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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본문 <요3:22~30>
(전주) ‘ㅎ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 대해 나누었는데, 약간 보완 설명을 하고 오늘 주제로 이어가겠다.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약의 불뱀 사건과 연계해서 말씀하셨음에 유의해야 한다.
민21장에 나오는 불뱀 사건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ㅎ님을 원망 불평한 죄를 짓게 되는데, 이게 바로 불뱀에 물렸기 때문이었다. 불뱀은 사단을 상징한다. 모든 죄의 원인은 사단의 사주와 부추김에 의해서 조장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그 원흉으로 지목된 불뱀을 형상화해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는 해결책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세분화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왜 불뱀을 금이나 철이 아닌 놋을 만들라고 하셨을까?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놋은 주석이라고도 표현함)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손발을 놋으로 또는 주석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니엘과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보았는데 모두가 놋과 주석으로 된 발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았다.
(단10:4-6) “정월 이십 사 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계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예수님께서 놋과 주석의 발을 같고 계신다는 것은 심판주라는 뜻이다. 과거엔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셨지만, 재림 때에는 심판 주로 오신다는 말이다.
불뱀에 물렸는데 놋뱀을 장대에 매달라는 말은, 죄와 사망의 원흉인 사단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ㅎ님의 작정을 예표하는 상징이다. 그리고 나무에 매다는 것은 저주의 비유이다.
신21:23절을 보면(나무에 달린 자마다 ㅎ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말씀하심). 그렇다면 놋뱀은 예수를 상징하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육신은 일단 그렇다. 주님은 죄가 없으시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우리의 죄를 예수께 전가시킴/대속죄일 대제사장이 염소에게 안수-죄의 전가/ 세례요한이 예수께 세례 베품..죄의 전가 실현)
내가 죄의 저주를 받고 죽어야할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달리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천연적인 아담들은 옛뱀 마귀사단의 사주를 받아 선악과를 먹고 독사의 새끼가 되었다. 선악과란 바로 뱀의 가르침, 그 영(그 정신사상)을 뜻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ㅎ님을 배신하고 거역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그래서 마23:33절,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호통). 누구를 향해?(오늘날로 보면 너무도 믿음 좋아 보이는 당회장 목사님들과 신학박사들을 향해서 독사의 새끼들아!) 결코 연쇄 살인범이나 조폭 주목이나 강간범을 향해 질타하신 게 아니다(그럼 우리는? 더더욱 독사새끼)
회개란 윤리 도덕적 죄를 짓는 것을 반성하는 게 아니다. 선악과 먹고 죄로 죽은 자신을 모르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ㅎ님을 잘 섬겨서 ㅎ님께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한 그 정신사상, 즉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ㅎ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겨온 그 생각이 사단의 영(생각)이었구나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신이 바로 마귀새끼였음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회개도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지 인간 자신 스스로 회개할 수 없다. 그래서 마3.7절도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질타)-아무나 회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처럼 선악과 따먹고 ㅎ님과 분리된 모든 인간은 죄의 저주 아래 갇혀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는 그 죄와 사망의 올무에 벗어나지 못한다(늪에 빠진 소/몸부림칠수록~더 깊이). 그래서 그 중에 택하신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IX가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셨다.
예수의 죽음은 마귀새끼인 나의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에서 나라는 마귀는 끝났다. 그리고 주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셨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지만 주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사망이 주님을 가두어 둘 수가 없었다. 이로서 마귀의 전매특허인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IX 안에서는 주와 함께 부활생명이 된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는 영생의 존재가 되었다.
<롬5:8~11> 읽으면서..(예수님의 죽음의 역할: ->무죄로 화목시킴/부활생명 주심->의롭게 함)
-> 이 부활의 영을 받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실제이다. 내가 따먹는 게 아니라 먹여주심
놋은 아주 단단한 금속이다. ㅎ님의 심판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놋으로 뱀을 만들려면 단단한 만큼 매우 어려운 작업이 요구된다. 불에 달구어서 망치로 계속 수없이 쳐야 형상이 만들어 진다. 이는 ㅎ님의 매서운 심판이 십자가에 쏟아졌음을 비유한다. 한마디로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참혹한 죄의 심판을 겪으신 것이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주님은 십자가 달리기 전에 이미 로마 군병의 채찍으로 난자당하심: 가죽, 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몸은, 죄의 원흉인 사단과 그리고 사단의 영을 가진 우리의 형상이다. 내 죄를 전가 받은 저주의 몸이요 심판의 몸이다. 그래서 주님이 죽으실 때에 ‘나의 ㅎ님, 나의 ㅎ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신 것이다. 주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안 부르시고 나의 ㅎ님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뿐이다. 사적인 부자관계가 아니라 ㅎ님의 공의를 이루시는 심판의 자리였음을 암시하는 메시지이다. ㅎ님도 공의를 위해 아들을 외면하셔야 했던 고통의 자리였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도 울고 아버지도 우셨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마지막 3시간 동안(정오~오후 3시) 해가 빛을 잃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게 된 사유가 여기에 있었던 거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달라고~’ 기도한 것은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만큼은 ㅎ님과 분리되는 그 아픔, 우리의 저주가 되사 ㅎ님과 분리되는 그 게 가장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없으면 ㅎ님의 창세전 뜻이 성취될 수 없음을 잘 아시기에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소서~’ᆢ순종의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ㅎ님과 분리되는 가장 큰 아픔을 겪으신 고통을 수반한 그 십자가의 보배피의 의미를 얼마나들 알고 계신가? 그것에 대한 ㅎ님의 구원의 경륜을 함축해서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ㅎ님도 우시고 아들도 우셨던 십자가 사건은, ㅎ님의 자기백성에 대한 인간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높고 고귀하고 특이한 사랑이다. 우리 성도는 이 사랑을 거저로 받았다. 그것은 이 망극하신 ㅎ님의 사랑을 만방에 선전하여 드높이라는 목적에서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ㅎ님의 기이한 사랑, 그 놀라운 긍휼을 선전하는 게 성도의 본분)
(여기까지 이처럼 사랑하사~를 나누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가자.)
<요3:22~27> 읽고~
22절에~예수님도 세례를 베풀고, 요한도 근처에서 세례를 베푸는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안이 예수님이 물세례를 베푸셨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건 구원에 중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더 살펴보아야 한다. 주님이 행하셨다면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물세례란 무엇인가? (다시 말) 죄를 깨닫게 해서 옛사람을 수장시키는 것, 즉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너라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 가운데 태어난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물세례이다. 그러므로 물세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 가르쳐서 인간의 영적 실상을 깨닫게 하면 그게 물세례인 것이다.
물은 두 부류의 물이 있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다. 즉 하늘의 영과 땅의 영이다. 같은 ㅎ님 말씀이지만 하늘의 말(영)은 죄를 깨닫게 해서 죄를 사해주시는 IX께 나아오게 한다. 이게 복음이고 진리이다. 그러나 땅의 말(영)은 사람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유대교처럼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내라고 독려한다. 이게 율법적 사고이고 비진리이다.
요4:2잘 참조(예수께서 친히 세례 주심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렇다면, 본문22절은 왜 예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했나? 아직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철부지이기 때문에 어린애 신앙이고 율법적 관념을 아직 벗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님도 이것을 잘 아시기에 제자들이 물세례 주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때가차서 성령을 받게 되면 진리에 눈이 떠져서 다 알게 될 테니까 잠시 허용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 사도직을 수행할 때는 몇 명에게 물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비유였음을 알게 된 후에는 일절 물세례를 주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인도하신 ㅎ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고전1:12~15> 읽고, 육체에 주는 물세례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게 됨(누구 파냐? 분당 조장) ..그래서 사역 초기에 두 명에게 세례 주고 안한 것이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누구 세례냐?(어느 교회냐? 어느 목사편이냐? -IX에게 돌아갈 영광을 가로채는 악이 됨)
다시 본문으로 가자. 예수께서 요한의 근거리에서 세례를 베풀자 세례요한에게 몰려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예수께로 나아가게 되니까 요한의 세력이 점차 시들해져서,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불평 반, 걱정 반 토로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세상에 부각된 것이 스승인 요한 때문인데, 그 은혜도 모르고 예수가 더 많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게 못마땅한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나 할까? 요한의 덕을 무시하고 요한보다 더 유명세를 띠는 예수가 그저 밉기만 하다.
세상에서도 장사 시셈은 끝이 없다고들 한다. 특히나 갑자기 자기 매장 근처에 같은 품목을 파는 매장이 들어섰는데, 거기가 불티나게 잘 된다면 마음이 어떻게 되겠는가? 열 받아서 화가 하늘까지 치솟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하든 저놈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윤이고 뭐고 계산하지 않고 ‘대 바겐세일’을 써 붙이고 홍보할 것이다.
그러면 옆의 주인은 가만있겠는가? 맞불작전으로 나간다. ‘초특가 바겐세일’ 혹은 ‘원가 판매 세일’로 홍보해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게 인간들이다. 장사에는 타협이 없다 저 놈을 죽여냐 내가 산다는 약육강식이 작동되는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끝까지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 이 세상이다.
어디 장사뿐인가?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IX 안에서 교회는 하나라는 말은 이론뿐이고, 근처에 다른 교회가 들어서면 눈이 벌개져서 야단난다. 소위 고객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누가 정통이냐를 시작으로 이단시비가 일단 벌어지고, 교인 한 명이라도 교적을 옮기면 웬수가 된다. 가장 잰틀하고 가장 신사적이고, 가장 자비와 양보와 사랑이 넘쳐야 할 교회에서 세상 장사꾼처럼 시샘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교세가 크고 돈이 많으면 신도시에 건축을 해서 분양받아 온 아파트 입주민을 다 흡수하려고 시도한다. 게다가 예전의 교인들까지도 유지하려고 대형버스를 동원해서 실어 나른다. 한마디로 싹 쓰리 작전이다. 마치 어부가 저인망 그물로 바닥까지 흩어서 물고기 씨를 말리는 행태와 똑같다. 대형버스로도 감당이 안되면 지교회까지 세운다. 그리고 스크린 설교로 예배를 주도한다. 힘을 내세워 내 교회를 살찌우는 이기심과 교만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건 폭거요 폭력이다. 교회가 아니라 마귀 집단이다. 이들이 과연 목사이겠는가? ㅎ님 종 맞을까요?
교인들은 탐욕적 목사의 하수인이 되어 전도의 노예로 전락되었다. 전도를 많이 하면 천국에서 상이 크다는 헛소리에 세외되어 주야장창 전도지를 뿌리고 자기교회 선전에 열을 올린다.
각종 전도 상품이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연말에 결산을 해서 몇 명이상, 혹은 전도 등수를 매겨서 자동차, 냉장고, TV, 안마기, 등등 거기에 동남아 여행권 티켓 등등이 교인들은 미혹하고 있다. 다단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마도 다단계의 최정상을 달리는 곳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기다가 무슨 제자훈련이니 은사집회니 문제해결 기도회니 축복성회니 등등 플랜카드를 걸고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해서 운집된 교인들이 대형교회를 이루고 있는가? 십자가는 서 있지만 십자가 없는 교회, 설교는 있지만 새언약이 없는 교회, 죄의 책망은 없고 온갖 세상 축복이 넘실대는 교회, 거기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무당잡교 일뿐이다. 성령은 안 계시고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된 큰성 바벨론이다. 문제는 이것을 누가 알랴? 마치 맛집으로 소문난 곳에 사람들이 몰리듯이 다다익선 식으로 ㅎ님이 역사하기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여겨서 내심 그런 교회를 다니는 것을 자랑한다.
예전에 집사 때 ‘은혜와 진리교회’ 몇 년 다닌 적이 있는데, 같은 구역 식구 중에 한 장로가 있었다. 이 분은 부동산을 하시는 분인데, 자신이 이 큰 교회 장로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면 산다. 그래서 오랜 만에 엣 동창들을 만나면 장로라는 명함을 주며 전도한단다. 나 이런 사람이야..내 앞에서 꺼벅 죽어 줘야 해, 이런 취지이다.
지금 요한의 제자들이 바로 이런 상태이다. 지금까지 요한이 재야에서 그래도 내노라하는 일등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요한의 제자인 자신들도 요한 덕에 덩달아 같이 높임 받았는데, 교세가 예수 때문에 점차 찌그러지니 어서 대책을 세우라고 스승인 요한에게 다그치는 말이, 예수가 우리 고객을 다 뺏어간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의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27-30절>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예수로 인해 자신들의 사업이 몰락하게 되자 불만을 갖고 스승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권위나 사명들이 모두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보다 더 큰 권위와 사명을 가지시고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잠시 자신에게로 왔던 것 역시도 ㅎ님이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신 것인데 그것은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장차 하늘로부터 오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세례 요한을 대하면서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자신이 해야할 일에 대해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일하는 요한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한과 같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목회자는 더욱더 요한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양, 내 소유라는 생각을 가지는 게 아니라 ㅎ님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고 나에게 보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 교회도 아니고 내 교인도 아니다. 예수에게로 인도하라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자신에게 보내어진 사람을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좀전에도 언급했지만) 요즘 교회의 세태를 보면 '내 교인'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교인수 늘리기에 급급하고 한번 내 교인이 된 사람은 다른 곳에 빼앗기에 않으려고 온갖 술수를 부린다. 과연 이러한 모습에서 사람들을 예수에게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요한과 같은 사명을 볼 수 있겠는가? 요한처럼 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흔적이 보이는가? 오히려 내 교회가 흥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쇠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쇠하는 것으로 여겨서,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흥하게 해야 한다고 부추겨서 ‘교인의 사명’을 내세우며 전도의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의 기쁨은 내가 잘되는 것이다. 내가 흥하고, 내 교회가 흥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요한도 그러한 기쁨으로 살았는가? 요한은 자신의 기쁨을 신랑 친구의 기쁨에 비유한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맡는다. 주인공은 신랑이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신랑의 결혼을 도와주는 것이고, 다만 신랑 친구의 기쁨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자신의 기쁨이었다. 즉 신랑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자신이 사람을 취하고 자신이 흥함으로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흔히들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증인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해야 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우린 항상 그리스도를 빌미로 내가 앞장서려고 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섭섭한 마음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세례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을 지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신자를 자기에게 매어두려는 중개자는 예수님의 사람을 가로채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내 교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예수님의 사람을 가로채는 것이란 말이다. 신랑의 아내를 친구가 취한다면 이처럼 악한 일이 세상 어데 있겠는가? 내 교인이란 없다. 있다면 다만 그리스도의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흥하여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요한이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흥함이란 과연 어떤 의미이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흥함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회사라면 매출과 이익이 늘고 사원이 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교회라면 교인수가 많아지는 것을 흥함으로 생각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간다고 했을 때,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한 것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흥함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인보다는 기독교인 수가 많아야 기독교가 흥하는 것으로 여기거나, 내교회의 교인수가 많아야 교회가 흥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오병이어 기적 후 벌떼처럼 모여드는 군중을 일언지하에 흩어버린 주님- 예수 믿는 목적이 육신이 잘되는 일에 있음..육적 신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무슨 의미?)
요한이 말한 흥함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단 한사람도 자신을 바라봐서는 안되고 자신에게 나와서도 안되고 자신의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흥하여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것이 요한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다닌다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별개이다. 교인은 많으나 IX를 믿는 자는 소수이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는 자는 자기 죄를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서 사망에서 구출되었음을 아는 자이다. 그들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사람에게 다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일에 열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물세례이다)
한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이 목회자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의 기쁨은 자신의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을 보는 것에 있는 것이다. 요한이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을 누렸듯이 말이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자이다. 중심은 그리스도지 우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됨으로서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내가 중심적인 자리에 존재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간다. 자신의 공로와 헌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금새 자존심이 상해서 사랑이 없는 교회 운운 하며 불평을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곧 성도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양새인 것이다.
만일 성도가 어떤 성과를 올리는 일을 했어도 그 모든 일이 가능케 하신 분은 ㅎ님이시다. 그래서 자랑이 나오는 게 아니라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ㅎ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성경적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사람이 가는 것을 시기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이 자기 일이요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모임이나 교회에서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본분은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흥함을 위해서 우리들 자신은 쇠(망)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께 있기를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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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