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뭇잎
허정
마지막 춤
돌멩이를 낳고
탑을 쌓고 일찰나
모조리 베어 버린 뒤
한 생을 버리는
마실가고 싶다
허정
자전거에 우산 하나 꽂고서 이웃 마을 연밭에 마실가는 궁황지 노인처럼 나도 김밥 한 줄 허리춤에 매달고서 럴럴럴 마실 가고 싶다
돈 걱정 자식 걱정 세상 걱정에 시달리는
친구 하나 깨워서
이보시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세 허튼 말로
위로하면서 럴럴럴 마실 가고 싶다
가다가 우체국 만나면 그 창문 앞에서 머나먼 추억에게 청마처럼 엽서라도 한 장 쓰고 그리고 햇살 아래 아직 즐거운 꽃들에게 인사해야지 그렇게 혼자서 럴럴럴 마실 가고 싶다
어제도 내일도 없이 꼭 오늘 하루만
데리고서 럴럴럴 마실 가고 싶다
당신 가까이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럴럴럴 마실 가고 싶다
선암매를 기다리며
허정
불러서 열릴 것 같았으면
기나긴 밤이 어찌 필요했겠습니까
아직은 미명
새벽바람 가르며 당신께 갑니다
굽이쳐 엉키고 부러진 바람 소리
마른 하늘 천둥소리처럼 몰려드는 날
그날이 오면, 당신은
승복 차림으로 정좌한 체
문이란 문 다 열라
호령 하시겠지요
젖은 바람 찬비 건너온 이들에게
징하게 아주 징하게
한 번 피어 보라 하실 테지요
허락하신다면야 당신 눈 속에 피어
선암사 풍경소리로 딱 한 번
울어 보고 싶습니다만
어찌 당신의 눈은
그리 어둡고 층층이 깊은
곳에서만 길을 내십니까
와온은 망둥어로 사는가
허정
물안개처럼 흩어지고 사라진다
가을 석류같은 붉은 와온의 해가
바다로 스며든다
스며든다는 것은 번져가는 일
소리없이 내 가슴에 먹물처럼
퍼져나가는 일
그리움처럼 먹물처럼
붓을 쓸어 기억하는 일
쓸려온 추억들을 칸칸이 넣는다
떨어지는 어둠을 뻘 위에
일제히 펼쳐놓는다
그립던 얼굴들을 호명한다
구멍 속 제 집으로 돌아가는
망둥어들의 행렬처럼
길잃은 나도 길을 찾아
돌아서면 헤어지면 어쩌나
윤슬에 반사되는 물고기는 수면을
차고 오른다
허정
물과 물 사이의 길을 흘러간다
바람에 몸을 기대고 한가한
구름을 타고 소리없이 지나가는 와온의 밤
지나가는 이 누구였을까
가만히 귀를 대고 파도의 언어를 듣고
미동하지 않는 두루미의 발
저 발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소란소란 거렸던 파도들
카페 게시글
순천문단 제48집 원고방
허정, 순천문단 48집 원고
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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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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