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가 남긴 세권의 설교집 - ‘흔들리는 터전’, ‘새로운 존재’, ‘영원한 지금’ - 이 개신교 개인 지성의 깊이를 추정하게 하여 준다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 ‘지상의 평화’ - 은 가톨릭 집단 지성의 깊이를 헤아려 볼 수있게 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금년도(2024) 전남광역치매센터의 창작 공모를 소개하면서 같이 공유하여 봅니다.
“항구한 노력 154.
우리는 정의의 객관적 요구와 구체적 현실 상황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것, 즉 교의적 원리와 지침에 따른 형태와 한계를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55. 우리 시대의 이런 형태와 단계들을 정의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인데, 그 이유는 각 개인이 세계의 공동선 실현에 기여함에 있어 오늘의 세계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의의 객관적 요구에 대한 현실 사회의 적용 문제에는 결정적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형제들은 모든 노력을 중지할 수 없으며, 이미 성취한 것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56. 모든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완성시켜야 할 부분들을 갖고 있는데, 다음의 것들을 실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즉, 생산 조직, 노동 조합, 직업 단체, 안보 체제, 법 질서, 정치 제도, 문화 시설, 보건, 휴식 및 스포츠 시설, 원자 시대와 우주 정복의 차원에 관한 것이다. 인류는 우주 시대에 접어들었고, 무한한 미래를 담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거대한 과제:평화의 건설 163. 선의의 모든 이들에게 거대한 과제가 되는 것은 진리, 정의, 사랑, 자유 안에서 사회 생활의 상호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곧, 개인들 사이의 상호 관계, 시민들과 정치 공동체들 간의 관계, 그리고 개인들, 가정들, 종교 단체들, 국가들간의 관계, 다른 한편 세계 공동체간의 관계들을 바르게 건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고상한 과제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 안에서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164. 위에서 언급한 기준에 따라 사회 생활의 상호 관계 재구성을 위해 활동하는 자들은 많지 않으나 그들에게 우리는 감사를 보내며, 항상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쇄신 작업에 그들을 민첩하게 초대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증가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힘을 합하는 것은 희망을 돋구어주는 일이다. 이런 명령은 의무이며, 사랑의 요청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섬광이 되고, 사랑으로 불타서 모든 인간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영적으로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165. 사실 개인들 안에 평화가 없다면, 곧 각자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질문한다. “네 마음이 정욕을 극복하기를 원하는가? 높은 곳에 계신 분에게 복종하고, 낮은 곳에 있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이때 네 안에 참되고, 안전하며, 가장 질서 있는 평화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화의 질서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마음의 통치자이며, 마음은 육체의 통치자이다. 아무것도 이보다 더 질서 있는 것은 없다.”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중에서 -
“옛날부터 내려온 종의 경험을 그대로 믿지 않고, 새롭게 직접 경험으로 재확인함으로써 얻게 된 가치있는 발견의 결과, 이것이 과학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는 본래 공기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불에 타면 다시 공기로 돌아갑니다. 공기를 나무로 변화시켰던 태양열이 이때 불꽃의 열로 방출되는 거지요. 그리고 남은 재는 공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데, 이것은 흙에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앞 세대의 위대한 스승들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믿음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학문은 과학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영역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시공간 속에 있는 인간의 위상은 주목할 만한 일련의 진화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지식이란 자연의 경이를 올바른 얼개(frame work)에 짜넣는 것에 지나지 않은 거라고 봅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여러 관점들을 모아서 서로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아인슈타인의 중력법칙(상대성 이론)을 수식없이 표현해보면 ①비행중인 우주선의 앞쪽에 있는 시계는 뒤쪽에 있는 시계보다 빠르게 가므로, 시간과 거리는 관측자의 위치와 관측하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며 이것은 시공간이 휘어져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②균일한 중력장 하에서 정해진 시간내에 고유시간이 최대가 되는 이동경로는 포물선이므로 휘어진 시공간에서 모든 입자는 직선경로(고유시간이 최대가 되는 경로)를 따라 움직입니다.(물체인 질량의 존재는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변화시킵니다. 즉 시공간의 ‘반지름 초과량’은 우리가 잡은 구형 안에 들어있는 질량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공간좌표(3차원 벡터)의 회전변환에서 시공간좌표(4차원 벡터)의 로렌츠 변환으로 좌표를 변환시켰을 때 에너지가 달라진다는 것은 진동수가 달라졌다(양자요동)는 뜻으로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세 개의 성분을 운동량으로 잡고, 나머지 하나의 성분(시간성분)을 에너지로 잡으면 완벽한 4차원 벡터를 이룹니다. 때문에 민코프스키(Minkowsk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순간)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통합된 형태(영원)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억 년 동안 팽이처럼 회전하며 우주 공간을 맴도는 공 위에 우리가 신비한 인력에 끌려 달라붙어 있는데, 우리 가운데 반쯤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가하면 원자들은 나의 뇌속에 들어와서, 한바탕 춤을 추고 나갑니다. 언제나 새로운 원자가 들어오지만 언제나 똑같은 춤을 춥니다. 어제의 춤을 기억하면서. 종합하여볼 때 진보를 위해 우리 인류는 발전의 출발점선상에 서 있습니다. 인간 정신의 발전, 지적인 삶의 발전, 이 발전을 위한 수많은 세월이 우리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알아야할 모든 것’ 혹은 ‘이것이 모든 것의 답’이라는 식의 확정적인 답을 지금 결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책무입니다. 그리고 나는 믿습니다. 무지와 의심과 불확실성이 과학의 가치로 간주되는 그날이 오면 역사 ‧ 경제 ‧ 철학의 다양한 진술을 정치적으로 결정하려고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미래에 인류의 참된 가능성이 무한히 펼쳐 나아갈 것입니다.”
리처드 파인만(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물리학 교수) 저 ‘발견하는 즐거움’(승산 펴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