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성경 해석의 비극은 두 집단의 똑같은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한쪽에는 현대적 개념의 ‘역사적 사실성’을 사수하는 데만 몰두하여 고대 문학이 가진 풍성한 신학적 의도를 놓쳐버리는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똑같은 현대적 잣대를 들이대며 과학적·역사적 사실이 아니니 성경은 가짜다라고 가치를 훼손하는 비평가들(Critics)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공격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고대 문헌에 현대의 꼬리표(Labels)를 붙이려 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시대착오적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무의미한 방어와 공격을 멈추고, 성경의 증언자들이 살았던 그 고대 세계의 문법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2. ‘발화의 틀’과 ‘발화의도’의 분리: 사진의 초점
성경의 권위를 올바르게 인정하려면, 무엇이 변하는 ‘문화적 그릇’이고 무엇이 변치 않는 ‘하나님의 계시’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훌륭한 사진작가는 주인공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주변 배경을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하는 ‘아웃포커싱’ 기법을 사용합니다. 사진에서 배경이 흐릿한 것은 기술적 오류가 아니라,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작가의 고도의 전략입니다.
내려놓을 것 (발화의 틀): 지리, 연대기, 군사적 수치, 고대 특유의 수사학적 기교들입니다. 이것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신 ‘문화적 제한’이자,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흐릿한 배경과 같습니다.
붙들 것 (발화의도): 저자가 그 사건과 인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핵심 초점입니다. 하나님은 실제 인물과 사건을 통해 일하셨기에 우리는 그 실재성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흐릿한 배경(수치, 연대)이 아니라, 선명하게 부각된 하나님의 얼굴(의도)을 향해야 합니다.
3. 영감의 참된 의미: 피카소의 눈으로 본 진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눈과 코의 위치가 제각각입니다. 해부학적으로는 ‘오류’일지 모르나, 그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본 ‘본질적 진실’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기록자들의 한계나 오류에 억지로 메시지를 끼워 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대 기록자들이 가진 문학적 전통과 문화적 상황을 ‘영감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증언자들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입체적으로 증언할 때, 그 과정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감 어린 발화가 됩니다. 앗시리아의 비문이 왕의 합법성을 선포하기 위해 세부 수치를 생략하듯, 성경 기자들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 위해 그들만의 문학적 화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비난받을 오류가 아니라, 진리를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4.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 거대한 풍경을 긍정하라
결국 성경의 권위는 파편화된 숫자 하나하나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이야기인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 속에 있습니다. 신명기 기자들이 아합 왕의 눈부신 군사적 성취를 과감히 생략(아웃포커싱)한 이유는, 오직 ‘언약의 실패’라는 뼈아픈 진실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와 ‘그분은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시는가’라는 거대한 진실을 오늘 우리 삶에 실제화(Actualize)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거대 담론을 신뢰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성경은 우리를 얽매는 ‘문자의 감옥’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