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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0
로마서 7장 21-25절 [6장 5-6항]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타락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타락함으로 모든 인류는 타락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아담이 모든 인류의 뿌리입니다. 이런 부분은 대요리문답 22문, 소요리문답 16문에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모든 인류의 뿌리가 아담이라는 것,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일반적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죄가 전가 되었다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3항의 내용입니다.
신학에서는 이 죄를 원죄라고 하는데, 원죄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죄책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혹은 오염입니다. 6장 3항에서 원죄라는 말 자체는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죄책이 전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원죄가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책이 전가되었다고 할 때 그 죄책만으로도 사람은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죽음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고, 그 죄는 스스로가 짓는 자범죄를 짓지 않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원죄로 말미암아, 좀 더 정확하게는 원죄의 구성 요소인 부패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6장 4항에서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온다고 말하면서 그 부패에 의해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방향이 선이 아닌 죄와 악을 향한 방향으로만 있다는 것이요, 그런 방향으로 있으면서 죄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 아담 안에서 타락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시작해서 죄인으로 살아가 죄인으로 죽는 것, 이것이 아담 이후 보편적인 인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 가운데서 돌이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이 아닌 죄와 악을 향해서만 나아가던 사람이 돌이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의 삶에서 돌이켜 의의 삶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군가? 예정론으로 하자면 택자입니다. 구원의 서정의 한 부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 받은 자, 그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은 자가 그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다시금 살아난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5항에서는 중생자라 할지라도 그들 안에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음을 말합니다.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은 결국 중생된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는데, 5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본성의 부패는 현세 동안 중생된 자들 안에[도] 남아 있습니다(요일1:8,10, 롬7:14,17,18,23, 약3:2, 잠20:9, 전7:20).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되고 죽었을지라도, 그 자체와 그것의 모든 움직임들은 진실로 정확하게 죄입니다(롬7:5,7,8,25, 갈5:17).
이 부분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로마서 7장입니다. 신앙고백서는 14절, 17절, 18절도 인용하지만 오늘 본문으로 읽은 21절 이하 2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4항에서 살핀 것처럼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타락한 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합니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수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대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방향은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은 어떻게 말하느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선을 행하기 원한다는 것은 지금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대상이 중생된 자임을 뜻합니다. 에스겔 36장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된 자는 새로운 마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을 받았다고 해서 늘 선만을 행하기 원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악이 함께 있는 것도 늘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생된 자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24). 곤고하다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 형편이나 처지 따위가 딱하고 어렵다는 뜻인데, 왜 형편이나 처지 따위가 딱하고 어려운가? 선과 악의 싸움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22절과 23절의 말씀처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24절,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그러나 결국 25절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국 이 사망의 몸에서도 건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었다고 할 때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데 있으며, 새 생명은 얻은 자들은 새로운 마음까지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본성이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이 본성의 부패는 현세 동안 중생된 자들 안에도 남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점에서 중생된 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 3장 2절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도 합니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말과 혀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데,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말에 대한 실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말씀하면서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절에서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말씀하는데, 중생된 자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되었지만, 새로운 마음을 받았지만 거기서 늘 선만 나오고 그래서 선한 것만 말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만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전도서 7장 20절도 이런 우리에 대해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중생된 자가 아니면 ‘선을 행하고’라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되지 못한 자가 아무리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이라고 하는 것을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여겨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생된 자의 선이라고 할 때도 순수하게 100%의 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행하는 선에도 그런 부패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과 흠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행한 선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 선행에 대한 5항과 6항에서 다시금 살펴볼 것입니다. 어쨌든 선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중생된 자에 대한 내용인데, 문제는 이 땅에서 신자들은 선만 행하는 자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만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선을 행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것이 신자의 현 주소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고백서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본성의 부패는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되고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았고,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고,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서는 부패된 본성 자체와 그것의 모든 움직임들은 진실로 정확하게 죄임을 고백합니다. 즉 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제거가 되지만, 부패된 본성 자체는 남아 있어서 그것 자체로도 죄이며 또한 부패된 본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모든 움직임들은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의 완전성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은 단지 죄책만이 아니라 부패까지도 다 사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부패함은 남아있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탐심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성향일 뿐 죄 자체는 아니며, 세례를 받아 중생하게 되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가 제거된다고 말하는데,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본성의 부패가 현세 동안 중생된 자들 안에도 남아 있다고 가르칩니다. 앞서 살핀 로마서 7장을 비롯하여 성경의 여러 부분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만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본성의 부패가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되고 죽었을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 안에 있는 이상,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것이 모든 움직임으로 나오는 이상 진실로 정확하게 죄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신앙고백서는 원죄의 구성 요소로 죄책과 부패가 있다고 할 때 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제거 되지만(칭의), 부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성화를 통하여 계속해서 제거가 되어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성화를 통해 계속해서 제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완전함과 선행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부분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0문을 참고할 수 있는데, 세례 부분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씻음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요리문답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제사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죄 사함을 받고(겔36:25, 슥13:1, 엡1:7-8, 히12:24, 벧전1:2, 계1:5, 7:14), 또한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겔36:25-27, 요1:33, 3:5-8, 롬6:4, 고전6:11, 12:13, 골2:11-12).
그러므로 중생 된 자는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있다는 게 우리의 입장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7장 25절 후반부에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이런 싸움이 완전성화에 이르기까지 있게 됩니다. 완전성화는 우리가 죽을 때 이루어지게 되는데, 소위 영적 전쟁이라는 이 싸움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본성의 부패함과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죄에 대하여 죄로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하여 계속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으로 선을 행하는 등 열매 맺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성의 부패함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세를 가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세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은 원죄든 자범죄든 모든 죄에 대한 결과를 6항에서 말합니다.
모든 죄, 즉 원죄와 자범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위반하며 대적하는 것으로(요일3:4), 그 자체의 본성상 죄인들에게 죄책을 초래합니다(롬2:15, 3:9,19). 그로 인해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엡2:3) 율법의 저주에 매여(갈3:10) 영적이며(엡4:18) 일시적이며(롬8:20, 애3:39) 영원한(마25:41, 살후1:9) 모든 비참함들과 함께 죽음에 종노릇하게 됩니다(롬6:23).
3항에서 원죄에 대하여, 4항에서 자범죄에 대하여 설명했지만 원죄든 자범죄든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위반하는 것이요,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3:4)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최초의 죄는 다름 아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2:16-17). 그러나 하와가 먼저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듯 그의 법도 의로운데,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선악과 명령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법입니다. 결코 불법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또한 그 법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로운 법을 위반한 것이요 대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불법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물론 불신자들의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법이 불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니 불법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법에도 불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분이 어떻게 의와 상관없는 법을 제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법은 결코 불법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의로운 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악과 명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일반계시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통해, 또한 사람의 양심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런 의로운 법을 자신과 상관없는 것인 양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죄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자범죄 없이 원죄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위반하는 것이요 대적하는 것입니다. 원죄만으로도 그러하다면 자범죄는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죄는 그 자체의 본성상 죄인들에게 죄책을 초래하게 됩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든,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짓든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때, 또한 그런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짓는다고 할 때 누구도 죄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그러면서 10절 이하의 내용이 나오는데,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는 말씀입니다. 19절로 가면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한 마디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기다리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죄를 지었다고 하면 억울해 합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입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5항에서 살핀 것처럼 중생된 자도 율법 아래에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본성의 부패는 현세 동안 중생된 자들 안에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노아의 경우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하며(창6:9), 욥의 경우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욥1:1). 이런 자들이라면 얼마든지 율법 아래에서도 입을 열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3-4)
중생된 자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자로서 의인이라 칭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본성의 부패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율법 아래에서 입을 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입을 열 수 있습니다.
원죄든 자범죄든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위반하며 대적하는 것으로 본성상 죄인들에게는 죄책을 초래하는데, 신앙고백서는 그로 인해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 매여 영적이며 일시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들과 함께 죽음에 종노릇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에베소서 2장 3절이 잘 증거 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중생된 자에게도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이런 육체의 소욕을 거스릅니다. 그러나 중생되지 못한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만을 합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또한 죄인은 율법의 저주 아래 매여 있는데, 갈라디아서 3장 10절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란 무엇인가? 율법의 모든 행위들을 다 지켜 행할 때에만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율법 아래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본성의 부패함은 율법의 어느 것 하나라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온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혹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가정 아래 다 지키다가 하나만 범해도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는 게 율법입니다. 이런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저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원죄든 자범죄든 죄인들은 죄책을 초래하게 되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고 또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이며 일시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들과 함께 죽음에 종노릇하게 되는데, 영적 비참함이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8절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보통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땅으로부터 뿌리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영적으로 공급 받는 것이 없어 결국 영적 죽음 가운데서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일시적인 비참함은 로마서 8장 20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입니다. 맨 첫 사람 아담을 저주하실 때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고 말씀하셨는데, 땅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39절은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자기의 죄로 인하여 자기가 벌을 받는 것, 이런 일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비참함만이 아니라 영원한 비참함도 있는데, 마태복음 25장 41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일시적인 비참함, 다시 말해 이 땅에서만 고통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죄인들의 죄책으로 결과 되는 것은 영원한 불과 영원한 멸망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하나님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삶 또한 죽음으로 끝나고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5항에서 살핀 중생된 자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이 제거된 자들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책을 깨끗이 씻으셨습니다. 물론 본성의 부패함을 가지고 있지만, 본성의 부패함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가시며,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비록 이 땅에서는 완전성화를 이룰 수 없으나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모든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모든 죄가 동등하게 가증스러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0문에서는 “그 자체로도, 하나님 보시기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모든 범죄가 동등하게 가증한가?” 할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모든 범죄는 동등하게 가증하지 않습니다. 어떤 죄들은 그 자체로도, 악화시키는 여러 문제 때문에도 다른 죄들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가증합니다(요19:11, 겔8:6,13,15, 요일5:16, 시78:17,32,56).”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대요리문답 151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경중과 상관없이 “모든 죄마다 하나님의 손에서 받아 마땅한 것은 무엇인가?” 할 때 대요리문답 152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약2:10,11) 선하심과(출20:1,2) 거룩하심(합1:13, 레10:3, 11:44,45) 및 그의 의로운 율법을(요일3:4, 롬7:12) 대적하는 모든 죄는 지극히 작은 것조차 현세와(애3:39, 신28:15-68) 내세에서(마25:41)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하며(엡5:6, 갈3:10),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속죄 받을 수 없습니다(히9:22, 벧전1:18,19).”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자범죄에 대하여 대죄와 소죄로 구분합니다. 대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요, 소죄는 그러한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죄에 속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5장 20절과 21절과 같은 죄입니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기에 더하여 교회가 규정한 것과 일반적인 사람들이 인정하는 극악한 죄, 예를 들어 살인, 강간 등이 대죄에 속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대죄를 범하면 그동안 쌓았던 모든 공로가 없어지고,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하는 성도의 교제에도 참여할 수 없으며, 그 상태에서 죽으면 결국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하기에 대죄를 범했을 때 즉시 고해성사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소죄는 인간의 나약함과 결함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사소한 죄들로 결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신실한 믿음과 반성으로 영성체에 임하면 성체성사를 통해 용서된다고 합니다. 또한 소죄는 기도, 성경 읽기, 선행 등으로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소죄에 대해서도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교회법이나 고해성사 지침에는 일관적으로 소죄의 고백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데, 대죄든 소죄든 고해를 해야 할 죄로 여기긴 하지만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로 구분함으로 우리와는 다른 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탐심은 죄를 지으려는 성향일 뿐 죄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가톨릭의 입장임을 말했는데, 죄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딕스혼 부부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에서는 소죄란 결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죄가 죽음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만이 참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중한 죄와 경한 죄가 있을 수 있으나, 어떠한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망에 이르게 할 죄책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할 죄라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분이 친히 사람이 되어 모든 율법을 지키시고,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으로 사람의 죄책을 해결하시어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며,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통하여 사람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사람의 부패를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주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 죄 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