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깁시다.
본 문 / 고린도후서 6장 1∼2절
주 제 / 받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자는 멸망하나, 소중히 여기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작성일 / 2022년 9월 18일. (№ 22-38)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Ⅰ 복음의 양면성 (고전 1:18)
1903년, 동경제일고등학교에 다니던 ‘후지무라 마사오’란 학생이 17세의 나이에 자살을 했다. 그러자 일본 전역에서 청소년들의 모방 자살이 유행했다. 그가 남긴 유서 때문이었다. ‘후지무라 마사오’는 바위 위에서 떨어졌는데, 떨어지기 직전 나무껍질을 벗겨 ‘암두지감’(巖頭之感)이란 제목의 유서를 남겼다. 그 내용을 보면 그가 인문학의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이다.
유유하다 끝없이 넓은 세상, 요요하다 억만년의 긴 세월
오 척의 작은 몸으로 이 큰 비밀을 알고자 한다.
호라티우스의 철학 따위가 무슨 권위가 있을까
만유의 진상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노니 불가해(不可解)라.
나는 이 한을 품고 번민한 끝에 죽음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나니
이 절벽 위에 서 있느니 가슴 속에 아무런 불안도 없구나.
이제야 비로소 알았도다. 커다란 비관은 커다란 낙관과 같다는 것을
1903년이면 일본이 산업혁명을 이루고 아시아정복을 꿈꾸면서 ‘물질’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추앙하던 시기이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때 한 어린 학생이 “호라티우스가 만유의 본질을 어찌 알겠는가? 단언컨대 만유의 본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죽고자 한다. 삶과 죽음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런 말을 남기고 죽으니, 사회 분위기에 억압받던 청소년들이 모방 자살에 나섰던 것이다.
철학이란 만유의 진리를 알아내는 학문은 아니다. 만유의 진리를 일부라도 깨닫고, 깨달은 만큼 자신의 내면을 아름답게, 인간답게 가꾸는 학문이다. 그런데 ‘후지무라 마사오’는 학문을 통해 자신을 가꾸지 못하고 오히려 학문을 통해 죽음으로 달려갔다. 이런 경우 우리 어른들은 “헛공부를 했다”고 말하곤 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학문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능력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죽이는 독인 것처럼, 십자가복음 역시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망치는 ‘미련한 논리’가 된다는 말이다.
Ⅱ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 (고후 6:1)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만, 헛되이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여기지 말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기라는 권면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는 ‘새 창조’이다. ‘죽을 사람’을 ‘영생하는 사람’으로, ‘땅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은혜야 말로 최고의 은혜이다. 그런데 이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사람은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다. 이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왜일까?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사람은 자신을 가꾸지 않지만,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을 ‘새 사람’으로 가꾸어서 거듭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가꿀까?
첫째, ‘성결’로써 자신을 가꾼다. (고후 7:1)
고린도후서 7장 1절이다. “…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약속을 가진 우리’, 즉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전처럼 살지 말고, 깨끗하고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면 자신을 성결하게 가꾸어서 ‘거듭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사람은 다르다. 일단 은혜는 받았으니 ‘경건의 모양’은 취한다. 예배, 찬송, 기도에 열심이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헛되이 여기니 자신을 가꾸지 않아 ‘경건의 능력’이 없다. 여전히 추악한 이익 앞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산다. 이것이 은혜를 받았으나 그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젠 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입에 달고 설교하던 목사님이 있었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자신의 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동생으로 추앙했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 장로들에게 고발당했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헌금을 불투명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입에 달고 살던 ‘은혜’를 귀하게 여겼더라면 ‘성결’을 자신을 가꾸었을 것인데, 은혜를 헛되이 여겼기 때문에 자신을 가꾸지 못한 것이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을 성결하게 가꾼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둘째, ‘바른 신학’으로써 자신을 가꾼다. (고후 11:4)
고린도후서 11장 4절을 보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책망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자는 오직 예수뿐이고,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신다. 그런데 한국에서 태어난 예수, 십자가 대신 ‘벤츠’타는 예수, 부활하지 못한 예수, 마지막 때도 아닌데 나타나버린 예수를 쫓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와 동행하게 하시는 영이신데, 금이빨을 주는 성령,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리게 하는 성령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복음은 예수를 닮게 하고, 예수의 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복음을 돈과 출세에 결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오늘 본문의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혜를 헛되이 여겼기 때문에 ‘오염된 신학’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른 신학’으로써 자신을 가꾼다.
Ⅲ 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 (고후 6:2)
끝으로 바울은 ‘받은 은혜’를 반드시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때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귀하게 받아들였을 때라고 말한다. “구원의 날에 너희를 도왔다”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때에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자 한다면 ‘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바울은 이사야 49장 8절을 인용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니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살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여겼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권세에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아둘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바벨론으로 끌려와서야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성결’과 ‘바른 신학’으로 자신을 가꾸어야겠다.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은 은혜를 귀하게 여겨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며, 사는 동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기도>
하나님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 받은 은혜를 귀하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