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있는 자리- 79
05/12/2024
in 칼럼
해바라기의 검은 눈물
우크라이나 태양의 꽃
누이는 오지 않았다
검은 불안이 해바라기 씨앗처럼 박힌 얼굴
한 모금의 술, 크바스가 필요해
잠을 위한 불꽃같은 술
낮과 밤은 서로를 할퀴면서 위로하지
150발의 장거리포가 산부인과에도 떨어졌다
식당에는 술잔이 사람 키만큼 쌓여가고
말 이빨처럼 드러내며
울고 있는 해바라기들
우울하고 지루한 식욕들
노랑 꿈을 꾸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푸른 꿈을 꾸는 자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해시시를 빨던 술집에도, 공장음식을
브래지어 속에 숨겨 나오는 조마조마한 마음에도
아르곤 주황빛이 그리운 밤
도시는 포화에 그을리고
입을 맞추고 있는 순간에도 불안한 이별
라디오가 또 비명을 지른다
로켓이 터져 수십 명이 죽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 밑에 깔린 생명들
뒷골목에는 쥐들조차 젖은 채 벌벌 떨고
포성소리에 제 이름마저 잊어버린 군인들
들판의 은빛 여우도 잿빛 하늘만 바라본다
일하자 일뿐이 없다
싸우자 싸움뿐이 없다
신발만 나뒹구는 잔해 속
혼수상태에 빠진 들판 어디쯤
내 사랑, 아직 살아 있나요
까만 눈물들이 다뉴브 강으로 흐른다
시작노트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는 남자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교통사고? 지병? 우리 집은 전쟁과 평화의 집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집에서 자랐습니다. 부친 성격이 워낙 다정하신 덕에 집안 어디에도 상흔의 후유증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요.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속에도 육이오의 파편이 날카롭게 박혀있었습니다. 어릴 적, 저는 그런 아버지에게 해운대에 가자, 수영을 함께 하자며 조르던, 눈곱만큼도 철이 없던 딸이었습니다. 전쟁과 고통은 여전히 21세기를, 우리의 등줄기를 꿰뚫고 있네요. 절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잿빛 해바라기 들판, 포성 소리가 들릴 때마다 달팽이관이 기우뚱합니다. 저는 점점 갚을 게 많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버지!
윤희경 /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시작시인선 2021), ‘빨간 일기예보’(리디북스 2022).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제10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수상, 제9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kyun788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