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기념비 건립기금을 마련하려는 동료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은 그가 처음 의도한 것은 소나타였다. 짧은 성격의 소품들을 묶어놓은 모음곡을 주로 쓰던 그가 3악장 형식의 고전 소나타에 도전한 것은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착수하고부터 곡의 성격은 달라진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의 구름부터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클라라와 불같은 사랑에 빠진 슈만에게 이 세상은 온통 그녀였다. 그를 제자로서는 가장 아꼈을지언정 딸을 내어 줄 마음은 없었던 슈만의 스승 비크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클라라를 파리로 보내버렸다. 만남은 물론 편지 교환까지 힘들어진 이 불쌍한 연인이 사랑을 표현할 수단이라곤 오로지 음악뿐. 쉴레겔의 시, 은밀히 귀 기울이는 자에게 온갖 대지의 꿈 속에서 나지막한 음이 모든 음을 뚫고 울려 나온다 를 앞머리에 붙인 이 곡을 클라라에게 보내며 슈만은 적는다. 그 나지막한 음, 그건 바로 당신. 이렇게 이 곡은 은밀한 편지가 되었다.
슈만 스스로 그때까지 지은 곡 중 가장 열정적이라 표현한 1악장은 왼손의 아르페지오(펼침화음)로 시작한다. 베이스인 첫 음은 솔, 두 번째 음은 라로 둘의 간격은 2도지만 라가 솔 바로 옆이 아닌 한 옥타브 위에 위치하는 바람에 둘은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되었다. 곧이어 p(작게)로 숨을 죽인 왼손이 무색하게 오른손의 선율이 ff(아주 세게)로 등장한다. 일곱 마디 내내 거침없는 어조로 노래할 동안 왼손은 똑같은 베이스 솔을 계속 유지한다. 괘념치 않는 그의 마음, 또는 가질 수 없는 그녀. 오른손이 작게 속삭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베이스도 한 음 올라가 단조화성을 만들며 불안감에 동조한다. 서로 주저하는 듯한 ritard(점점 느리게)를 거쳐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 온 선율에 이번에는 트릴(연속 꾸밈음)이, 사랑을 속삭이는 새의 지저귐같이 고요히 등장하나, 점차 그 폭이 커져 광기로 몰아내린다.
자꾸만 엇갈리는 환상과 현실처럼, 함께 있지 못하는 연인처럼, 오른손과 왼손은 계속 당김음을 주고받는다. 41마디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같은 선율을 노래하는 양손. 애타지만 절대적인 하나의 선율. 정확히는 왼손의 내성까지 합쳐 세 성부가 같은 선율을 놓지 않는다. 다시금 잠시 엇갈리는가 싶다가 제2주제에 도달한 양손은 드디어 장조의 선율,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오른손 선율을 왼손이 따라, 왼손을 오른손이 또 따라. 그러다 노래하기를 갑자기 멈춘 양손은 74마디에서 미 플랫(내림 마) 음만을 남긴 채 파편처럼 흩어진다. 마치 모든 음을 뚫고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에 귀 기울이듯이. 그리고 이것은 이내 기타의 아르페지오를 연상시키는 왼손의 화음으로 바뀌고 그때 이것을 반주 삼은 오른손은 느닷없이 허공에 세레나데를 외친다. 나는 정말 당신뿐인데!
정작 이런 노골적인 1악장보다 클라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2악장이었다. 전형적인 게르만의 행진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폭발하는 감정 하나하나를 그대로 그린 이 곡을 받은 클라라는 8∼16마디에서 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답했다. 1악장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아낸 슈만은 3악장에 진정한 환상을 그린다. 앞 두 악장에 각각 폐허, 승리라고 소제목을 붙인 그는 3악장을 빛나는 왕관이라 이름 지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1악장에서처럼 다시 같은 선율을 노래하게 된 양손은 결국 축복 속에 당당히 행진가를 제창하고 이윽고 서로에게 완전히 어우러져 꿈의 세계로 빠져들며 곡은 끝난다.
초고에서의 이 마지막 부분은 1악장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갑자기 등장하는 이 오른손 선율은 베토벤의 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슈만은 출판을 위해 이 곡의 몇 군데를 수정하면서 3악장의 이 부분을 잘라내 버렸다. 대신 이듬해 클라라와의 결혼에 골인했고 마지막까지 그녀 가까이에 남았다. 그리고 이 곡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편지, 그만의 ‘Fantasie’로 남는다.