶藏論)에 보면 하늘과 나와 한 몸이라 했는데 산하대지(山河大地)는 그대와 같은가? 다른가? 물었다. 원주가 손가락을 들었다. 법안은 여기서는 같다고 했다. 이렇게 문답을 나누는 사이에 눈이 그쳐서 잘 쉬었다 간다고 작별 인사를 올렸다. 원주가 문밖까지 나와 작별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원주가 또 물었다. 그대는 평상시(平常時)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고 하던데 이 눈앞에 큰 바위가 그대들 마음 밖에 있는가? 마음 안에 있는가? 벽락 같이 호통을 치며 또 물었다. 법안은 마음 안에 있다고 대답을 하자, 원주가 멀리도 행각을 하는데 저 무거운 바위, 덩어리를 마음속에 넣고 다니려면 고생깨나 하겠다고 질책을 했다. 답 같은 답을 못해서 도망치듯이 나오다가 행각의 목적은 대 선지식을 만나서 견성성불이 목적인데 구태어 다른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자 바로 다시 지장원 원주를 찾아와서 코가 깨지도록 큰절을 올리고 지도 해줄 것을 간청을 드렸다. 이 원주가 바로 나한계침(羅漢桂琛) 선사다. 선사의 지도로 깨달음을 얻고 법안종을 창종하게된 연유다. 법안선사가 점심 공양전에 대중들이 법문을 들으려고 오자 손으로 발을 가리켰는데 두 스님이 발을 발을 말아 올렸는데,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고 법안선사가 말을 했는데 누가 잃고 얻었느냐? 가 이 공안화두다. 선문(禪門)의 공안화두(公案話頭)는 말길 생각 길을 끊어놓은 선어(禪語) 활구법문(活句法門)이다. 어림짐작으로 알려고 하면 사구(死句)가 된다. 개안(開眼) 개오(開悟) 전에는 입도 뻥끗 말아야 한다. 생각으로 알려고 하지 말라.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두 승이 발을 올린 공안화두는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 어느 곳이 허물인가? 법안의 이 관문은 혀에서 나왔나니, 눈 밝은 납승은 입다 물고 하늘이 깨져라, 웃을 걸세! 二僧卷簾公案話 一得一失何處愆 法安關門舌頭出 明僧閉口破天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